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윤지가 대중에 친숙한 이유는 그가 벌써 데뷔 10년을 넘어섰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간과 친밀함이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니까. 어느 새 10년이나 쌓여버린 시간보다는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반전처럼 품고 있는 따듯하고 맑은 인상이 그를 친밀한 배우로 기억하게 해주었으리라.
도리어 10년의 세월 중, 그가 가진 친밀한 이미지가 장벽이 된 순간이 있었을 지 모른다. 실제 만난 이윤지는 작품에서 구현된 그대로 야무지고 똑 부러지는 이가 맞다. 하지만 구김살 없이 하얗게 웃는 것이 그녀가 가진 표정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우리가 발견해내지 못한 이윤지는 누구? 이제 서른을 넘어선 여배우 이윤지 역시 그 답을 찾기 위해 절실히 살아가고 있다. 배우로 주어진 배역 안에서 살아가는 순간과 순간의 틈 속에서 보내는 이윤지와 이윤지의 경계에 있는 것들을 분별해내기 위한 시간. 그 시간을 보내는 이윤지와의 대화록.
Q. ‘왕가네 식구들’이라는 엄청난 인기의 드라마를 끝냈으니, 대부분은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텐데요. 작년에는 연극 ‘클로저’ 무대에도 올랐었습니다. 게다가 두 작품을 같은 시기에 했었어요. 간극이 큰 캐릭터인 만큼, 균형 잡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이윤지 : 역할이 워낙 달랐어요. 하지만 스스로도 우려했던 혼란은 오히려 없었어요. 무대가 워낙 다르다보니 확실히 분간이 되더라고요. 그래도 앨리스였다가 광박이였다가, ‘이윤지’가 두 여자 사이를 오가는 것을 잊지 않게 하려고 긴장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은 했어요. 쉽게 아프거나 다치지 않으려고, 평소보다 더 체력관리를 열심히 했었죠.
Q. ‘클로저’에 앨리스, ‘왕가네’의 광박 사이를 오가는 이윤지라니, 어쩌면 결국은 ‘두 여자 사이에서 가장 지키고 싶었던 것은 이윤지 자신이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이윤지 : 맞아요. 앨리스가 마냥 발랄한 역할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심리적으로 엄청나게 힘든 캐릭터는 결코 아니었고요. 광박이는 속한 집단 자체가 워낙에 가족적이어서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캐릭터는 아니었지요. 다만, 제 자신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었어요. 실제로도 촬영하면서 연극무대에도 올라야 했던 날이 있었는데, 그때 속으로 ‘정신 바짝 차리자! 두 가지 전부 나한테 중요한 작품이고 원했던 작품이니까!’라고 마음을 다잡았죠. 스스로는 나 자신을 시험해볼 기회라고도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두 작품 모두 신기하게도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지난 6개월 동안 ‘클로저’ 채팅창과 ‘왕가네’ 채팅창이 제 핸드폰에서 아주 활발했었을 정도로.
Q. ‘클로저’와 ‘왕가네’ 두 팀 모두 화기애애했다, 그런데 그 두 팀의 공통점은 바로 이윤지 씨잖아요. 결국은 ‘윤지 씨가 분위기 메이커였다’ 이렇게 해석해도 되나요?(웃음)
이윤지 : 하하하하. 그보다는 두 팀 모두 음식을 좋아하는 팀이었기 때문인 듯해요. 늘 ‘내가 없는 오늘은 연습하면서 이들이 무슨 음식을 먹었을까’, 혹은 ‘누가 오늘 사다리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가 궁금했었거든요. ‘왕가네’는 특히 다들 ‘배우 맞아?’라고 할 정도로 젓가락을 놓지 않았었고요. ‘클로저’도 마찬가지였죠. ‘왕가네 식구들’ 제목에도 나오는데, 식구가 밥으로 엮인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번에 많은 식구를 얻은 셈이죠.
Q. ‘왕가네 식구들’은 처음부터 가족이라는 단어 보다는 식구를 강조했었는데, 방영 내내 막장 논란에 파격적인 엔딩에도 불구하고 다 함께 둘러앉은 식구라는 기조만큼은 굳건하게 가져간 듯 하네요. 그렇지만 엔딩에서 노인분장을 했을 때, 무슨 기분이 들던가요?
이윤지 : 막장 논란을 알고는 있었지만, 작가님은 내심 그런 표현을 하셨던 것 같아요. ‘지켜보면 된다’라고. 엔딩 장면은, 매우 매우 재미있었어요. 사극이 아니고서야 현대극에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드라마는 없잖아요. 게다가 가족 모두가 그런 분장을 하는 경우는 없었으니까요.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요(웃음). 그리고 방영 다음 주 ‘개콘’에도 패러디로 나왔다고 해서 ‘우리 엔딩이 이색적이었던 것은 사실이구나’ 싶었어요(웃음).
Q. 상당히 파격적이었죠. 그래도 요즘 드라마들 대다수가 엔딩에 가서 맥이 빠져버리는데, 그런 면에서는 ‘왕가네’가 확실히 한수 위였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이윤지 : 기대치가 높을수록 불만은 있을 수밖에 없긴 하지만, 비단 시청률 뿐 아니라 워낙에 사건사고가 많았던 드라마잖아요. 회차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건들이 계속 터지는데, ‘와, 남은 회차 동안 어떻게 끌고 가게 될까’ 궁금해지더라고요. 46회나 47회쯤 엔딩에 대한 그림이 그려질 법도 한데, 마치 이제 막 시작해 10회나 20회 정도 달려간 드라마처럼 진행되는 거예요. 그 폭발력을 마지막까지 끌고 간 것을 보면 정말로 작가님은 명불허전이다 싶었어요. 드라마에 자극적인 부분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결국 시청자들을 울리는 결과를 가져왔잖아요. 개인적으로는 결말을 함께 하면서 ‘아 역시 삶이란 이렇게 시끄러운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현실을 지나치게 솔직하게 보여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던 와중에 ‘함께 모여 시끄럽게 늙어가는 것이 삶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마무리 되었어요. 파격적인 엔딩이나 메시지가 없는 엔딩은 아니었고, 이벤트 같으면서도 허를 찌르는 엔딩 아니었을까요?
