[텐아시아=이은호 기자]
서현우
서현우
배우 서현우는 ‘클래식’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대학로에서 프로필을 뿌리고 다니던 시절부터 첫 조연작 ‘그놈이다’의 개봉에 이르기까지, 서현우는 낡고 오래된 길을 걸었다. 그러는 동안 저 나름의 ‘곤조’도 생겼고, ‘곤조’에 반(反)하는 파격도 겪었다. 내적인 충돌은 곧 배움이 됐고, 스펙트럼을 넓히는 계기가 됐으며, 결국 정극과 트렌드를 모두 소화하는 21세기 형 클래식이 됐다. ‘핫’하지 않아도, 클래식은 영원하다.

서현우는 누구? 1983년 11월 20일 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를 졸업하고 지난 2010년 뮤지컬 ‘내 마음의 풍금’을 통해 정식으로 데뷔했다. 이후 연극 ‘맥베스’ ‘햄릿 디 액터’ ‘트루웨스트’ 등에 출연했으며, 영화 ‘고지전’ ‘러브픽션’ ‘관상’ ‘소원’ ‘끝까지 간다’ ‘베테랑’ 등에 단역으로 등장했다. 지난 10월 개봉한 ‘그놈이다’에서 첫 조연을 맡아, 장우(주원)의 직감을 무시하는 강력계 형사 두수를 연기했다.

10. 영화 ‘그놈이다’는 당신이 출연했던 상업 영화 가운데 가장 비중이 높은 역할이었다. 준비에 임하는 자세부터가 달랐을 것 같다.
서현우 : 그렇다. 일단 감독님이 체중 증량을 ‘강력히’ 요구하셨다. 능물스러운 느낌, 특히 극 중 장우(주원)를 무너뜨리는 장면에서는 육중한 느낌이 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나이를 더 들어 보이게끔 하는 장치이기도 했고. 10kg 정도를 요구하셨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웃음) 18~19kg을 찌웠다. 각오도 남달랐고, 욕심도 많이 났고, 열정도 많이 들어갔고. 나에겐 굉장히 특별한 영화다.

10. 두수(극 중 서현우의 역할)의 전사(前史)기를 쓰기도 했다면서.
서현우 : 과한 열정이었을 수도 있지만(웃음), 두수의 증조부가 누구인지까지 설정했다. 5페이지 정도로 전사기를 준비해 갔더니, 감독님이 놀라시며 기막힌 명언을 남기셨다. “자, 두수야. 너무 좋고, 이제 생각은 그만하자. 현장에서 맹수처럼, 동물적으로 해다오.” 허허허.

10. 그러고 보니 밸런스도 중요하겠다. 현장에서의 본능과 미리 분석해간 캐릭터 사이의.
서현우 : 분석을 할 때에는 굉장히 디테일하게 하려고 한다. 극 중 인물의 이름조차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름에서 나오는 뉘앙스가 있으니까. 그렇지만 오히려 현장에 가서는, 분석을 지워버리고 상황 속에만 빠져든다. 밸런스가 있다면 전체 극 안에서 내가 어느 부분에서 에너지가 쏟아져야 하고 어느 부분을 유하게 넘어가야 하고의 문제 정도다.

10. 그렇다 하더라도, 서현우인 채로 상황에 빠져드는 것과 두수인 채로 빠져드는 건 좀 다르지 않나.
서현우 : 이번에 굉장히 묘한 경험을 했다. 고개를 내리면 턱살이 접히고 배위에 컵을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배가 나오는. 옷을 입었을 때도 꽉 끼는 느낌이 있었고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달라지더라. 그런 리듬, 신체적인 변화가 두수에게 접근하는데 도움이 됐다. 목소리도 달라져서 더 무거운 느낌이 있었다.

10. 현재 영화 ‘터널’ 촬영 중이다. 그 작품은 어떤가? 역시나 전사기를 준비했나?
서현우 : ‘터널’은 상황이 정말 명확한 작품이다. 구조해야할 대상인 하정우 선배님이 있고 밖에는 구조대원, 기자들, 장비 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성훈 감독님이 장르적인 연기나 준비된 연기보다 자연발생적인 걸 중요하게 생각하더라. 나는 유승목 선배님의 동료 기자로 출연하는데, 현장에서 발생하는 대사들이 많았다. 감독님들이 그걸 잘 받아주고 높이 평가해준다. 유승목 선배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했다.

