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메인 포스터
끈적끈적한 에로무비인 줄 알았는데 보고나니 영락없는 할리퀸 무비다. ‘속았다!’ 깨달으며 뒷목 잡지 않으려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트와일라잇’의 순진무구한 팬픽(팬에 의해 탄생한 2차 창작물)에서 시작된 이야기였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본다면 내내 실망하고 민망할 수 있다.전 세계적으로 1억부 이상 팔려나간 원작의 어마어마한 흥행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여성들이 바라마지 않는 백마 탄 왕자에 대한 총체적인 백일몽이라는 점. 젊고 잘생기고 돈 많은데 몸매까지 다부진 대기업 CEO가 평범한 시골뜨기 여대생에게 강한 호감을 보인다? 게다가 이 억만장자는 늦은 밤 취한 여자를 위해 한 걸음에 달려와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고, 데이트를 위해 시애틀 상공에 헬기를 띄우는가 하면, 졸업선물이라며 빨간색 아우디를 ‘무심한 척 시크하게’ 내밀고, 어머니를 만나러 먼 길 떠난 여자 앞에 헬기 몰고 ‘짠’하고 나타난다.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나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현빈)이 대적할 상대가 아니다. 그야말로 진일보한 현대판 차밍 프린스다.
신데렐라 스토리에 심취한 여성들의 마음에 기름을 부은 두 번째 흥행 이유는 남자의 기묘한 성적 취향이다. 단순한 성적 취향이 아니다. 이름하야 BDSM! 풀어해석하자면, ‘B(결박,Bondage)+D(체벌Discipline)+SM(가학피학적성애)’다. 평소엔 점잖은 신사인데, 침대위에 올라서면 색정광으로 돌변하는 남자는 여자의 손목에 수갑으로 채우거나 채찍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방식으로 상대를 지배하고 학대하며 쾌감을 느낀다. ‘도미넌트(주인)와 서브미시브(하인)’라는 다소 시대착오적인 관계를 화끈하게 비튼 묘사는 전 세계 여성들의 얼굴을 홍당무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소설의 영화화 소식에 뭇 여성들이 들썩인 건 이 때문이다.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영화가 개봉도 하기 전에 가학적 정사 씬으로 인한 보이콧 운동이 일어나는 등 영화를 둘러 싼 관심은 치솟았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그레이. 거두절미하고 이 영화가 소문대로 그렇게 거대하게 야하냐고 묻는다면, 이 정도로 그런 난리가 일어난 게 살짝 민망할 정도다. BDSM적인 성향만 걷어내면 그냥 그렇고 그런 말랑말랑한 멜로물인데, SM 묘사도 창의성이 한참 부족할 뿐 아니라 심심하다. 노골적인 노출은 많지만 그것이 전혀 관능적이진 않고, 남녀 주인공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도 그다지 은밀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밧줄, 채찍, 수갑, 테이프 등을 총동원해서 이토록 야하지 않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란 생각마저 인다. 만원에 가까운 입장료를 지불하고 어두운 극장 안에서 쾌락과 탐욕의 광경을 기다린 관객들로서는 “애걔~ 이게 다?”란 볼멘소리가 나올 만하다.
사실 이 영화에서 관객을 정말로 충격에 빠뜨리는 것은 농밀한 정사 씬이 아니라, 심각하게 오글거리는 대사들이다. 드라마 ‘상속자들’에서 김탄(이민호)이 내뱉은 “나, 너 좋아하냐” “또 다시 무릎 꿇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진” 류의 대사들이 그득그득하다. 그레이의 50가지나 되는 그림자 중, 단 하나의 그림자도 엿보이지 않는 것도 이 영화의 패착이다. 후속편을 위한 준비운동이라 하더라도 남자 주인공이 지닌 트라우마에 대한 심리묘사가 지나치게 얄팍하다. 그레이가 지닌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의 여주인공 마음이 딱 관객 마음이다. 영화는 관객들이 감정이입할 지점을 너무나 쉽게 포기해 버린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아나스타샤로 캐스팅 된 다코다 존슨은 그나마 이 영화가 얻은 큰 수확이다. 반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원작 팬들의 항의 속에 도중하차한 찰리 허냄 대신 마성의 남자 주인공 자리를 따 낸 제이미 도넌의 경우 캐릭터 묘사 상의 허술함과 배우 본인의 ‘미숙한 연기’로 인해 팬들의 기대를 살짝 부셔버린다. 제이미 도전의 진짜 섹시한 모습이 궁금하다면 차라리 그를 세계에 알린 캘빈클라인 속옷 광고를 보는 게 낫다. C마크 팬티 하나 걸친 모습이 영화 속 왕자보다 훨씬 화끈하니까.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영화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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