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인데 진솔하다. 더구나 여배우인데 솔직하다. ‘신인 그리고 여배우’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을 고백한다. 이들은 진솔하거나 솔직하기 힘든 존재다. 편견을 들이밀고 싶지 않은데 안간힘을 다해 자신을 포장하려 애쓰거나 소속사가 교육시킨 그대로 이야기하는 앵무새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기껏해야 한 시간 남짓 인터뷰 시간,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드러내달라 요구하는 것이 어쩌면 더 말이 안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특별한 누군가가 있다. 시간과 장소, 상황이란 제한들 모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버리고 성큼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 말로 설명이 잘 안 되는 분위기는 그저 행복한 우연이라 말할 수밖에.

배우 고성희는, 올 초 ‘미스코리아’라는 MBC 미니시리즈로 지상파 주연급에 진출해 최근 MBC ‘야경꾼일지’, 첫 사극의 긴 여정을 끝내고 돌아온 이 여배우는 자신의 머릿속을 꽉 채운 복잡한 고민들을 놀라울만큼 털어놓았다. 자신의 성장통을 고백하는 고성희와 마주한 시간이 도리어 고성희란 배우의 존재 가치에 확신을 가진 시간이 되었던 것 역시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행복한 우연이었다.


Q. ‘야경꾼일지’를 마친 뒤 어떻게 지냈나.

고성희 : 아직 하루도 못 쉬어서 정신이 없다. 어쩌면 이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정신없이 지내니 그나마 덜 허전한 것 같다. 도하는 내게 큰 의미가 있는 아이었다.

Q. ‘미스코리아’의 재희 역시 극중 상당한 비중의 인물이었지만, 도하는 첫 주연이라 더 각별했을까.
고성희 : 확실히 주연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했다. 애틋하다. 극적인 인물이었고 사랑과 액션, 여러가지가 다 담겨있는 아이었던터라 배우로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다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이라 각별했던 것도 있다. 동시에 ‘야경꾼일지’는 한 사람으로서도 배우로서도 성장을 많이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금 역시 성장통을 겪고 있는 것도 같고. 큰 의미로 남은 작품이었다.

Q. ‘미스코리아’에 들어가기 직전 당신을 만나고,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때가 벌써 올해 초였는데 연말이 다가오니 1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고성희 : 내 스스로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려낸 도하도 그렇고 그걸 통해 고성희에게 일어난 일들, 배운 것들을 되돌아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연기 하나하나 하기에 급급했기에 그래서 더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번 작품은 정말 정신 없이 찍어서 도하의 삶을 살고 있는데도 도하의 삶을 잃어버릴 만큼 여유가 없었다. 나만의 시간, 여유는 정말 필요한 순간 같다. 요즘 많은 것을 잊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여유가 없을 수록 감정이 너무 일정해지는 것 같다. 연기를 하는 사람이라서 좀 더 풍부해야하는데 자꾸 앞만 보고 가다보니 가끔은 뒤를 돌아봐야 하는 시간이 참 필요하다.

Q. 차기작 선택에 대한 계획은 세웠나.
고성희 : 아직 잘 모르겠다.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하기 위해 회사에서도 고민하고 있다.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

Q. 지난 번 당신을 만났을 때와 지금, 분위기가 굉장히 많이 달라졌다. 그 때는 새로 시작하는 신인의 패기로 가득차 있다면 현재의 고성희는 고민으로 가득차 있다는 느낌이 든달까.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질문은, ‘미스코리아’와 ‘야경꾼일지’, 지나고보니 어떤 작품이 더 힘들었나하는 점이다.
고성희 : ‘미스코리아’도 힘들게 찍었는데 그 작품이 차라리 더 쉬운 거였다. ‘아경꾼일지’는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또 사극이라는 장르가 주는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첫 사극에 첫 주연작인데다, 정통 사극이 아니라 제약이 많은 상황에서 도하는 너무 사극스러워서도 안 되면서 사극이 아닌 듯 연기하면 낯설어 하시더라. 중간 선을 찾는 것이 내게 과제였다.

Q. 초반에 표현한 도하와 후반부 도하는 많이 바뀌었고, 그래서 고성희라는 배우의 고민, 노력이 느껴졌다.
고성희 : 첫 등장과 마지막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초반에 나온 양갈래 소녀, 아무 것도 모르고 서툰 그 아이가 그립다. 그 아이를 연기할 때가 더욱 즐거웠다. 하지만 낯설어 하시는 분들도 계셨고, 그래서 겁을 먹었던 순간도 있었다.내 해석이나 내 진심이 전달이 안 될 수도 있다는 마음에 상처도 받았던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좀 더 전달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다보니 무언가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는데도 따라하게 되더라. 그래. ‘야경꾼일지’는 내게 그런 성장통을 겪게 해준 작품이었다.


Q. 참, ‘야경꾼일지’는 고성희가 처음 경험한 젊은 배우들이 이끌어나가는 작품이기도 했다.
고성희 : 그렇다. 이렇게 나이차가 안 나는 배우들과 함께 하는 것이 처음이었는데 걱정도 됐던 것이 늘 좋은 선배들이 많이 이끌어주셨는데 혼자 어떻게 해나가야 할까에 대한 부분, 또 친해질 수 있을까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정일우, 정윤호 선배들이 워낙에 스타니까 아무래도 처음엔 걱정이 되더라. 하지만 많이 챙겨주셨고, 특히 신에서 자주 겹쳤던 정일우 선배는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큰 도움을 주셨다. 내가 정말 아무 것도 몰랐거든. 처음 한양에 와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며 성장했던 도하의 상황과 내 상황이 똑같았다. 카메라 라인도 몰랐던 내가 하나하나 배워가며 상처도 입고 단단해지기도 하는 과정에 있었다. 아, 그리고 이 작품이 특이한 것이 감독님도 그렇고 주연 배우는 물론, 윤태영 선배, 김성오 선배 등 많은 배우들, 스태프가 큰 의미를 두고 있더라. 이상하게 다들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싶어했고 그렇게 최선을 다 했던 분위기가 신기했다. 그 마음들이 하나로 모였다는 것이 말이다.

