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자, 태양, 크러쉬, 불독맨션(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사라져 버릴 까봐 떠나가 버릴까봐, 그림자 같이 너를 내 곁에 두었어, 꿈이 사라질까봐 모습 사라질 까봐, 싫다고 말을 해도 놓지를 않았어, 넌 진정 나를 몰라주고 말았어

김추자 ‘몰라주고 말았어’ 中

김추자 ‘It’s Not Too Late’
우리는 김추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김추자의 현역 시절을 실시간으로 보진 않았다손 쳐도 ‘무인도’ ‘거짓말이야’ ‘님은 먼 곳에’ 등의 감동은 지금 들어도 익히 알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 곡들이 지금도 생명력을 지니는 이유는 바로 비교 대상이 없는 김추자의 목소리 때문이 아닐까? 33년만의 컴백 앨범에서 김추자는 공백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왕년의 호쾌한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마치 홀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처럼 말이다. 과연 이것이 예순네 살의 목소리인가? 김추자는 최근의 트렌드를 받아들이기보다 과거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의 전통적인 느낌을 따르고 있으며 녹음에 있어서 원초적인 느낌이 잘 살아있다. 가령 ‘몰라주고 말았어’ ‘고독한 마음’ ‘가버린 사람아’ ‘태양의 빛’ ‘내 곁에 있듯이’(이상 신중현 곡)는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연상케 할 만큼 예스러운 사운드를 들려준다. 이와 함께 이봉조의 곡인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소’, 김희갑의 ‘그대는 나를’, 정혜정이 만든 ‘춘천의 하늘’도 완연한 옛 가요의 느낌이다. 김추자의 그루브를 타는 리듬감, 목소리의 아우라는 명불허전. 국내 최고의 연주자들인 송홍섭, 한상원, 정원영, 배수연 등이 만들어낸 밴드 사운드는 한국 고전 록의 미감을 잘 살렸다.

태양 ‘RISE’
태양의 4년 만의 정규 2집. 태양은 기존 솔로앨범들을 통해 R&B 장르에 특화된 음악을 들려준 바 있다. 전작들에서 노래와 댄스를 한껏 살린 댄서블하고 화려한 곡들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라이즈(RISE)’에서는 보컬을 살린 슬로우템포의 곡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타이틀곡 ‘눈 코 입’은 R&B 발라드 곡으로 미니멀한 연주를 통해 목소리를 부각시키고 있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태양이 홀로 슬로우 비트를 타며 춤을 추는 모습이 보이는데 웃통을 벗은 초반은 미국의 R&B 뮤지션 디안젤로를 연상케 한다. 이외에도 ‘스테이 위드 미(Stay With Me)’ ‘이게 아닌데’ ‘버리고’ ‘러브 유 투 데스(Love You To Death)’등 넉넉한 비트의 곡들이 대부분이다. ‘이게 아닌데’는 의외로 브릿팝의 느낌이 나기도 한다. 태양의 목소리는 예전에 비해 보다 담백해졌다. 기존의 앨범에서 R&B의 창법을 구사했다면, 이번 앨범에서는 특정 스타일을 보여주기보다 곡의 분위기에 맞게 노래하는 편이다. 이제는 보컬리스트답게 슬슬 태양 본인의 음색으로 어필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크러쉬 ‘Crush on You’
최근 가요계 주요 움직임 중 하나는 R&B 싱어송라이터들의 급부상이다. 정기고, 크러쉬, 자이언티, 진보, 범키, 계범주 등 소울(R&B) 음악 계열의 뮤지션들이 그들. 크러쉬는 크러쉬는 개리의 ‘조금 이따 샤워해’를 비롯해 박재범, 자이언티, 다이나믹듀오, 리듬파워, 로꼬, 사이먼디, 양동근 등과 함께 작업을 해오며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첫 정규앨범 ‘크러쉬 온 유(Crush on You)’에서는 노래부터 작사, 작곡, 프로듀서까지 맡으며 자신의 작업을 온전히 제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이나믹듀오의 개코와 최자부터 자이언티, 그레이, 박재범, 사이먼디, 리디아 백, 쿠마파크, 진보에 이르기까지 참여한 아티스트들은 최근 그 어떤 피처링진보다도 더 화려하다. 이처럼 피처링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 앨범은 그렇지 않다. 크러쉬는 각 곡에서 함께 한 뮤지션들과 적절한 앙상블을 이루며 트렌디한 R&B의 성찬을 선사하고 있다. 흑인음악 마니아부터 파티를 좋아하는 여성들까지 만족시킬만한 앨범.

