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던 시절이 있었다. 비슷한 동양인일지라도 낯선 일본어나 중국어 발음이 들리면 시선을 빼앗기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지금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시선을 보낸다면 그런 사람이 더 ‘이종’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여행이나 유학이 아닌, 한국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외국인 중에서도 유독 ‘한국을 사랑한다’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을 만나게 되면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텐아시아는 한국인의 말버릇을 그대로 닮아있는 외국인 방송인 ‘셋’을 만났고, 설 명절을 맞아 맵시 좋은 한복도 입혀보았다. 한복 입은 품새가 꽤나 고풍스럽다. 통상 명절 때마다 한복을 입고 찾아오는 다른 한국인 배우들보다 어째 더 좋아하는 얼굴들이다.

“하이! 언니 ~” 반달눈이 되도록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우며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브로닌(30)은 처음 보는 기자를 스스럼없이 “언니”라고 부를 만큼 남다른 친화력의 소유자다. 학업을 위해 한국으로 건너온 후 2006년 성균관대 재학시절 KBS2 ‘미녀들의 수다’ 패널로 방송인으로 데뷔, 벌써 서울 생활 9년차에 접어든 그는 쉬는 날이면 ‘힐링’하고 싶어 전통시장을 찾고 친구들을 초대해 직접 만든 감자탕도 대접하곤 하는, 이제는 명실상부한 ‘한국 사람’이다. 20대 초반 한국에 와서 올해로 만 서른을 맞은 그가 보고 느낀 한국은 어떤 빛깔일까.

Q. 한국 생활이 벌써 9년차에 접어들었다.
브로닌: 처음엔 재미있기도 했지만 어려운 점이 많았다. 한국말도 못 하고 문화 차이 때문에 신기한 일도 많았지만 오해를 산 적도 있었고. 언어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문화를 익히게 된 것 같다. 이제는 가끔씩 다른 외국인들이 실수하는 걸 보면 “아이구, 왜 저럴까?’하는 생각도 든다. 입맛도 많이 바뀌었다. 처음에 왔을 땐 김치나 매운 음식을 먹기가 무척 힘들었는데 지금은 한식을 안 먹으면 몸에 힘이 없고 불편하다. 외국에 가면 한국 음식 먹고 싶어서 향수병이 생길 정도로.(웃음) 그래서 외국 촬영 갈 일이 생기면 라면이나 김치, 고추장, 된장을 싸들고 간다.

Q. 입맛도 그새 한식으로 바뀌었나?
브로닌: 집에서 밥하고 찌개 끓이고 반찬해 먹는 걸 좋아한다. 양식은 먹고 싶을 땐 먹지만 대부분은 한식을 먹는 편이다.


Q. 요즘 종합편성채널 JTBC ‘집밥의 여왕’에서 직접 요리솜씨도 선보였다.

브로닌: 친구들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는 프로그램인데 직접 만든 감자탕과 고등어 김치찜을 요리했다. 맛있게 먹어주니 뿌듯하더라.

Q. 한국 음식 요리도 꽤 수준급인가보다.
브로닌: 그렇진 않고 전통시장에 자주 가는 편인데 그곳에서 어머니들께 물어 물어 배운 요리가 많다. 시장에 가면 어머니들이 나를 무척 반겨주신다.(웃음)

Q. 아,전통시장을 자주 찾는다고 들었다.
브로닌: 난 전통시장 단골이다. 서울의 거의 모든 전통시장에 가 봤는데 주로 집에서 가까운 공덕 시장에 간다. 싱싱하고 싸고 서비스도 많이 주는, 한국의 전통적인 분위기가 있어서 외국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한다. 한국에 가족이 없으니 외로울 때 가면 어머니들이 많이 안아주셔서 좋다.

Q. 전통시장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나?
브로닌: 시장에 가는 건 나만의 힐링타임인 것 같다. 서울에서는 사람들이 급하고 바쁘게 일하는 편이라 때때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럴 때 전통시장에 가면 도시가 아닌 ‘슬로우 시티’같은 느낌을 받는다. 보통 마트에 가면 사무적이고 차가운 느낌도 있는데 전통시장에서는 열심히 새벽부터 일하면서도 미소로 사람들을 맞는 게 참 좋다. 외국인의 눈으로 보기엔 전통시장은 굉장히 매력 많고 따뜻한 한국 문화가 있는 곳이다. 일이나 학업을 위해 서울에 온 사람들이 바쁘다는 이유로 배달음식이나 패스트푸드를 많이 먹는데 전통시장에 가면 반찬도 살 수 있고 고추장 된장, 싱싱한 과일이나 채소를 모두 살 수 있다. 요즘엔 시장이 자꾸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운데 할 수 있는 한 전통시장 홍보를 많이 하고 싶다.