Q. 그런 경험을 하게 해준 작품이기에 가슴에 남는 필모그래피가 될 것이란 생각도 든다.
고성희 : 굉장히 오래 남지 않을까 싶다. 희로애락 등 여러 감정을 필요로 하는 이런 작품을 앞으로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이 작품을 통해 난 많이 배웠다. 또 내 스스로 배우라는 것이 또 연기라는 것이 현실적인 직업으로 다가오는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했다.

Q. 앗, 그 표현 새삼스럽다. 현실적인 직업으로 다가왔다라. 전후가 확실히 달라졌단 말로 들린다.
고성희 : ‘야경꾼일지’ 전에는 연기를 하는 것 자체가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일인터라 마냥 즐겁고 감사했다. 하지만 ‘야경꾼일지’를 하면서는 책임감도 많이 느꼈고, 나 하나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연기에 대한 갈증도 커졌고 또 어려워졌다.

Q. 지금껏 표현한대로 그야말로 성장통을 확실히 느끼게 해준 작품이란 말인데, 말 그대로 성장통이기에 현재의 아픔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더 나아질 자신을 알기에 지금 실컷 아파보자 하는 그런 느낌 말이다.
고성희 : 맞다! 아파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내가 연기를 잘 하고 싶은 사람이구나 새삼 깨닫기도 했던 것 같다. 욕심이 없었다면 만족하고 할텐데 만족을 스스로 못하니까 매 순간 내 아픈 감정, 상처들마저도 오래 기억하고자 했다.

Q. 그런데 말처럼 아픔을 즐기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다. 한순간 무너지게 될 때도 있다. 그러다 또 주변의 다독임에 힘을 내기도 하고.
고성희 : 첫 촬영 시작하고 긴장도 많이 하고 혼란스러워할 때 감독님이 ‘그냥 나는 너가 도하라고 생각해. 도하는 딱 너야. 그러니까 아무 것도 더 하지 말고 너대로 너답게 네 자신을 믿고 너에게 주어진 대로 하면 돼’라고 말씀해주신 것. 그것이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연기적으로 질타도 받았고 응원도 받았던 상황 가운데,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에 내 스스로 감독님을 피해다니게 되더라. 그러다 정일우 선배가 고기를 사주셔 다 함께 회식을 했는데 감독님이 먼저 ‘넌 너무나 많은 매력을 갖고 있는데, 현대극이 아니다보니 네 매력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깝고 미안했다’라고 말씀 하셨다. 감독님은 촬영하면서 ‘현대극이라면 고성희의 이런 모습을 보여줬겠지’라는 상상도 혼자 해본다고 하셨다. 그 마음이 벅차게 감사했다. 정말로.


Q. 결국, 배우는 작품 안에 있는 사람을 통해 달라지고 성숙해지는 것 같다.

고성희 : 정말 한 작품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게 즐겁고 좋고 뿌듯하다. 성취감을 느끼게 되기도 하고. 또 한편 묘하게 슬프기도 하고(웃음).

Q. 슬프다라?
고성희 : 어떻게 보면 마냥 의욕많고 욕심도 많고 겁 없이 밝기만 했던 내가 많이 깎이게 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좋은 성장이라 믿는다.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지금의 아픔 아닐까 생각한다.

Q. 아무래도 이번 작품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겪기도 했으니까. 가까운 이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왔던 상황에서도 연기에 몰입하는 배우의 위치를 새삼 절감해야하는 시기를 겪어야 했다.
고성희 : 친구(권리세)가 하늘나라 갔을 때, 처음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같이 꿈을 꿨던 친구였다. 서로를 응원했던 존재였다. 그 날은 내 자신에게 맛있는 것을 먹는 특혜마저 주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를 먹을 수도 없더라. 미안했다. 내가 지금 숨쉬고 있다는 것이…

Q. 끝으로, 이 모든 성장통을 지나가면 어떤 고성희가 있을 것이라 믿나.
고성희 : 서서히 정신을 차리면서 내 스스로 뭐가 되고 싶은가를 생각해보면, 세 가지다. 좋은 배우, 좋은 여자, 좋은 사람. 이번에 작품 하면서 했던 고민 중 하나가 내가 사람 욕심이 많다는 것이다. 첫 주연작이기도 하고, 여주인공으로서 더 나은 연기에 욕심을 부리면 예민해져야 할 때도 있지 않을까 싶었고, 내 연기에 더 몰두하고 있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지라 다른 주변 사람보다 나를 더 챙기는 것이 힘들더라. 나 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힘들게 하면서까지 연기에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뭐, 나는 훌륭한 배우는 결국 인간성이 좋은 배우라고 배웠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선배들을 믿으니까, 이제 그 고민은 끝났다.

Q. 어, 그렇게 선한 사람이라니 고성희가 사고를 칠 일은 없을 것 같다?
고성희 : 아니, 난 사고뭉치다. 충동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물론 사회면에 나올 사고를 칠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웃음).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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