영화 ‘그놈이다’ 속 서현우
영화 ‘그놈이다’ 속 서현우
10. ‘그놈이다’에선 배역의 비중이 높았으니까, 감독이나 주연 배우들과의 의사소통도 전과는 차원이 달랐겠다.
서현우 : 상업 영화 단역을 꽤 했었는데 (조연은) 감독님과 소통의 깊이가 달라지더라고. 물론 단역도 가볍게 접근했던 건 아니지만, 조연은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가 생기지 않나. 현장에서도 선배님과도 얘기도 많이 하고, 조언도 들었다. 주원 같은 경우는 나보다 나이도 어리지만 굉장히 노련하더라. 유해진 선배님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내가 많은 조언과 격려 속에서(웃음) 그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감독님이 정말 많이 믿어주셨다. 전적으로 지원을 해주고 현장에서 문제가 생겨도 의견을 많이 들어주고. 내 작업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연기를 하면서도 더 자신감이 생기고, 더 편안하게 임할 수 있었다.

10. 이건 좀 무례할 수 있는 질문이라 미안한데, 주원 얘기가 나온 김에 물어보겠다. 당신은 어린 신인배우도 아니고 연극판에서 연기를 시작했잖아. 현장에서 어린 주연 배우를 보며 이런 심리가 생긴 적은 없던가? ‘그래, 네가 얼마나 잘하는지 어디 한 번 보자!’(웃음)
서현우 : 하하하. ‘그놈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현장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내가 작은 역할로 들어간 작품에서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주·조연을 할 때, 과거엔 ‘곤조’가 있었다. ‘그래, 얼마나 잘하나 보자.’ 특히 연극을 할 때가 그랬지. 그런데 카메라 작업은 나이를 불문하고 각자만의 색깔, 매력으로 표현하는 것이더라. 그래서 정답이 없는 것 같다. 요즘 들어서 특히 많이 느낀다. 예전에는 발음이나 발성이 잘함의 기준이었다면 요즘에는 연기에도 트렌드가 있다. 노멀하고 나에게서 비롯되는 연기를, 관객들은 물론 배우들도 선호한다. 그래서 어린 친구들을 봐도 배울 점도 있고, 전형성이 깨지는 현상도 많이 발견한다. 영화 ‘베테랑’에 유해진 선배님의 수행비서 역할로 출연했는데, 당시 유아인을 보면서 (연기에 있어서)상투적이거나 전형적인 것들을 타파하게 되더라. 저 대사를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 그야말로 유아인만의 매력이나 색깔로 접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배울 점이 있지.

10. 그간 믿어온 방식과 그것을 깨는 새로운 방식 사이에서, 내적인 충돌이 발생하지는 않았나?
서현우 : 그런 충돌을 공부할 수 있었던 공간이 독립영화였다. 제작환경부터가 상업영화보다 긴장감이 덜하고 좀 더 편하니까. 그 안에서 소통하면서 연기에 대한 ‘곤조(根性, 뿌리 깊게 박힌 성질)’를 깨고 내 안의 충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어린 친구들에게 스며들어갈 수 있는 감각을, 독립영화나 단편 영화를 통해 익혔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그래도, 정극은 살아있다는.(웃음) 어쩌면 마지막 ‘곤조’인지도 모른다. 이병헌 선배님을 보면, ‘달콤한 인생’ ‘그 해 여름’ 혹은 훨씬 이전의 ‘내 마음의 풍금’ 등에서부터 최근작 ‘협녀’ ‘내부자들’까지, 변함없는 톤의 연기를 하시잖아.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쪼’가 있거나 정형화된 게 아니라, 그 분만의 안정된 연기가 있다. 결국 자기 색깔이 중요한 것 같다. 머릿속에서 연기에 대한 정답을 찾기 보다는, 수용하는 게 제일 중요하겠지. 충돌에 대한 고민은 계속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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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어느 작곡가가 말하길,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척’을 할 수 있지만 연극·뮤지컬 배우들은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더라.
서현우 : 정확한 얘기다. 그래서 가끔은 공연 중에 과한 에너지 발생돼서 몸을 다치기도 하고 목소리를 잃기도 한다.(웃음) 관객들이 소름끼칠 정도로 찰나를 다 보더라고. ‘지금 거짓말로 하는 구나’ 혹은 ‘테크닉으로 밀고 가는구나’, 반대로 ‘가슴으로 부딪혀서 하는구나’ 등. 더불어 그 분의 말에 한 가지 더 얹는다면 그래도 연극에 테크닉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내용의 공연은 수십 회 하는 거니까, 그러려면 어느 정도 컨디션 조절이 있어야 하거든. 장기간 공연을 하니까 기능적인 요소가 어우러져야 한다. 2~3% 만큼의 기능을 잡은 상태에서 진실성이 더해지는 거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영화가 더 솔직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10. 어떤 이유에서?
서현우 : 포커스가 잡히는 것도 그렇고, 클로즈업 되는 순간도 그렇고. 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스크린도 엄청 크고. 그리고 관객들은 돈을 내고 영화를 선택하는 거잖아. 그래서인지 굉장히… 장면을 뜯어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점에서 영화라는 매체가 진짜 솔직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감정을 쏟아내는 씬을 찍어야 하는데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니까 오케이가 안 나왔다. 그런데 다음날 목이 완전 쉬어버린 거야. 그 상태에서 찍으니, 오케이가 나더라고. 리얼함 그 자체를, 비틀어 쥐어짜내야 할 수 있는 부분도 있는 거다.

