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멀티캐스팅 영화가 꽃피는 시절이다. 배우들은 말한다. 멀티캐스팅 영화는 서로 의지할 수 있어서 좋다고. (흥행)부담이 적어서 좋다고.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리다. 왜? 멀티캐스팅 영화에는 엄연히 상대평가라는 날카로운 시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대 배우와의 비교를 통해 나의 장점이 더 부각되기도 하고, 단점이 더 두드러지기도 하는 그런 평가. 전자라면야 둘도 없는 축복이다. ‘도둑들’로 전지현이 지난 10년간의 부진을 한 번에 청산한 것처럼. ‘어벤져스’를 통해 쫄쫄이 바지를 입은 헐크가 재조명 된 것처럼. 하지만 후자라면? 자존심에 상처 입고 자학과 질투에 사로잡혀 땅을 치며 후회 할지도 모를 일이다.이정재는 어떻게 ‘관상’의 최고 수혜자가 됐나
‘하녀’, ‘도둑들’, ‘신세계’, ‘관상’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
제작과정에서부터 초호화 캐스팅으로 주목받은 ‘관상’은 이러한 상대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영화다. 예정된/의외의 수혜자와 반대의 경우에 놓인 배우가 이 영화에도 존재한다. ‘관상’ 최고의 수혜자는 누가 봐도 수양대군을 연기한 이정재다. ‘하녀’를 통해 운신의 폭을 넓히고, ‘도둑들’로 연기를 즐기고, ‘신세계’로 무게를 더하더니, ‘관상’에 이르러 배우로서의 농밀함과 카리스마가 완벽하게 짙어졌다는 평이다. 실제로 ‘관상’에서 그의 첫 등장 씬은 CD로 따로 구워서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멋들어진다. 영화의 분위기와 흐름을 일순간에 바꿔버릴 만큼 강렬하고 인상적이다.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이정재가 욕심을 버리고 다양한 캐릭터들을 받아들인 덕분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그는 오래전부터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우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필모그래피를 채우고 있는 ‘젊은 남자’, ‘박대박’ ‘정사’ ‘순애보’ ‘이재수의 난’ ‘1724 기방난동사건’ 등의 종잡을 수 없는 장르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로 데일 듯 뜨거운 인기를 얻은 후 그는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보디가드 백재희(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고, 실패도 있었지만 캐릭터 바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이정재의 영화적 취향이 달라졌다가 아니라, 왜 새삼스럽게 최근에야 그의 연기가 색다르게 다가오는가가 아닐까 싶다. 생각해보면 이전의 이정재는 다양한 캐릭터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젊은 남자’ 같아 보였다. 그러니까 배역을 아무리 갈아입어도 변하지 않는 어떠한 ‘고정된 연기 톤’이 있었다. 그것이 변화의 시기를 놓치고 그대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식상하게 다가온 면이 없지 않다. 실제로 드라마 ‘트리플’(2009년)에서 배다른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는 이정재와 ‘느낌’(1994년)에서 역시 근친간 사랑이라는 미묘한 사랑을 연기하는 이정재 사이의 간극은 그리 크지 않았다. 관객들은 모두 변했는데 그는 머물러 있는 듯 보였다.
그랬던 이정재가 최근 다르게 보이는 것은 캐릭터 덕분이라기보다는 스스로가 자신의 이미지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조율하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해 보인다. 배우의 이미지라는 건 단순히 얼굴 생김새나 몸매나 나이에 의해 규정되는 게 아니다. 이미지는 그 사람이 지닌 전체적인 뉘앙스의 총합에서 나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보다 유연해진 그의 연기에 대한 태도가 보는 이로 하여금 이정재를 달리 보이게 만드는 강력한 요인이 됐다고 본다. 자신이 지닌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거나 끌어안으려 하기보다는, 핵심을 간파하고 즐길 줄 아는 모습에서 비로소 대중의 신뢰를 이끌어낸 것이다. “잘 관리한 40대 남자가 제일 멋있어 보인다”고 말한 이정재의 바람대로 그는 멋있게 40대를 통과하는 중이다.