Q. ‘왕가네’의 광박이는 무엇보다 지금 이윤지 씨 또래가 할 법한 고민을 하는 역할이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깨닫는 면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클로저’의 앨리스 역시도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끔 하는 역할이잖아요. 뭐, ‘이제는 사랑, 연애, 결혼에 대해서는 간접경험으로 인해 자신있다’라는 생각도 들 법한데요.
이윤지 : 맞아요, 정말이지 그런 자신감이 생겼어요(웃음). 특히 ‘왕가네’라는 드라마는 인생 전체를 바꿔놓은 작품인데요. 제게는 하나의 작품이라는 말로는 성에 안 찰 정도에요. 배우로서 느낀 점도 많았지만, 30세를 지나는 여자로서 느끼는 부분이 참 많았죠. 미혼이다 보니 결혼이나 시월드를 미리 경험한 느낌도 들었고요.
Q. ‘이제 똑똑한 연애는 자신 있다!’ 이런 자신감도?
이윤지 : 이론만 해박해져서 괜찮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사람에 대한 이해심은 생긴 것 같아요. 진짜 이해란 상대에 대한 인정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우리가 대부분 남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내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다반사죠. 그런 내 식대로의 이해는 관계에 큰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나 혼자만의 이해와 내 방식대로의 사랑이 꼭 그 관계의 해피엔딩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죠. 이번에 배운 여러 가지 덕목들을 실전에서 활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단적으로 과거에는 타인의 행동을 보고 ‘왜 저럴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나만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엄청난 마이너스라는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을 보는 관점이 드라마를 통해 넓어지고 탄탄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Q. 그렇다면, ‘결혼은 이렇게 해야한다’라는 면에서 깨달은 점은 무엇인가요?
이윤지 : 결혼은 정말 신중하게 해야 해요. 단순히 둘만 좋아서는 안되는 일이죠. 시월드도 고려해야하는데요, 무조건 내 입장을 내세우기보다 어른들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이 작품이었어요. ‘딸 같은 며느리’, ‘아들 같은 사위’라고들 하는데,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광박이는 위로 시집 간 언니 둘이 있어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시집을 갔음에도 힘들어 했었죠. 하지만 그런 것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해요. 30년 동안 다른 집안에서 자라온 나를 어떻게 한 순간에 자식처럼 받아들일 수 있나요. 단순히 내 아들과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에요. 결혼해서 시어른을 모시게 된 상황은 내게도 처음이지만, 시어른들에게도 며느리를 받아들이는 일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런 현실적인 부분을 깨닫게 되었기에, 결혼을 좀 더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Q. 작품에 대한 애정이 상당한데, SNS에 쓴 글을 읽어보니 ‘인터뷰를 하면서 작품을 비로소 마무리하고 있다. 광박이와 나의 경계에서 양쪽을 살피는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요지의 글을 쓰셨어요. 광박이와 이별은 잘 하고 계신가요?
이윤지 : 굳이 이별하려고 하지 않고 있어요. 광박이가 마음이나 여러 면에서 아픈 캐릭터였다거나 아니면 감정이나 사건이 치닫는 극 전개 속에 살았던 캐릭터가 아니었잖아요. ‘왕가네’는 확실히 삶을 아우르는 드라마였기에 굳이 보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캐릭터 뿐 아니라 ‘왕가네 식구들’ 모두가 내 안에 있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작품의 마무리는 다른 작품이 끝났을 때와는 달랐어요.
Q. 나이 서른에 만난 작품이 바로 ‘클로저’와 ‘왕가네’였어요. 윤지 씨 스스로 이 작품이 중요한 작품이고 기회였다고 말씀하셨죠. 그 작품과 함께한 서른 살을 돌이켜 본다면요.
이윤지 : 요즘은 단순히 연기자가 아닌 나의 삶을 다시 한 번 재정비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침 서른 살에 ‘왕가네’와 ‘클로저’를 만났는데, 그 작품을 하면서는 ‘언제나 그렇듯 적기에 작품이 나타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리고 스물아홉 살에서 서른 살이 됐을 때의 기분은 참 좋았어요. 늘 서른이 되고 싶었고 막상 되고나니 마치 몇 만 군사를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20대 때는 늘 당당하고 싶어 최선을 다 했지만, 이 바람에 뺨맞고 하는 일이 많았었어요. 하지만 서른이 되고나니 스스로 당당해진 느낌(웃음).
Q. 끝으로 이런 질문을 꼭 해보고 싶었어요. 배우 이윤지도 있지만, 진짜 자신만이 알고 있는 가장 이윤지스러운 이윤지를 발견하는 순간이 언제일까라는.
이윤지 : 저의 경우는 운동할 때 그래요. 직업 때문에 시작한 운동이긴 하지만, 하다 보니 정말 좋더라고요. 평소에도 몸을 쓰는 것을 좋아해 사소하게라도 생활 자체가 운동화되어있어요. 잡념을 없애주는 시간이기도 하고요.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제공. 나무엑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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