10. 얼마 전, 무대 위에 마련된 객석에서 연극을 관람한 적이 있다. 눈앞에서 배우들이 움직이는데, 그 에너지가 굉장하더라. 여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그 안에서 연기하기 어려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서현우 : 오히려 무대 위에 올라가면, 관객들이 안 보인다.(웃음) 그런데 굉장히 외로워지는 순간이 있다. 혼자 있다는 고독한 느낌. 나는 그 느낌이 좋아서 연극을 하거든.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순간. 내가 맡은 역할과 만날 수 있는, 집중이 되는 시간이 주어지더라. 조명에 따라서 앵글이 결정되는데, 그 고요하고 고독한 느낌이 굉장히 매력적이다.

10. 연기를 한다는 건, 그러한 고요함 속에 돌 하나를 던지는 일이잖아. 그 또한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할 것 같다.
서현우 : 연극 무대는 굉장히 자유로운 공간이다. 한 발짝 나가는 게 어려운데, 막상 확 나가버리면 뛸 수도 있고 누울 수도 있다. 물론 학교에서도 틀을 깨기 위한 교육을 많이 받았는데, 그건 기능적인 측면에서 밸런스를 맞추는 선인 거 같다. 반면, 돌 하나를 던져버리는 일은 경험에서 비롯된 거지. 겪어봐야 그 다음 스텝도 나갈 수 있다.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긴 하다, 사실은.

10. 배우들 사이에서의 스파크도 어마어마할 테고.
서현우 : 어마어마하지. 내 캐릭터와 나라는 배우의 아우라를 뿜어내기 위해서 에너지 싸움도 하고. 어떤 연출가는 “연극에서의 연출은 디자이너일 뿐이다. 무대가 올라가면 배우의 예술이다”고도 한다. 그래서 더 위험한 거 같다, 스파크가 튀기 좋은 환경이라.

10. 아까 얘기했던 작곡가는 배우들은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기 때문에 손동작 하나에도 다 의미가 있다고 했다.
서현우 : 선생님한테 들은 얘긴데, 무대 위에서의 모든 행위는 시(詩)라고 하더라. 그렇다고 해서 정말 시적으로 무용 같은 동작을 하라는 건 아니고.(웃음) 예를 들어 카메라의 클로즈업을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고 했을 때, 리듬과 템포를 활용하라는 거다. 컵 하나를 잡을 때에도 배우가 빠르게 다가가서 천천히 움켜쥔다면 관객들은 그 손과 컵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결국 배우는 감성이 아니라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거다. 드니 디드로가 쓴 ‘배우에 관한 역설’이라는 책을 보면, 충격적인 말이 있다. “배우는 감정으로 연기하는 게 아니다”라는. 배우 자신이 처한 상황과 극 중 인물의 상황이 대치될 때, 감정에 의존해 연기할 수 없다는 거다. 예를 들어 한 배우가 분장실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무대에 올라 헤벌쭉 웃는 연기를 한다고 치자. 그럼 그 연기는 거짓이 되는 거잖아. 그러면 배우는 무엇에 의존해 연기를 해야 하느냐. 바로 ‘행위’란 거다. 거기에서 비롯된 게 메소드 연기일 수도 있고 러시아 스타일의 성격구축이 될 수도 있는데, 아무튼 난 그 말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연극의 세계에서 배우는 행위만으로도 관객에게 뭔가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영감이 됐든, 감성이 됐든. 그리고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건 관객들의 몫인 거고.

