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작가에게 꼭 필요한 것은 드라마틱한 체험일까 일상의 경험일까. 답을 고르기 쉽지 않은 문제를 두고 굳이 분류해 본다면 아마도 이금림 작가는 후자에 가까운 인물일 것이다. 전북 남원의 집성촌, 명절에는 대청마루가 비좁아 마당에까지 내려서 차례를 지내야 할 만큼 대가족 안에서 나고 자랐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 읍내로 이사한 뒤 옆집이던 극장 주변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가 훗날 <은실이>를 탄생시켰고, 문예반에서 만나 평생의 단짝이 된 친구는 <혼불>이라는 명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故 최명희였다. 여자는 교육 대학을 나와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게 최고의 출세라 여기던 아버지 몰래 서울에 올라와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뒤에는 연극 서클에서 활동하고 점심값을 아껴 영화를 보러 다녔지만 졸업과 함께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결혼해 두 아이도 낳았다. 스물셋부터 서른셋까지,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 날 출근길에 충동적으로 발을 멈추고 고향에 내려갔어요. 다음 날 돌아와 바로 사표를 냈지요. 농담까지도 매번 똑같은 얘기를 일고여덟 반씩 돌아가면서 녹음기처럼 트는 걸 더는 못 견디겠더군요.”

그 후 단 한 번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가수 이수만과 성우 송도영이 진행하던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스크립터로 일하던 중 드라마 국 관계자에게 발탁되어 80년 <억척선생 분투기>로 데뷔했고, 교사로 일한 경험을 살려 <고교생 일기>, <호랑이 선생님> 등 청소년 드라마를 도맡아 쓰기도 했다. <도시의 흉년> 같은 미니 시리즈는 물론 <일출>, <아직은 마흔아홉> 등 아침 드라마와 <옛날의 금잔디>, <당신이 그리워질 때> 같은 히트 일일 드라마도 수없이 집필했다. ‘금맥이 솟아나듯 쓸 거리가 떨어지지 않던 즐거움’과 ‘불 꺼진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의 괴로움’ 사이를 오가며 서른 해 남짓한 세월을 꽉 채운 이금림 작가는 평범한 날들의 비범한 기록이었던 드라마 작업에 대해 “드라마를 쓰는 일은 지식과 경험의 총량이 정말 많아야 하는 것 같아요. 세상을 바라보는 그 어떤 순간에도 내가 작가라는 걸 잊지 않고 모든 감각을 깨우려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야 했지요”라고 회상한다.

그리고 2001년의 <푸른 안개>는 그가 평생을 달려온 성실하고 치열한 시간의 정점에서야 비로소 나올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단순한 멜로가 아니라 한 인간의 고독과 쓸쓸함과, 사랑하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고통과 자기 인생마저 내던질 수밖에 없는 사랑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 그런 이야기는 이 나이에 쓰지 않으면 다시는 쓸 수 없을 것 같았지요.” ‘불륜’을 다룬 드라마로는 드물게 여성보다 남성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푸른 안개>는 채널 다툼에서 진 남편들이 집 밖에 나와 몰래 본다는 소문이 날만큼 쓸쓸한 중년 남자들의 가슴을 휩쓸었다. “당시 소설가 김훈 선생이 저에게 화를 내더군요. 성재(이경영)를 신우(이요원)하고 도망가게 했어야지 그게 뭐냐고, 작가의 한계라면서. (웃음)”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40대 남자의 심리를 그리도 처절하게 그려냈을까. “그건 바꾸어 말하면 40대 여자의 심리이기도 하거든요. 나이를 먹는 데에는 남녀가 없듯 그냥 인간이 나이를 먹는 거니까 고독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에요.” 간결한 대답 속에 30년 작가의, 60년 인생의 내공이 담겨 있다.

