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세│당신은 마성입니다
몇 분 안에 빠져드는지 시간을 재보는 것도 좋겠다. 영화 <남자사용설명서>의 한류스타 이승재(오정세)에게. 꽃미남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고, 깔창 없이 땅 밟기를 질색하며 이마에는 주름이 뚜렷한데다 패셔니스타인지 패션 테러리스트인지 모를 화려한 몸치장을 즐기는 이 남자에게 첫눈에 반하지는 않더라도 방심해선 안 된다. 톱스타 특유의 오만하고도 예민한 애티튜드 틈새로 비어져 나오는 유치하고 쪼잔한 남자의 일면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다면 1단계다. 그리고 우연히 Dr.스왈스키(박영규)의 ‘남자사용설명서’ 비디오테이프를 손에 넣은 CF 조감독 최보나(이시영)에게 마음을 연 그가 본능과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온몸으로 부딪혀 만들어내는 해프닝에 폭소하는 사이 2단계를 지난다. 그래서 마침내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빛내는 남자의 고백 “난 바보, 너밖에 모르는 바보. 넌 바보, 내 맘도 몰라주는 바보”에 손발이 오그라들기보다 문득 설레고 만다면 인정해야만 한다. 마성의 이승재, 아니 오정세에게 완벽히 설득당했음을.

역할의 크기보단 인물의 깊이를

의 한류스타 이승재가 10년 동안 프로필만 돌리며 올라왔듯 오정세 또한 지치지 않고 달려왔다." src="https://img.hankyung.com/photo/202001/AS10vll5yrBc6.jpg" width="555" height="185" border="0" />



“우리 영화에서 가장 웃긴 부분의 시작은 제 캐스팅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오정세가 주인공으로 한류스타? 재밌네? (웃음)” 1997년 <아버지>의 ‘행인 2’ 역할로 데뷔한 이후 수십 편의 작품에서 조단역을 맡아 연기했고 배역의 이름보다는 ‘이선균의 친구 만화가’(<쩨쩨한 로맨스>), ‘류승범에게 접대 받는 기자’(<부당거래>), ‘박유천의 동료 형사’(MBC <보고 싶다>) 등 주인공 주변의 캐릭터로 기억되고 있던 그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한류스타를 연기하게 된 것은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기회였다.



하지만 알고 보면 벼락스타가 아닌 이승재가 “10년 동안 굽신거리며 프로필만 돌렸어”라고 회상하듯, 수없이 많은 오디션에 떨어지면서도 “10년, 20년 열심히 하다 보면, 좀 늦더라도 40년 후에는 좋은 배우가 되어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만으로 지치지 않고 달려온 오정세가 집중한 것은 역할의 크기가 아닌 인물의 깊이였다. 그리고 빠르게 치닫는 사건 사이에서 감정이 무리하게 점프하지 않도록 사이를 메우는 작업은 이원석 감독과 그가 쉬지 않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보나와 자신의 라이벌 오지훈(김준성)의 관계를 의심한 승재가 집요하게 “잤냐”고 물으며 갈등과 코미디가 절정에 달하는 신 역시 섬세한 고민의 결과다. “남자로서 충분히 공감하는 대사지만 보나가 진심을 담아 얘기하는데도 계속 캐묻는 게 좀 불편했어요. 그래서 ‘잤지?’라는 추궁 곱하기 10이 아니라, ‘잤지? 아니야, 안 잤을 수도 있어. 안 잤지? 난 안 잔 거면 좋겠어. 혹시…잤니? 제발 아니라고 말해!’ 처럼 승재의 복잡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단역이든 조연이든 주연이든 타이틀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요”

오정세│당신은 마성입니다

오정세│당신은 마성입니다
결과적으로 <남자사용설명서>는 배우 오정세의 가능성에 의구심을 가졌던 이들에게 시원하고 기분 좋은 한 방을 날린 작품이 되었지만 지금 그의 존재를 ‘오랜 무명 시절을 딛고 대박 작품을 만난 배우의 석세스 스토리’ 쯤으로 소비하는 것은 결례처럼 느껴진다. 혼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오디션을 보고 연기 아카데미 ‘액터스 21’ 동기 양익준, 우정국과 쑥스러워하면서도 영화사마다 프로필을 돌리러 다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는 한결같이 심지 굳은 배우이기 때문이다. “연기를 시작한지 7년쯤 됐을 때 모처럼 비중이 큰 역을 맡아 주위에서 칭찬도 받고 인터뷰도 좀 했어요. 그런데 다른 작품 오디션에 갔더니 심사위원이 보시다가 ‘연기 처음 하시죠?’ 그러시는 거예요. 얼결에 ‘예, 처음 합니다’ 대답하고 나오면서 생각했어요. 한 번 인정받았다고 다음 작품도 탄력 받아 계속 올라가는 게 배우 인생이 아니구나. 굴곡 있는 그래프가 숙명 같은 거구나. 그래서 지금 <남자사용설명서> 반응이 좋다 해도 제가 연기 실력을 충분히 쌓은 게 아니고 언제나 인정받는 배우는 아닐 거라는 자각을 항상 하고 있어요. 그래서 더욱, 단역이든 조연이든 주연이든 타이틀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요.” 모범답안임에도 그가 오랜 시간 동안 온몸으로 부딪히며 얻어낸 지침은 뻔하거나 가볍지 않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카테고리에도 선뜻 넣을 수 없지만 은근히 빠져들게 되는 오정세의 매력을.



스타일리스트. 홍은화 실장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