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같이 돈에 영혼 판 남자, 재미없어.” 재벌가 여자로 불륜을 저질러 한 가정을 풍비박산 냈지만, 이상하게 밉지가 않다. 최근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주말극 독주체제를 이어가고 있는 KBS2 주말드라마 ‘왕가네 식구들’의 은미란, 김윤경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덧 데뷔 15년 차를 맞은 김윤경은 진형남 PD와의 인연으로 ‘왕가네 식구들’에 출연을 결정하게 되고, 돈으로 유부남을 유혹하는 여자를 맡아 연기 변신을 시도한다. 결과는 대성공. 가정사의 슬픔과 재벌가의 딸로서 겪었을 아픔마저 연기에 녹여낸 그녀는 팜므파탈 역을 맡았음에도 밉지 않은 은밀한 매력으로 ‘김윤경’이라는 이름 석 자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Q. ‘왕가네 식구들’의 인기가 뜨겁다. 왕호박(이태란) 가정을 파탄 내는 인물로서 욕도 많이 먹겠다.
김윤경: 여자들은 ‘어떻게 저럴 수 있나?’고 하는데, 남자들은 부럽다고 한다(웃음). 개인적으로는 처음 맡아보는 악역인데 워낙 역할이 임팩트가 있고 세다 보니 나와는 다른 인생을 사는 것 같아 연기하는 재미가 있다.

Q. 은미란이 보통의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참고할 만한 모델이 없어서 캐릭터 잡는 게 쉽지 않았을 듯한데.
김윤경: ‘돈 많은 여자가 남자를 데리고 놀 때는 어떻게 할까?’라는 고민을 달고 살았다. 진형남 PD와 캐릭터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말투나 톤을 연구했다. 진형남 PD는 한 가지만 주문했다, “톤의 높낮이가 적게 말하되 간결하게 하라”고. 돈도 많지만, 많이 배워서 도도하고 세련된 느낌이 나도록 연기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실제로 은미란 캐릭터에 어울릴법한 말투를 쓰는 사람이 있으면 양해를 구하고 대화를 녹음해 말투를 익혔다.



Q. 독특한 캐릭터만큼이나 화려한 패션도 은미란을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김윤경: 워낙 시청률이 높은 시간대이다 보니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가 없겠더라. 액세서리, 의상 등 모든 소품을 직접 준비했다. 필요하면 홍콩에 가서 공수해오기도 하고 외국 보세 브랜드를 써서 최대한 비싸 보이게 꾸몄다. 방송 후에 옷이 완판되고 ‘30대 재벌 상속녀 패션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웃음).

Q. 원래 은미란은 10회 정도만 출연하는 비중이 작은 캐릭터였다고 들었다. 은미란이 계속해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웃음).
김윤경: 처음에 진형욱 PD가 내게 은미란 역을 제안하며 했던 말이 “원래 신인 여배우를 쓸 생각이었다”는 거였다. 그만큼 비중이 작고, 치고 빠지는 역할이었기에 처음부터 녹화 분량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근데 허세달(오만석)과 호흡이 잘 맞다 보니 어느덧 30회를 넘기게 됐다. 곁에서 보니 정말 코믹하고 뻔뻔한 연기는 오만석이 최고더라.

Q. 15년 이상 연기를 하면서 은미란과 같은 악역은 맡아본 적이 없었다. 은미란 역을 맡으면서 연기변신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
김윤경: 비련의 여주인공만 할 수는 없지 않나(웃음).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의 문영남 작가의 반응이 기억에 남는다. 나이를 물어서 “서른다섯”이라고 대답했고, “결혼했느냐”고 물어서 “결혼했고 아이도 있다”고 답하니까 깜짝 놀라더라. 그러면서 문영남 작가는 “그럼 인생 좀 알겠다”며 “20대는 예쁘게 나오지만, 남자를 노련하게 데리고 노는 은미란 역은 남자랑 살아본 사람만이 맡을 수 있다. 함께해 보자”고 했다. 그게 은미란 역을 맡게 된 배경이다.



Q. 확실히 은미란은 허세달을 데리고 놀고 돌봐준다는 면에서 엄마 같은 느낌이 강하다. 결혼과 출산의 경험이 연기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었는가.
김윤경: 어떤 캐릭터이든 연기는 배역보다 5년 정도 더 살아본 사람이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 반대다. 감정이라는 건 아무리 배워도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결혼과 출산은 설령 이혼했다고 해도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경험이다. 상대방을 대할 때 교감의 밀도도 다르다. 예전에 작품을 통해 오만석을 만났을 때는 선배라서 무척 어려워했었는데, 이제는 ‘남자는 다 똑같지 뭐’하는 생각이 들더라(웃음).

Q. 1998년 알이에프(R.ef)의 ‘네버엔딩 스토리’ 뮤직비디오 출연으로 인기를 얻은 뒤 15년간 연기인생에 굴곡이 있었다.
김윤경: 신인 때는 너무 한 번에 떴다. 그래서 이후 슬럼프를 겪을 때 더 힘들었던 거고. 지난 2001년에는 일본 아사히TV에서 ‘결혼의 조건’의 주연으로 캐스팅되면서 일본 활동도 했었다. 하지만 일본 활동 후 활동을 쉬니까 대중에게 금방 잊히더라. 그때 인기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 깨달았다.

Q.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했나.
김윤경: 2006년 KBS1 아침드라마 ‘TV소설-강이 되어 만나리’를 찍으며 반효정 김미숙 선생님을 만나 큰 힘을 얻었다. 연기자 인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때 지금의 남편과 연애 중이었는데, 남편이 힘들어하는 날 보며 이렇게 이야기하더라. “스타가 될 게 아니고 연기자가 되고 싶다면 욕심을 내려놓으라.” 그 말에 그동안 내가 헛된 꿈을 품으며 자신을 스스로를 괴롭혀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맘때쯤 배운 술도 인생을 좀 더 행복하게 사는데 도움이 됐다(웃음).



Q. 남편과 선배를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는 이야기는 수긍이 가도, 술이 인생에 도움이 됐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웃음).
김윤경:
원래 술을 하나도 못했다. 근데 남편이 어느 날 “연기한다는 사람이 쓴 소주 한 잔 못 마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더라. 그 말에 충격을 받아 술을 배웠다. 그리고 ‘소주 석 잔’의 행복을 깨달았다. 그전에는 항상 일이 잘 안 풀리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에 까칠했고 실패를 두려워했는데, 술을 배운 이후 성격이 변했다. 대화가 늘고 상대방을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니까 그게 연기에도 적용되더라.

Q. ‘왕가네 식구들’을 통해 배우로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앞으로 어떤 연기자,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김윤경: 가리지 않고 다 하고 싶다(웃음). 작은 역이라도 내가 나만의 연기를 할 수 있는 작품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출연하고 싶다. ‘왕가네 식구들’에 출연하며 다시 신인 때의 마음으로 돌아간 느낌을 받는다. 개인적으로는 소소한 행복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매주 아이들을 도와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를 도우며 내 삶의 책임감도 느끼게 되고, 나 자신도 더 행복해졌다. 이런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배우로, 사람으로 남고 싶다.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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