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10] 마리서사의 슬픔은 당신의 달콤함보다 아름답다(part2)
[인디10] 마리서사의 슬픔은 당신의 달콤함보다 아름답다(part2)
(part1에서 계속) 이제 마리서사가 결성하기 전까지 멤버들의 음악여정을 살펴보자. 리더 박건준은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 박성준은 웨이크보드 국가대표로 아시아 대회에서도 우상한 운동선수다. 집안 경제가 나빠지기 시작했던 중학교 1학년 때 독학으로 코드를 익혀 어머니의 통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록음악을 좋아했던 학교 친구가 준 카세트테이프로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를 시작으로 대중성 있는 해외 밴드음악과 김바다, K2 김성면 같은 국내가수들의 음반을 많이 들었다. 변성기가 오지 않았던 그는 친구들 사이에 노래를 잘하는 아이로 통했다. 중2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부모님이 떨어져 있는 슬픈 느낌의 노래 가사를 쓰고 싶어 창작을 시작했다. 고음을 올리고 싶은 마음에 비디오를 빌려 본 조비, 스키드 로우 공연 영상을 보고 월간 핫뮤직을 정기 구독하며 음악내공을 키워나갔다.

포천고로 진학한 그는 학교 선배와 함께 ‘PROGRESSIVE ELECTRONIC DYNAMIC TEAM’의 이니셜을 딴 4인조 밴드 페디트(PEDT)를 결성했다. 록 음악을 좋아했던 선생님의 도움으로 학교 체육관과 주말에는 동네 노래방을 빌려서 합주를 했다. 노래방 앰프를 빌려 아무도 봐주는 사람이 없는 ‘반월공원’에서 버스킹을 시작했다. 고3이 되어 의정부로 원정 버스킹을 갔다가 현장에서 우연하게 ‘청산기획’ 관계자의 눈에 들어 스카우트 되었다. 당시 댄스가수 유승준이 절정의 인기몰이를 했던 시기. 밴드음악을 하고 싶었던 그는 기획사에서 댄스가수를 권유하자 숨도 쉬지 않고 그만두었다.

삭발을 단행하고 학교추천으로 의정부체육관에서 열린 경기도 청소년가요제에 스쿨밴드 ‘페디드’ 멤버로 출전했다. 자작곡 ‘방 한 구석’이란 노래로 최우수상을 받았던 그는 포천고의 전설이 되었다. 지금도 밴드부 연습실에는 ‘마리서사 활동 중인 박건준 선배님’이란 문구가 적혀있을 정도. 2000년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동네 형 집에서 가져 온 싸구려 합판기타 텔레케스터 하나를 달랑 들고 무작정 상경을 했다. 갈 때가 없었던 그는 합주 실이 있는 5인조 메가데스 록 밴드 <샤인>에 들어가 거칠고 터프한 음악을 했다. 나이차가 9살 이상 났던 멤버들은 그의 창작곡을 무시해 밴드를 나왔다.

JOLLY 밴드 시절 박건준(위), 마리서사 공연(아래)
JOLLY 밴드 시절 박건준(위), 마리서사 공연(아래)
JOLLY 밴드 시절 박건준(위), 마리서사 공연(아래)

5개월 정도 명동 커피숍 알바를 했던 그는 서울산업대에 다녔던 고향친구의 학교 동아리 밴드에 들어가 연습을 하면서 3인조 밴드 졸리(jolly)를 결성해 2001년 홍대 플레이 하우스 록 클럽에서 공연을 이어갔다. 당시 함께 클럽무대에 선 밴드는 꽃미남 록밴드 미라클 SG. 이들은 2002년 발표된 컴필레이션 앨범 ‘Play House Family’에 함께 참여했고 밴드 졸리는 정규앨범까지 발표했다. 2003년 밴드 멤버들이 모두 군대에 가버려 팀이 깨져버렸다. 박건준도 군대에 가려했는데 우연히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 라디오방송에서 자신이 부른 ‘혼자가 싫어’가 인디차트 7위곡으로 소개되며 흘러나왔다. 몇 주가 지나 1위까지 등극하니 음악을 더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갑자기 신해철로부터 “콘서트를 하는데 오프닝 무대에 서 달라.”는 전화가 왔다.