불독맨션 ‘Tres 3’
불독맨션이 이한철(보컬, 기타), 서창석(기타), 이한주(베이스)의 3인조 체제로 재편하고 처음 내놓는 EP. 불독맨션은 작년 ‘리빌딩(Rebuilding)’으로 9년 만에 컴백한 바 있다. 불독맨션의 팬들에게는 이번 앨범 ‘뜨레스 쓰리(Tres3)’가 두 가지 의미일 것 같다. 드러머 조정범이 빠진 아쉬운 앨범이면서 동시에 불독맨션의 작년 컴백이 단발성이 아님을 알려주는 반가운 앨범이 아닐까. 세 사람이 걸어간다는 가사의 첫 곡 ‘뜨레스 쓰리’를 들으면 기존 불독맨션의 음악 스타일과 꽤 다른 풍이라 조금 낯설기도 한다. 이어지는 ‘그대가 있어 좋아요’는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로맨틱한 발라드를 연상케 하는 곡으로 이한철은 가성으로 노래한다.(라이브가 무척 궁금한 곡이기도 하다) ‘알듯말듯’은 복고풍의 디스코 넘버로 전작 ‘리빌딩’에서 이어지는 스타일의 곡. ‘불편한 사람’은 드라마틱한 전개가 인상적인 곡. 결과적으로 각기 다른 스타일의 네 곡이 담긴 EP가 됐다. 아마도 불독맨션의 과도기를 보여주는 결과물이 아닐까?

위버멘쉬 ‘불확실성’
‘위버멘쉬’는 철학자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설명한 일종의 ‘초인’을 뜻하는 개념이다. 유럽, 특히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록 밴드들이 이러한 철학적인 용어를 밴드 이름이나 노래 제목에 사용하곤 했다. 5인조(신동호, 박진석, 이주형, 최정원, 최항)로 이루어진 록밴드 위버멘쉬의 첫 EP ‘불확실성’은 유럽의 프로그레시브록 밴드들이 언뜻 스쳐갈 정도로 꽤나 심각한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음악을 들어보면 요새 인디 신에서 유행처럼 생겨나는 포스트 록 밴드들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위버멘쉬는 단지 스타일에 치우친다거나 하지 않고 심지가 꽤 단단한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두어 번 읽어봐야 이해가 될 것 같은 가사처럼 음악들은 곱씹어 들어봐야 그 의도를 알 수 있다. ‘불확실성’ ‘돼지왕’부터 ‘밤’ ‘클리세 러브 송(Cliche Love Song)’까지 곡들은 다소 어두운 인상을 주지만 멜로디가 확실한 것이 특기할만한 점. 올해 주목해야 할 신인 밴드가 나왔다.

휴키이쓰 ‘Why Can’t You Luv Me’
남성 싱어송라이터 휴키이쓰(Hugh Keice)의 새 EP. 휴키이쓰를 처음 본 것은 2012년 가을 ‘이달의 헬로루키’ 경연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영국에서 활동하다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휴키이쓰는 처음 보는 관객들 앞에서 통기타와 퍼커션의 편성으로 상당한 수준의 라이브를 펼쳐보였다. 다른 이들이 떨면서 경연을 할 때 혼자 공연을 하더라. 당시 휴키이쓰는 영국 런던의 인디 신에서 활동하며 현지에서 두 장의 EP를 발표한 상태였다. 이후 휴키이쓰는 역시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정규앨범과 싱글들을 발표하며 호평 받았다. 공연을 봤을 때에는 제이슨 므라즈가 떠올랐었는데, 막상 앨범을 들어보면 소화해내는 음악적 영역이 꽤 넓다. ‘위 아 아일랜즈(We are Islands)’는 이국적인 정취의 포크록, 앨범과 동명의 곡인 와이 캔트 유 러브 미(Why Can’t You Luv Me)는 마치 자미로콰이가 떠오를 정도로 그루브하다. 언뜻 들으면 팝 앨범처럼 느껴지는데 플로렌스 앤 더 머신, 에드 시런의 엔지니어로 활동한 브렛 쇼가 녹음 전반에 함께 했다고 한다.

허밍 어반 스테레오 ‘Reform’
허밍 어반 스테레오가 데뷔 10주년을 맞았다. 한국에 시부야케이, 라운지, 칠아웃 장르의 세련된 가요가 라디오 전파를 타기 시작한 것은 클래지콰이, 캐스커, 그리고 허밍 어반 스테레오가 거의 처음이었다. 이지린의 원맨밴드 허밍 어반 스테레오는 데뷔EP ‘숏 케이크(Short Cake)’를 입소문으로 1만 장 가까이 팔아치우며 이름을 알렸고, 이 앨범에 실린 ‘샐러드 기념일’ ‘바나나 쉐이크’는 현재까지도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10주년 앨범 ‘리폼’에는 허밍 어반 스테레오의 기존 히트곡들이 지나, NS윤지, 나르샤 등의 목소리로 다시 태어났다. 허밍 어반 스테레오와 같은 일렉트로닉 뮤지션에게 리믹스는 흔한 작업인데, 이번 앨범은 곡의 코드부터 구조, 악기 등까지 다 드러내 골격부터 다시 잡아갔다는 점에서 리믹스보다 리폼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다. 이런 종류의 앨범이 항상 부딪히는 딜레마라면, 대중에게 각인된 원곡의 매력을 뛰어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NS윤지가 노래한 ‘인썸니아(Insomnia)’는 색다른 매력을 전한다.

