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신지도를 그린 사람들] 정윤정PD, 일하고 사랑하고 즐겨라
[예능 신지도를 그린 사람들] 정윤정PD, 일하고 사랑하고 즐겨라
1990년대에 입사해 그야말로 황무지를 개척해야했던 선배 여성PD들에 이어 이번에는 그들이 개척해놓은 황무지에서 견고한 성을 쌓아 지금 현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 중인 후배 세대의 여성PD를 만났다.

김용준 황정음 커플과 아직도 MBC <우리 결혼했어요>(이하 우결)의 레전드로 기억되는 조권과 가인, 아담 커플 그리고 빅토리아 닉쿤 커플 로 지난 2010년 <우결>의 새 전성기를 가져왔던 정윤정 PD가 바로 그 주인공. 정윤정 PD는 출연진은 물론, 프로그램과 직o간접적으로 연관된 모든 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누구보다 탁월하며 스토리텔링에 있어 자연스러운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능력이 탁월한 PD로 꼽히는 이다. 바로 이 소통 능력은 오늘날 예능계를 쥐락펴락하게 된 여성PD들의 강점으로 꼽힌 요소이기도 하다. <우결>로 입봉하자마자 대박을 터뜨리고 이후 영국 연수를 다녀온 뒤, 현재는 <블라인드 테스트 180도>를 연출 중인 정윤정 PD는 요즘 핫한 예능프로그램 ‘진짜 사나이’로 <일밤> 부활을 이끌어낸 주역 김민종 PD와 지난 2월 결혼, 알콩달콩한 신혼생활 중인 새댁이기도 하다.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그녀에게 앞선 선배 PD들과 마찬가지로 ‘여자’라는 키워드로 질문을 던졌다.

정윤정 PD가 MBC에 입사한 2002년은 선 최영인(1990년), 서수민(1995년), 임정아(1996년) PD가 입사한 지 많게는 12년, 적게는 7년이 지난 해로 선배들 덕에 더 이상 여자라는 이유로 희귀한 존재는 아닐 수 있었지만 여전히 “여자가 잘 할 수 있겠어?”라는 궁금증을 가장한 편견에 대항해 자신을 증명해내야 하는 시기를 거쳐야 했다. 먼저 길을 닦아준 선배들 덕분에 운이 좋은 출발선에 설 수 있었음에도 여전히 여자라는 이름으로 고민해야할 것들은 많았다. 그녀의 머릿속 생각들은 곧 오늘날 30대 워킹우먼들의 고민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치열한 고민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앞으로 그녀가 내리는 결정들은 그 뒤를 쫓는 후배들을 위한 빛나는 본보기가 되리라.

Q. 2002년 입사 당시 동기 중에도 여자PD가 있었고, 여자 선배들도 이미 히트작을 낸 후 인터라 선배들과 상황은 달랐을 것 같다.
정윤정 : 그렇다. MBC의 경우에는 임정아 선배 다음에 이미 선혜윤 선배(2000년 입사)가 있었고, 그 이후에도 기수당 한 명씩은 꾸준히 들어오다 희한하게 우리 때(2002년)부터 타 방송사에서도 여자PD의 수가 늘었다. 그리고 요즘은 1명 뽑을 때 여자만 뽑은 적도 있고. 또 입봉하고 나서는 선배들의 덕을 많이 본 것이 사실이다. 특히 임정아 선배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선배가 매니저를 대하는 방식, 출연자들과 관계를 맺는 모습들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중요한 포인트인데 참 다행이었다.

Q. MBC가 당시만 해도 굉장히 유연하면서 개방적인 분위기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여자라는 이유로 편견의 대상이 된 경험은 없었을까.
정윤정 : 선배들과 비교한다면 확연히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도 면접 볼 때 실질적으로 채용권한이 있던 면접관으로부터 ‘여자인데 밤새는 일을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Q. 당연히 밤 잘 샌다고 말했겠지.
정윤정 : 순간적으로 ‘밤 잘 샐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여자가 남자에 비해 체력이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신 여자가 더 잘하는 것,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지 않냐고 대답했었다. 무사히 잘 넘겼다.

Q. 2000년대 초반 정도에 소위 말하는 언론고시 준비를 했을 텐데, ‘여자가 왠 PD?’라는 편견은 당시엔 적었을 것 같긴 하다. 어떤 과정으로 예능PD를 꿈꾸게 됐는지 궁금하다.
정윤정 : 나의 경우는 당시 <남자셋 여자셋> 등 시트콤을 보면서 막연하게 저런 것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예능PD를 꿈꾸게 되긴 했는데, 주변에 PD하겠다는 친구들이나 방송국 입사를 준비하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예능PD가 되고 싶다’라고 말하는 이들은 보지 못했다.
[예능 신지도를 그린 사람들] 정윤정PD, 일하고 사랑하고 즐겨라
[예능 신지도를 그린 사람들] 정윤정PD, 일하고 사랑하고 즐겨라
Q. 상황이 선배들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여자PD들이 가장 곤혹스러웠던 순간은 야외촬영이라고들 하더라.
정윤정 : 그렇다. 당시만 해도 야외에는 스태프들이 옛날 분들이 많았으니까. 첫 야외연출을 나갔을 때가 4년 차였나 그랬을 텐데도 불구하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야외는 50여명을 통솔하며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것도 하나의 조직이니까. 그런데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던 것이 사실이고, 특히 나이 드신 남자 스태프들이 날 불편해하는 것이 느껴져 당황하기도 했다. 사실 그전에는 방송국에서 내가 PD였지, 여자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는데 바로 그 순간이 여자라는 것에 대해 자각하게 된 포인트가 됐다.