MBC <새엄마>
1972년, 극본 김수현 연출 박철

“MBC나 TBC 같은 방송국이 생기고 몇몇 부잣집에서나 TV를 들여놓던 60년대에는 드라마를 거의 보지 못했어요. 결혼하고 처음 TV를 샀는데 <새엄마> 때문에 최초로 드라마의 열성팬이 되었어요. 전양자 씨가 연기한 새엄마를 처음에는 싫어하고 오해하던 가족들이 새엄마로 인해 갈등을 풀어나가는 과정과 새엄마 나름의 아픈 가정사 같은 게 얼마나 재미있던지, 근무하던 학교에서 보충수업이 늦게 끝나면 집까지 뛰어와서 보던 기억이 나요. 김수현 선생님이 이후에 발표하신 강렬한 멜로드라마들과 달리 <새엄마>, <신부일기>, <행복을 팝니다> 같은 초기작들은 가족이나 이웃 간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얘기들이었지요.”

KBS <동심초>
1979년 극본 박정란, 연출 김수동

“박정란 선생님은 멜로드라마를 참 섬세하게, 수놓는 것처럼 쓰셨던 분이에요. <재회>나 <엄마의 얼굴> 같은 작품들도 좋았는데 특히 제가 열심히 본 드라마는 학교를 그만두고 모처럼 쉬고 있을 때 방송됐던 <동심초>에요. 지금은 중견배우가 된 김미숙 씨의 데뷔작이었고, 매주 시추에이션이 달라지는 주간연속극이었는데 매번 따뜻하면서도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려내는 박정란 선생님의 장기는 나중에 <딸이 더 좋아>라는 작품에서도 드러났지요. 요즘에도 여전히 새로운 드라마를 빠짐없이 챙겨보시고 활발한 집필 활동을 하시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KBS <부활>
2005년 극본 김지우, 연출 박찬홍

“김지우 작가는 <학교>라는 작품을 봤을 때부터 참 좋은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그 드라마를 끝내고 전부터 제 작품을 좋아했다면서 먼저 연락을 해 와서 만나게 됐어요. 그 후로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비단향꽃무>도 봤고 <부활>과 <마왕>도 보게 됐는데, 세상에 안 읽는 추리소설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복잡한 퍼즐을 하나씩 맞추는 것 같은 구성을 보면 정말 머리가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런 칭찬을 하면 본인은 ‘집도 못 찾아가요’ 라며 웃더군요. (웃음) 지금 새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데 시놉시스가 좋다고 소문났지만 요즘 같은 때 편성이 쉽지 않은 것 같아서 참 안타까워요. 이런 시대를 살아내기 힘들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향기 있고 아름다운 사람이거든요.”

“사랑이 쉬운 때에도 안타까운 사랑이야기가 있을까?”

이금림 작가는 올해 초 KBS 일일 드라마 <집으로 가는 길>을 집필하던 중 건강상의 문제로 중도 하차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의식만 있고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식구들이 깨워서 응급실로 옮기지 않았다면 영영 못 깨어났을지도 모른다더군요.” 몇 달 동안의 회복 기간을 거쳐 겨우 한 고비를 넘긴 그는 요즘 다시 드라마에 대해 새로운 고민과 애정으로 접근하고 있다. “드라마의 재미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는데 오로지 자극적인 것에만 천착하는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분명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이런 혼돈의 시기를 한동안 거치고 나면 다시 우리 드라마가 발전하는 계기가 오겠지요.”

그래서 더 이상 어떤 욕심도 없지만 여전히 드라마에 대한 꿈을 간직한 이금림 작가의 작가 인생은 아직 막을 내리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저처럼 무미건조한 사람이 멜로를 쓴다고 하면 다들 웃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도전해 보고 싶은 건 멜로드라마에요. 그런데, 요즘처럼 사랑이 너무 쉬운 때에도 그렇게 안타까운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끌림이 있을까요?” 처음과 달리 마지막 문제의 답은 아주 쉽다. 인간과 인생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지닌 작가의 멜로드라마는 언제라도 반갑고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가치가 있다.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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