탁경주 ‘Jazz Guitar Classics’
재즈 기타리스트 탁경주의 두 번째 앨범으로 제목 그대로 재즈 기타의 클래식들을 가득 담고 있다. 탁경주는 재즈기타의 전통을 충실하게 파고드는 연주자다. ‘재즈 기타 클래식스(Jazz Guitar Classics)에서는 마치 기타 교본을 연상케 하는 앨범 제목처럼 재즈 기타의 대표적인 클래식들을 직접 연주하고 있다. 녹음은 탁경주와 고재규(베이스) 이창훈(드럼)의 트리오로 이루어졌으며 웨스 몽고메리의 ‘포 온 식스(Four On Six)’ 그랜트 그린의 ‘아이들 모멘츠(Idle Moments)’ 탈 팔로우의 ‘미티오(Meteor)’ 조 패스 ‘포 장고(For Django)’ 케니 버렐의 ‘리레스토(Lyresto)’ 등을 연주하고 있다. 재즈 기타리스트가 본인의 앨범에 자신이 좋아하는 연주자의 곡을 넣는 경우는 있지만 탁경주처럼 거장들의 곡을 중심으로 앨범을 구성하는 경우는 국내에서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탁경주는 단지 선배들의 곡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고전적인 톤과 프레이즈, 그리고 그 사이로 자신의 나름의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재즈기타가 가장 아름다웠던 40~60년대에 살고 있는 기타리스트처럼 말이다.

샘 스미스 ‘In The Lonely Hour’
영국의 남성 싱어송라이터 샘 스미스의 데뷔앨범. 샘 스미스는 앨범 발매 전부터 공연 활동으로 이미 실력을 인정받았다. BBC선정 “2014년 올해의 사운드”, 2014년 브릿 어워드에서 비평가상을 수상했으며, 앨범 발매 후에는 ‘가디언’ ‘빌보드’ ‘피치포크’ 등 다른 성향의 매체에서 일관된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샘 스미스는 2012년 디스클로저의 곡 ‘랫치(Latch)’에 보컬로 참여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기존의 피처링 곡이나 싱글에서는 R&B 풍의 보컬을 들려줬지만, 자신의 이름을 내건 데뷔앨범 ‘인 더 론니 아워(In The Lonely Hour)’는 단순히 하나의 장르로 묶이지 않는다. 고풍스러운 느낌부터 트렌디한 팝까지 아우르고 있는 이 앨범(‘Good Thing’ 단 한곡만 들어봐도 이 앨범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은 샘 스미스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샘 스미스는 남성 보컬의 음악을 거의 듣지 않고 여성 디바들의 노래를 따라부르며 노래 연습을 해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스미스의 노래에서는 마치 카스트라토와 같은 치명적인 매력이 느껴진다.

레드 제플린 ‘Ⅰ,Ⅱ,Ⅲ’
레드 제플린의 앨범들이 지미 페이지의 지휘 아래 리마스터링돼 전격 재발매된다. 1~3집의 리마스터 앨범이 3일 공개됐으며 남은 앨범들도 순차적으로 발매될 예정이다. 레드 제플린의 앨범이 리마스터링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경우 레드 제플린의 실질적 리더였던 지미 페이지의 손을 거쳤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사항. 음감회 현장에서 들어본 1~3집 리마스터 앨범들은 기존 음원에 비해 각각의 소리가 명징해졌다는 차이가 있다. 특히 어쿠스틱 기타와 같은 섬세한 소리들이 선명하게 들린다. CD와 LP 버전 외에 LP사이즈의 희귀 사진 등이 담긴 커버 72페이지 하드 커버 책자 등이 담긴 슈퍼 디럭스 박스 세트는 내용물이 훌륭해 마니아들의 표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리마스터 앨범은 미발표곡이 공개된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연주곡 ‘라 라(La La)’의 경우 네다섯 곡을 이어붙인 듯한 재밌는 구성을 지니고 있는데, 마치 레드 제플린의 버라이어티하고 찬란했던 시절을 집대성해 들려주는 듯하다.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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