서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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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특히 ‘햄릿 디 액터’라는 작품에는 네 차례나 출연했다. 상당한 애정이 있는 작품인가 보다.
서현우 : 성천모 연출님이 연출한 작품이다. 원래 ‘햄릿’에는 등장인물이 어마어마하게 나오는데 여기엔 단 세 명만이 등장한다. 처음엔 ‘이게 뭘까’ 의구심을 품었는데, 영악할 정도로 모든 연결고리를 찾아내서 과학적으로 풀어내더라고. 그 작품을 하면서 굉장히 많은 것들을 얻었다. 무대에서의 에너지도 그렇고, 셰익스피어 작품은 전형성이 있잖아. 그 안에서 나 자신을 어떻게 컨트롤할지도 많이 배웠다.

10. 그런데 ‘햄릿’ 같은 고전 작품은 현대적인 가치와는 잘 맞지 않는 부분도 생기지 않나. 특히나 연극은 내 몸 그대로를 보여주는 장르니까, 극 중 인물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면 연기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다.
서현우 : ‘햄릿’에는 공감하기 힘든, 극단적인 설정이 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하고, 덴마크의 왕자가 돼야 하며, 극 중 의상도 어색하고.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표현법은 이국적이고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본질을 보는 관객들은 분명 있다. 심지어 한 번은 초등학생이 와서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작품을 보더라. 어려운 언어들이 사용되고 현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어떠한 막 없이 그냥 받아들이는 게 본질 아닐까. 그걸 느낄 수 있다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10. 설정은 낯설지언정, 작품이 품고 있는 가치는 모든 인간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이란 뜻인가?
서현우 : 모든 사람이 동의하진 못할 지라도 상상에 있어서의 공감은 있다고 생각한다. 고전이라는 게 왜 고전인지에 대해서도 그 작품을 하면서 정말 많이 고민했다. 왜 아직도 햄릿이어야 하나. 정말 재밌는 건, 배우가 바뀌면 작품도 바뀌거든. 특히 그 작품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를 배우한테 맡겨버렸다. 소리를 질러도 되고 낮게 읊조려도 되고. 배우가 바뀔 때마다 작품이 다른 느낌을 가지는 걸 보면서, ‘관통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근간은 흔들리지 않고 다른 보는 재미가 생기는구나. 그래서 고전인가’라고, 스스로 합리화 했다. 하하하.

10. 극 중 “연극은 우리의 의지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대사가 나온다. 연극뿐만 아니라 삶 역시도 우리의 의지대로 흐르지 않기 마련인데, 혹시 의지와 다르게 발생한 경험 중 당신의 인생에 치명적이었던 사건이 있었나?
서현우 : 연기를 시작하게 된 일. 내 입으로 얘기하긴 민망하지만(웃음) 초등학교, 중학교 때엔 공부만 하는 스타일이었다. 부모님의 기대도 컸었고. 학교-도서관-집을 오가는 삶을 보냈다. 고등학교도 자립형 사립 고등학교로 입학했는데, 그 학교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곳이었다. 그 때 연극반에 들어가게 된 거다. 연극을 한 편 올리고 공부를 전~혀 할 수 없었다. 문제집 한 페이지를 네 시간동안 들여다 볼 정도로 산만해졌다. 그리고 그걸 잡아주는 게 연극이었고. 나한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부모님의 기대는 걸려 있지, 성적은 계속 추락하지. 심지어 한국고교신문에서 기자 활동도 하고, 기숙사도 탈출했다. 고3땐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마음을 억지로 다잡고 공부를 했으나, 결국 대학 입학 1년 만에 공부를 때려치우고 한예종 연극원 시험을 봤다.

10. 그 때부턴 ‘연기’가 당신의 의지가 됐던 거네. 혹시 부모님의 반대 말고도, 당신의 의지에 반해 흐르던 게 있었나? 환경의 문제라던지 혹은 나 자신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서현우 : 쇼킹한 사건은 없지만, 매순간이 의지대로 흐르지 않는다. 2010년부터 돈을 받고 일을 시작했는데, 그 전부터 무수히 많은 고민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겁이 나기도 했다. 부모님께는 연기과 교수가 되겠노라고 얘기했지만, 대학원엔 가지 않고, 프로필을 돌리며 대학로를 돌아다니고, 그러면서 부모님의 신뢰는 점점 잃어가고. 어디론가 걷잡을 수 없이 향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20대 후반에는 그게 극에 달해서 ‘잠깐만 쉬었다갈까’ ‘내 의지대로 끌고 와 볼까’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럭저럭 흘러온 것 같다. 지금은 ‘이게 내 직업이구나’라는 생각이 점점 밀려온다. 그리고 동시에 돌아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의지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말을 그대로 수용해버린 것 같다.