‘스타 이종석’과 ‘배우 이종석’ 사이에서
‘알투비:리턴투베이스’, ‘학교 2013’, ‘너의 목소리가 들려’, ‘관상’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
그렇다면 ‘관상’에서 상대적으로 빛을 보지 못한 배우가 누가 있을까. 당장 이종석을 떠올릴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상투를 틀어 올린 그를 가리켜 ‘머리빨이었다!’는 다소 인신 공격성 댓글부터 ‘너의 목소리가 들려’(이하 ‘너목들’)로 쌓아놓은 인기를 ‘관상’으로 까먹었다는 탄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걸 보면 어렵지 않게 유추 가능한데, 이러한 불만의 중심에는 그의 어색한 연기가 자리 잡고 있다.이종석이 맡은 진형이라는 인물은 이정재가 연기한 수양대군처럼 출연 분량이 많지 않다. 하지만 울림은 커야 한다. 신체적 결함을 지니고 있는 사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사내. 게다가 결정적인 사건도 진형에게서부터 시작되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인물을 담아내기엔 이종석은 연기는 뭔가 납작하다. 그것이 연출의 문제든, 시나리오의 문제든, 배우 개인의 문제든 보는 내내 ‘지금 연기를 하고 있구나’가 엿보여 불편하다. 큰 스크린 안에서 그의 얼굴은 조금 비어 보이는 듯한 느낌도 드는데 얼굴 근육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는 것 같다. 발음이 나쁘지 않아서 대사 전달은 명확하지만, 감정 전달은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아닐 때보다 많다. 이러한 단점은 송강호, 백윤식, 이정재, 김혜수 같은 쟁쟁한 연기파 배우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더욱 대비된다. ‘관상’의 흥행은 애석하게도 이종석이라는 상품성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인상이다.
하지만 ‘관상’이 ‘스타 이종석’이 아닌, ‘배우 이종석’에게는 어떤 의미인가를 살핀다면 재고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학교 2013’과 ‘너목들’로 인기를 끈 이종석에게 이 영화의 선택이 실수였다는 논리가 정당화 되려면, 두 작품에서 보여준 이종석의 연기가 ‘관상’에서 보여준 연기보다 나빴어야 했다. 촬영 순서는 ‘관상’이 ‘학교 2013’과 ‘너목들’보다 먼저였으니까. 하지만 그의 연기는 ‘관상’에서 ‘학교 2013’로 넘어가는 시기에 비약적으로 성숙해져 있다. 그렇다면 이런 가설이 가능해진다. ‘관상’을 찍으면서 배우고 느낀 연기에 대한 인상이 ‘학교 2013’와 ‘너목들’에 긍정적으로 반영됐다고 말이다. 실제로 이종석은 “스스로 느끼기에 제가 연기자로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칼을 갈고 연기한 게 ‘학교 2013’이에요”라고 많은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짐작건대 ‘관상’ 현장에서 선배들과 부대끼며 느낀 부러움과 깨달음과 질투가 이종석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늘이 내려 준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연기파 배우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배우들에겐 분명 연기가 어색했던 시절이 있다. 지금은 칸의 여왕이라 불리는 전도연이라고 달랐을까. 연기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한 번은 바닥까지 밑천을 드러내고 뛰어오르는 게 필요한지도 모른다. 당장은 혹독하지만, 멀리 보면 그만한 약도 없다. 연기 욕심이 강한 이종석은 아직 틴에이저 느낌이 강한데, 그것에도 크게 연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제는 연기력에서 어느 정도 무게를 잡은 강동원이나 조인성도 처음에는 스타이미지가 훨씬 강했던 배우들이다. 신중하게 작품을 선택하고, 단점은 보완해 간다면 배우의 이미지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그걸 이종석 스스로가 터득했다면, ‘관상’은 그에게도 더 없이 좋은 프로젝트다. 못하는 것과 모르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이종석에 대한 진짜 평가는 지금부터가 시작이 아닐까 싶다.
글,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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