팀이 해체된 상태였기에 새로운 멤버를 찾아야 했다. 밴드 라즈의 기타리스트 임민서는 클럽 ‘플레이 하우스’에서 만나 친하게 지냈던 동생이다. 임민서는 “군대에 가려고 했는데 건준 형이 베이스 치라고 해 인생 망쳤습니다.”라고 웃는다. 데뷔 때 이름은 ‘임진호’였기에 개명 이유를 묻자 “2010년 어머니가 이름 때문에 팔자가 나쁘다며 유명한 철학관에 40만원이나 주고 지혁, 환희. 준서 등 이름을 다섯 개나 주었다. 제일 좋은 이름이 학성이라 하는데 택시 기사 이름 같아 어감이 제일 좋은 민서를 택했어요.”라며 웃는다.

태권도 3단의 유단자인 임민서의 꿈은 태권도 사범이었다. “저보다 싸움을 잘하는 아이가 있어 사범님 할 수 없는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임민서는 6살 때 서울 동대문으로 올라왔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그에게 음악을 시키고 싶어 했다. 고1때 엑스저팬을 좋아하는 형을 보고 “왜 저렇게 게이 같은 놈들을 좋아하나 생각했어요. 펑크를 몰라 형이 비디오를 몰래 보는 걸 보고 남자들이 동성애 하는 포르노인줄 알았어요.”라고 웃는다. 어릴 때부터 노래하기를 좋아한 그는 중2때 어머니가 뜬금없이 동네 악기점 아저씨에게 8만원을 주고 말도 안 되는 브랜드의 통기타를 사와 레슨을 받았다. “당시 15만원의 레슨비를 냈는데 성의 없이 튜닝만하고 가라고 해 기타가 보기도 싫어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그 후 외모는 마음에 안 들지만 엑스재팬의 노래가 좋아졌고 메탈리카 등 다양한 밴드음악을 알게 되었다.
[인디10] 마리서사의 슬픔은 당신의 달콤함보다 아름답다(part2)
[인디10] 마리서사의 슬픔은 당신의 달콤함보다 아름답다(part2)
인창고에 진학해 같은 학교에 다녔던 형의 추천으로 5인조 스쿨밴드 익스프레스에 들어갔다. 선배들에게 기타를 배웠는데 엉망진창인지라 2년 정도 종로 삼성음악학원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배웠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밴드구인 광고보고 4인조 록밴드 라즈에 들어갔다. 자작곡 개념도 없이 일본 음악을 주로 했는데 클럽 오디션 마다 다 미역국을 먹었다. 마지막으로 간 곳이 박건준이 있던 클럽 ‘플레이하우스’였다. “사실 저희는 연주가 별로였는데 심사를 봤던 건준형이 자고 있다가 ‘어 괜찮네 해봐’라고 하더군요. 그때가 한 참 비주얼 음악이 뜨던 시절인데 저희 멤버들의 외모를 보고 뽑아준 것 같아요. 당시 건준형이 공연을 하면 여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저는 자기 곡을 노래하는 모습이 멋있게 보였죠. 그때 말을 걸지 말아야했는데 우유하나를 받아먹으면서 친해져 버렸습니다(웃음).”

박건준은 “민서를 처음 봤을 때 기타 들고 있는 자체가 폼이 났습니다. 음악은 중요하지 않았죠. 당시 일본에는 잘생긴 밴드가 너무 많아 질투를 느꼈어요. 음악은 우리가 나은데 인기는 비주얼 밴드가 좋았던 게 사실입니다.”라고 말한다. 임민서는 “당시 아버지 건강이 나빠졌는데 형은 군에 가 있어 제가 병간호를 했습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병간호를 5년이나 하면서 내가 뭐하고 있는지 항상 우울했습니다. 그래서 신나는 음악이 싫고 우울한 노래가 뭔가 멋있어 보였고 위로가 되었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럼 김성범은 중학교 때 록음악 접했다. 당시 여자 음악선생님이 “록은 악마를 숭배하는 음악이라 들으면 정신에 해로우니 절대로 듣지 말라.”고 말해 오히려 호기심이 생겨 찾아 들었던 것. 가요만 들었던 그는 록음악을 들으니 너무 좋았다. 신세계였다. 한가람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체대 입시를 위해 합기도를 했다. 그땐 85kg라 나가는 뚱뚱보였단다. “저는 노상이라 인상이 안 좋아 절대 음악 할 외모가 아니었어요. 고3때 나쁜 쪽으로 풀린 선배들이 대학가지 말고 조직으로 오라고 해 겁이 나서 운동을 그만두고 실용음악과로 노선을 변경했죠.” 음악학원에서 드럼을 배워 김포대 실용음악과에 진학한 그는 2003년 친구소개로 4인조 이모코어 밴드 <세븐마일 비치>에 들어갔다. 클럽 기획공연부터 시작해 음반 내기 직전에 그가 <마리서사>에 영입되면서 밴드는 깨졌다. 리더 박건준은 “보컬, 드러머, 베이스 모두 진짜로 멋있고 남자다운 느낌의 밴드를 제대로 해보고 싶었어요. 클럽 긱에서 연주하는 성범일 보자마자 반해서 빼왔습니다”라고 말한다.