10. 배우라는 직업을 받아들이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서현우 : 서른이 넘어서부터는, 피드백이 오더라. 예를 들어 현장에 가면 전에 작업했던 스태프나 나를 기억해주는 감독님이 있는 거다. 그 전에는 ‘배우’라는 일이, 내가 마냥 쫓아다니는 일이고 뭔가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느낌이 있었다. 연극을 하면서도, 물론 즐기면서 임하지만, 작품이 끝나고 나면 허망함이 엄청나게 밀려오곤 했다. 다음 작품이 무엇이 될지, 내가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점점 피드백이 오고 소속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지금은 어떤 작품에 출연하고 어떤 인물을 연기하건, 그게 설레고 흥분되고 재밌게 느껴진다. 설령 내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서른셋이라는 나이가 배우가 내 직업으로 다가온다는 걸 느낄만한 때인 것 같다.

10. 주도권을 쥐었다는 자신감이 생긴 건가?
서현우 : 리드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끌고 갈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그것 역시 좋다는 거다. (배우 세계에)속한 상태로서 내가 계속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상업영화의 큰 역할도 좋지만, 그게 없는 시기에는 단편영화를 하면서 내 즐거움을 찾을 수 있고. 그냥 이게 내가 하는 일이 된 거다. 당신은 뭘 하는 사람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연기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답할 수 있게 된 거지.

서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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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빨리 뜨고 빨리 지는 세계다. 서른네 살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당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서현우 : 일단 현재의 철학은 나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는 거다. 작업을 하던 현장에서 연기를 하던, 아닌 척 혹은 그런 척하고 싶지 않다. 표현하고 싶은 것들, 부딪히고 싶은 것들을 속임수 없이 보여주고 싶다. 꾸밈없는 연기를 하고 싶고, ‘나’로서 시작하고 싶다. 그리고 그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른네 살이 되면서 가진 포부는, 늪에 빠져서 연기하고 싶다는 거다. 다작하고 싶고, 역할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끝까지 가고 싶다.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고 가고 싶기도 하고. 더 이상 어떤 의심도 망설임도 없다. 스스로에 대한 발견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

10. 극한이라. 끝의 끝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가?
서현우 : 아마 처음의 생각이 있지 않을까. ‘한 번 해보자’하고 몰고 갔었던.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에서 처음으로 돌아가는 순간이 계속 반복된다. 공연도 그렇고 작품도 그렇다. 한 작품을 끝내고, 아쉬워하며 스태프들과 눈물의 이별주를 나누고, 그러다 새 작품을 만나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게 그냥 이 안에서의 삶인 것 같다. 그리고 주변 동료 배우들을 보면, 지금 잘 친구도 있고 잘됐던 친구들, 잘 되려고 준비 중인 친구들이 있다. 그 과정과 모습을 지켜보고 조언을 해주면서, 이젠 유명세에 연연해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할 일이기도 하고, 유명해진다는 게 힘들다는 걸 알고 시작한 일이기도 하니까. 꾸준히 가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 탑이 되고 싶다. 이런 걸 시키고 저런 걸 기대했을 때에도 응당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끝도 없이 가는 길인 것 같다. 간혹 “주변 사람들이 잘 된 걸 보면 부럽지 않냐”는 질문도 받는데,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스스로 마음을 다 잡고 해나갈 생각이다.

10. 부러워는 해도, 당신이 유명세를 위해 연기할 것 같진 않다.
서현우 : 사람마다 시기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연은 하늘이 점지해준다고 생각하고. 흥행이야말로 의지대로 흐르지 않는, 마치 강물과도 같은 거니까. 다들 하는 얘기지만 본인이 즐거워하고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다면, 또 너무 조급해하고, 스스로를 채찍질을 하다못해 살이 찢어질 지경이라면, 잘 해낼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작업에 즐겁게 임하려고 한다.

이은호 기자 wild37@
사진. 풍경엔터테인먼트, 영화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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