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상반기에는 보이그룹의 인기가 주춤한 반면 걸그룹이 강세를 보였다. 요약하자면 새해 벽두 걸스데이를 필두로 달샤벳, 에이오에이, 레인보우 블랙에 이르기까지 데뷔 후 가장 농도 짙은 섹시 코드를 선보이더니, 소녀시대, 투애니원(2NE1)이 거의 같은 시기에 등장해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고, 에이핑크가 상반기 막판에 선전했다. 이 가운데 오렌지캬라멜은 독창적인 콘셉트를 선보이며 ‘콘셉트 돌’의 최강자로 나섰고, 크레용팝은 레이디 가가의 오프닝을 하러 떠났다.

2014년 갑오년이 밝자마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걸그룹들이 야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기존의 섹시 코드만으로는 대중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 농도는 더욱 대담해졌다. 타이밍 상으로 봤을 때 걸그룹이 다시 섹시해질 때가 됐다. 2013년에 소녀시대, 씨스타 등이 뮤지컬, 라스베이거스 쇼와 같은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크레용팝과 같은 ‘콘셉트 돌’이 성공하는 사이 섹시한 걸그룹이 한동안 뜸했다. 그러한 타이밍에 걸그룹들은 작정한 듯 의상부터 안무, 표정에 이르기까지 농염함을 가득 담고 있는 섹시 콘셉트로 돌아왔다. 이는 찬반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섹시 콘셉트를 시도한 걸그룹 중 가장 인기를 끈 것은 걸스데이였다. 걸스에이의 ‘썸씽’은 무조건 야한 콘셉트를 시도하기보다는 노래가 뒷받침이 돼야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섹시한 안무 등이 화제를 모으자 무조건 벗고 보자는 식의 퍼포먼스도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스텔라의 ‘마리오네트’였다. 이들은 온갖 성적 메타포로 가득찬 19금 뮤직비디오를 선보이는 한편 페이스북을 통해 란제리 화보를 선보이는 이벤트까지 진행해 지나친 성 상품화라는 비난을 받았다.

걸그룹 선정성 논란을 잠재운 것은 소녀시대와 투애니원이었다. 소녀시대와 투애니원의 새 음반이 비슷한 시기에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부터 가요계 이목이 집중됐다. SM엔터테인먼트는 타이틀곡 ‘미스터미스터(Mr.Mr.)’를 세계적인 프로덕션팀 언더독스가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YG엔터테인먼트는 씨엘의 자작곡이 들어간다는 점을 각각 강조했다. 이는 두 기획사의 지향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해외 작곡가들까지 아우르는 막강한 A&R을 통해 고도의 음악과 퍼포먼스를 조립해내는 SM. 그리고 훈육된 아이돌그룹을 아티스트로 키워내려는 의지를 가진 YG의 대결이기도 했던 것.
소녀시대와 2NE1의 정면 대결, 승자는 누구인가?

데뷔 8년차 소녀시대의 네 번째 미니앨범 ‘미스터미스터’는 전작들에 비해 비교적 친숙하고 조금은 평범한 곡들로 채워졌다. 예상 외로 음악적인 파격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나머지 5곡은 모두 수려한 멜로디, 사운드를 지닌 출중한 팝 넘버. 기존의 소녀시대 앨범에서 만날 수 있었던 ‘세련된 사운드+접근하기 쉬운 멜로디+복고풍’의 어법을 잘 따르고 있으며 친숙한 멜로디를 들려줬다.

데뷔 6년차 투애니원은 정규 2집 ‘크러쉬(Crush)’에서 상당히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씨엘이 작사 작곡에 참여했데, 이는 엄밀히 말해 씨엘이 곡을 만들었다기보다 테디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YG 프로덕션팀에 가담했다고 말하는 것이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씨엘이 참여한 곡들은 투애니원, 그리고 빅뱅의 스타일에서 분명히 이어지고 있다. 멤버들의 성장이 들리는 대목은 의외로 ‘살아봤으면 해’ ‘착한 여자’와 같은 발라드 곡, 그리고 ‘해피(Happy)’ ‘베이비 아이 미스 유(Baby I Miss You)’처럼 멜로디가 뚜렷한 곡들이었다. 과거에 다소 단조롭게 노래했던 투애니원은 이제 꽤 곡의 맛을 살리는 모습을 보였다.
오렌지캬라멜의 까탈레나는 콘셉트의 승리였고, 이는 걸그룹의 방향성을 확장시켰다.

소녀시대, 투애니원 못지않게 화제를 모은 것은 바로 애프터스쿨의 유닛이자 콘셉트 돌의 대표주자인 오렌지캬라멜이었다. 이들의 노래 ‘까탈레나’의 무대는 무려 ‘초밥’ 콘셉트였다. 걸그룹이 초밥이 되는 것이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까탈레나’는 오렌지캬라멜이 오랜 시간 다져온 경험치가 낳은 결과물이다. 뮤직비디오는 ‘오렌지처럼 상큼하고 캬라멜처럼 달콤한’ 팀 이름처럼 미각을 자극하는 콘셉트이면서 동시에 걸그룹을 음식에 비유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까탈레나’는 다채로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 트로트풍의 멜로디에 파키스탄 펀자브족의 민요인 ‘주띠 메리(Jutti Meri)’를 차용해 재미난 정서를 구현해냈고, 여기에 먹거리를 소재로 한 무대와 의상은 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팬들이 오렌지캬라멜을 보면서 흘릴법한 채팅언어 ‘ㅋㅋㅋ’를 몸소 춤으로 표현한 ‘ㅋㅋㅋ춤’은 가히 압권이다. 이쯤 되면 ‘까탈레나’ 콘셉트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사전작업이 행해졌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이렇게 창의적인 걸그룹의 퍼포먼스라면 박수를 쳐줄만 했다.
크레용팝이 처음 나왔을 때 그 누가 레이디 가가의 오프닝을 설 수 있을 거라 예상했을까? 역시 콘셉트의 힘이다.

오렌지캬라멜의 뒤를 이어 ‘빠빠빠’ 최고의 콘셉트 돌이 된 크레용팝은 ‘어이’로 컴백했으나 작년과 같은 돌풍을 일으키진 못했다. 하지만 크레용팝은 6월 26일부터 7월 22일까지 한 달간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12개 도시 13회에 걸쳐 레이디 가가의 북미 투어 콘서트 ‘아트레이브: 더 아트팝 볼(artRAVE: The ARTPOP Ball)’의 오프닝 무대를 30분 동안 장식하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성괄르 거두게 된다. 이는 레이디 가가의 제안으로 이루어져 의미가 깊었다.

상반기 막판은 에이핑크 ‘미스터 츄’의 독주 체제였다. 전작까지 에이핑크는 1세대 걸그룹인 S.E.S., 핑클의 귀엽고, 산뜻한 이미지, 그리고 귀에 잘 들어오는 멜로디를 충실히 계승한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도 그러한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타 걸그룹들이 ‘변신과 진화’에 추구하거나, 섹시퍼포먼스에 집중하는 사이에 에이핑크는 한결같은 이미지를 구축해왔고, 이것이 대중에게 호응을 얻은 것이다. 한때는 걸그룹의 당연한 이미지라고 느껴졌던 에이핑크의 모습이 섹시 콘셉트의 난무 속에서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간 것이다. 올 하반기에는 씨스타, 에프엑스, 걸스데이, 카라, 나인뮤지스 등이 돌아오는 것으로 알려져 더욱 뜨거운 2차전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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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팽현준 pangpang@tenasia.co.kr
사진제공. SM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 플레디스, 에이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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