Q. 한국의 시장에서 산 물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브로닌: 몸뻬 바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보통 5000원~7000원정도인데 여러 가지 색깔의 몸뻬 바지를 사면 기분이 좋더라. 겨울에는 솜이 들어있는 걸 사기도 하고, 엿이 들어 있는 한국 전통과자도 굉장히 좋아한다.


Q. 한국 생활에 이제 거의 모든 면에서 적응한 것 같은데 외국인으로 한국에서 살아가기에 어려운 점은 없었나?

브로닌: 처음엔 서울 생활이 너무 빨리 돌아가는 것에 적응이 잘 안 됐다. 쉬는 시간 없이 24시간 문화라는 점에서 굉장히 피곤했다. 교통도 복잡하고 도시는 늘 시끄러우니까. 외국 사람들이 처음 서울에 오면 “와 신나고 재밌다”는 느낌을 가지지만 조금 지나면 “이렇게 매일 바쁘게 돌아가면 힘들지 않을까?”란 생각을 한다. 주말에도 사람들이 푹 쉬지 않고 여유가 없는 면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남아공에 가면 재미가 없더라.(웃음)

Q. 올해 한국에서 만 서른을 맞았다. 남다른 소회가 있나?
브로닌: 시간이 굉장히 빨리 흐른 것 같다. 눈 깜짝할 사이에 8년이 지났다. 처음에 왔을 땐 어려서였는지 모든게 신기하고 재밌었는데 이제는 좀더 계획성 있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몇년 동안 방송일을 굉장히 열심히 했고 쉴 틈 없이 달리는 스타일이었는데, 이제는 생활에서 조금 더 균형감을 찾고 싶다는 마음이다. 그동안은 한국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많이 노력했는데 이제는 내 시간을 좀더 많이 만들고 싶다. 그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인 것 같다.

Q. 이제는 좀 여유가 생겼나보다.
브로닌: 예전에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잘 먹지도 않고 그랬는데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은 친구들이랑 시간도 보내면서 인생법을 배워가는 것 같다. 혼자 있을 땐 강아지랑 산책하고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요리해서 맛있게 먹고 그렇게 산다.

Q. 앞으로도 한국에서 살기로 마음 먹었나?
브로닌: 처음에는 학위를 마친 후 친오빠가 사는 영국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있다 보니 계속 한국에 머물고 싶어졌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우연히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방송 일이 계속 이어졌고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여기서 열심히 내 자리를 만들어왔다. 물론 한국 방송계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사람들이 방송만 보고는 “와 재밌겠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외국인이라 가끔씩 어려운 일도 많았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일이 계속 들어왔고, 앞으로는 한국에서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고 싶다.


Q. 아 그럼 귀화를 준비중인가?

브로닌: 맞다. 요즘 이화여대에서 귀화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일주일에 세 번 4시간씩 한국어, 한국 역사와 문화 등에 대해 배운다. 대기자가 많은 편이라 시험은 1년 후쯤 볼 예정인데 진짜 한국인이 되면 이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좋은 역할을 하고 싶다. 지금 공정무역이나 동물보호, 다문화 박물관 등의 홍보대사를 하고 있는데 귀화하면 이 외에도 또다른 의미 있는 활동들을더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Q. 그럼 한국에서 결혼도 생각 중인가?
브로닌: 아직 결혼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 빨리 안 해도 될 것 같고.(웃음) 몇년 전 사귀던 한국 남자와 헤어진 후 맘이 많이 아팠는데 그 후에 새로운 생각이 생겼다. 빨리 결혼하지 않아도, 열심히 일하고 놀면서 지금의 삶을 즐겨보자는. 결혼은 서른 다섯 전에 하면 될 것 같다.

Q. 새해를 맞아 소원이 있다면.
브로닌: 음.. 언젠가는 내 이름으로 된 토크쇼를 해 보고 싶다. 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은 편이다. 모두들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니까. 아직 한국말을 완벽하게 못 하니 영어와 병행해서 해도 좋을 것 같다.

Q. 한국에서 삶을 계속 영위해나갈 자신이 있나?
브로닌: 집값과 물가가 비싼 게 좀 힘들긴 하다.(웃음) 그래도 열심히 일하면 지금처럼 행복하게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글. 장서윤 ciel@tenasia.co.kr
사진. 팽현준 pangpang@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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