Q. 그래도 위기가 기회라고… 뭔가 반전 스토리가 있을 것 같다.
정윤정 : 맞다. 거기서 잘 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했다. 특히 내가 나간 첫 야외촬영은 시트콤이었는데 다른 예능 프로그램들과는 다르게 시트콤이나 드라마는 쓰는 용어들이 정해져있고 그걸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현장에서 알려주지 않으니 내가 스스로 알아가야 했는데, 먼저 다가가 말을 붙이고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물어보았다. 당시 나는 어차피 어리고 어차피 잘 모르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렇게 시작하니 상황은 나아졌다. 처음에 나를 받아들일 때 시간이 걸리고 경계하는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 결국은 시간의 문제였던 것이다.

Q. 반면 여자라서 더 유리하다고 느꼈던 점도 혹시 있을까?
정윤정 : 여자라서 더 유리한 지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팀을 꾸려나가다 보면 간혹 내가 이 팀의 엄마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팀에는 작가들도 있고, 출연자들, 조연출, 스태프들도 있다. 그들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로는 다독거려주고 대신 따져주고 조율하는 일을 모두 PD가 해야 한다. 그런 걸 하다보면 정말이지 내가 엄마, 혹은 왕언니가 된 느낌이 든다.

또 연출에 있어서는 남자처럼, 혹은 남성적인 성향의 것을 남자보다 더 잘 할 자신은 사실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여성적인 성격이 다분한 편은 또 아니다.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류도 아니었고, 성격도 무딘 편이었으니까. 따라서 내가 가진 성격 중 방송일에 적합한 부분을 살려내려고 했달까. 사실 그게 더 중요하다. 스토리를 풀어 나가야 하는데 여성 시청자들만 고려할 수는 없지 않나. 결국은 양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여자들이 싫어한다는 군대 이야기를 담은 <진짜 사나이>만 하더라도 담당 피디는 남자지만 여자 시청자들이 궁금해 하는 포인트를 해소해준 측면이 있다. 나 같은 경우 집에 남자형제 없어서 옷을 보내온 소포를 받는다든지, 군대에 들어가 뭘 하는지에 대한 것은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였다. 그런데 마침 새로운 그림을 원하는 요즘의 시청자들, 특히 여자 시청자들에게는 신선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Q. 먼저 <진짜 사나이> 이야기를 해주니 이제는 결혼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웃음). 결혼은 추천할 만한 것인가?
정윤정 : 그것에 관한 답은 사석에서 이미 했으니까(웃음). 어쨌든 결혼이 주는 안정감은 확실히 있다. 그리고 같은 직종의 일을 하고 있으니 이 이상한 루틴의 생활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기도 하고. 그러나 나는 아직 임신과 출산이라는 더 중요한 과제를 앞두고 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급변하는 예능계를 잠시 떠나있어야 한다는 점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런던에서 6개월을 보내고 MBC가 파업에 돌입하면서 1년 가까이 떠나있었는데 안 바뀐 것 같지만 그 사이 엄청나게 많은 것이 변해있더라. 그런데 임신과 출산을 한다면 1년 넘는 시간을 떠나있어야 하지 않나.

Q. 역시 결혼은 현실적인 문제들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후배들에게 연애는 권한다고.
정윤정 :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는 것은 어떻게든 도움이 되니까. 내게 득이 되든 실이 되든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 그리고 관계를 맺는 법을 아는 것은 방송일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어떤 이를 잡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이 결국은 연애이지 않나. 특히나 리얼리티를 하다보면 출연자와 내가 연애를 한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다. 저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간파해야하고 달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도 또 연애이니까. 그래서 “연애는 강추합니다!”

Q. 동료PD들이 칭찬하는 스토리텔링 능력도 다 연애의 힘이었던 건가?(웃음) 그러고보면 스토리텔링이나 커뮤니케이션은 여자PD들의 강점으로 꼽히는 것이기도 하다.
정윤정 : 스토리텔링을 잘 구현한다는 것은 결국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우결>의 경우, 특히나 감정이입이 중요했다. 또 액션에 대한 리액션을 잘 푸는 것도 스토리텔링에서는 꽤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관찰이 중요하고 평소 주변에 대한 관심이 많아야 한다. 상대의 어떤 표정과 움직임들을 읽어내야 하니까. 그런 것에 있어 여자가 강하다고 하면 강할 순 있겠지. 아무래도 여자들이 주변에 관심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나 분명 남자PD들 중에도 이런 부분에 강한 이들이 있다.

Q. 끝으로 후배들을 위한 코멘트를 부탁드린다. 또 <우결>,<놀러와>,<블라인드>까지 연출을 해온 프로그램들이 다양한데, 앞으로 꼭 도전해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없는지 궁금하다.
정윤정 : 후배들에게는 무엇보다 즐기면서 재미있게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실 이건 임정아 선배의 이야기이다. 힘들 때 가장 도움이 많이 되는 말이었다. 이 직업만큼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직업이 또 어디 있겠나. 때로는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히지만 결국 즐기면서 이겨내면 된다. 하고 싶은 것은 늘 바뀐다. 일단은 맡고 있는 프로그램에 최선을 다하고 싶고 변화하는 것에 맞춰 고민하면서 나 역시 성장하고 싶다. 그것이 또 이 직업의 매력이자 장점이기도 하고.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 채기원 ten@tenasia.co.kr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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