1집 Mary Story (2007), single 1st Album (2010), 2집 LOVESICK KOPAC(2013) (왼쪽부터)
1집 Mary Story (2007), single 1st Album (2010), 2집 LOVESICK KOPAC(2013) (왼쪽부터)
1집 Mary Story (2007), single 1st Album (2010), 2집 LOVESICK KOPAC(2013) (왼쪽부터)

마리서사의 정규 2집은 타이틀 ‘Lovesick’이 의미하듯 애절한 록발라드로 채색한 사랑과 이별에 대한 슬픈 음악보고서다. 1집에 비해 대중가요의 친숙한 질감이 한층 강화되었지만 동시에 ‘레몬’ 같은 실험성 강한 음악까지 2가지 음악노선이 공존하고 있다. 이는 대중성과 음악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몰이에 대한 뮤지션들의 영원한 고민에 직면해 있는 이들의 고민과 음악적 진보과정이 공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군 시절에 만든 타이틀 곡 ‘잇츠유’를 비롯해 대부분의 노래는 박건준의 창작곡이지만 ‘사랑을 애태우다’는 베이스 임민서가 작곡했고 ‘만약에’에서는 보컬로도 참여했다. 드럼 김성범은 드럼 편곡에 참여했다.

이들의 노래는 슬프다. 왜 이렇게 슬픈 노래에 집착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박건준은 “빠르고 신나는 음악은 저희 셋이랑 어울리지 않아요. 팬들이 노래를 듣고 우리를 보호하고 아껴주고 싶은 마음을 생겨나는 그런 슬픈 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좋았던 기억이 별로 없어 기분 좋고 즐거운 것은 금방 사라질 것 같아 솔직히 두렵습니다. 어머니는 늘 슬픈 제 노래는 틀지 말라고 하셨죠. 너무 듣고 싶었지만 삶이 힘들고 고단해 못 듣겠다고 하셨는데 한번 들으시더니 너무 좋아하셨어요. 저는 노래를 만들 때 무조건 대중성을 생각합니다. 대중성이 없으면 우선 가족부터도 듣지 않아요. 그래서 레슨을 가르치는 제자들에게도 음악을 편하게 하려면 가족들에게 먼저 인정을 받으라고 말합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2집 믹싱은 ‘영국의 비오는 느낌’으로 톤을 잡았다. 처음 대중성을 고려해 가요전문 스튜디오에 맡겼지만 전혀 느낌이 살지 않아 록 전문 스튜디오에서 마무리했다.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스토리텔링을 염두에 둔 트랙 순서. 첫 트랙 ‘작은 기적(胎)’은 어쩔 수 없이 음악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후 무한 상상력을 발휘해 무수한 아픔을 담은 사랑이야기들로 채색한 후 눈물로 끝나는 여정이다. 여기서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만이 아닌 음악에 대한 사랑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인생을 살아가면서 받았던 상처 중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가장 큰 상처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에게 받은 상처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개구쟁이처럼 순수한 이들이 왜 슬픈 사랑의 상처를 음악적 화두로 삼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일 것이다.

마리서사 프로필
박건준 (1981년 10월 11일) – 보컬, 기타, 피아노
임민서 (본명:임진호, 1983년 1월 15일) – 베이스
김성범 (1983년 11월 30일) – 드럼

1999년 박건준 포천고 4인조 스쿨밴드 <페디트PEDT> 경기도 청소년가요제 최우수상
2000년 박건준 5인조 메가데스 록 밴드 <샤인> 멤버
2001년 박건준 3인조 밴드 <졸리jolly> 결성
2004년 임민서 4인조 록밴드 <라즈> 멤버
2005년 3인조 모던 록 밴드 <마리서사> 결성, 문화관광부 ‘이달의 우수신인 음반’ 전문가 심사와 네티즌투표 1위
2006년 Sky 인디그라운드 인기상
2007년 EBS 스페이스 공감 7월의 헬로루키 선정
2008년 제5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노래 부문 수상 (너 없인 행복할 수 없잖아)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