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후반은 평화의 시ㄷ… 아니 아이돌의 시대였다. H.O.T.와 젝스키스라는 양대 산맥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처럼 전국의 소녀 팬들을 양분했지만 샤방하면서도 강렬하고, 또래이면서도 오빠처럼 우러러보게 되는 십대 스타들이 서울 하늘에 보이는 별보다 많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댄스 중심의 보이 그룹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2011년 현재에 비해 훨씬 스타일도 콘셉트도 다양했던 90년대 아이돌들은 태동기에 바로 뒤이어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했고, 그들 중 대부분은 초신성처럼 뜨겁고도 짧은 인기의 폭발을 거친 뒤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하지만 아직도 누군가의 가슴 속에 그 시절과 함께 기억되는 그 오빠들과의 아름다운 시간을, 먼 옛날 한 때는 소녀 팬이었던 기자들이 되새겨 보았다. 별 하나에 Y2K와, 별 하나에 태사자와, 별 하나에 아이돌과, 별 하나에 최창민, 김수근…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오빠를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다른 오빠가 나온 까닭이요, 아직 우리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이다.

90년대의 오빠들│오 나의 오빠님!
90년대의 오빠들│오 나의 오빠님!
밀레니엄의 왕자님, Y2K
얼굴을 먼저 봤는지 노래를 먼저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1999년, 세기말, 재수생의 우울한 여름에 한 줄기 빛처럼 내린 그들이 실로 아름다웠다는 사실이다. 한일합작밴드라는 독특한 정체성의 3인조 그룹 Y2K는 유리우스나 비요른 안드레센의 현신이랄지, 테리우스처럼 찰랑대는 헤어스타일에 이목구비마저 순정만화 그 자체인 미소년들이었다. 왕자님과 공주님을 섞어놓은 듯한 미모와 달리 슬픈 발라드를 부르다 초대형 삑사리를 내고서도 해맑은 미소로 “미아내~”를 외치던 호방한 성품의 형 유이치, 연주보다 누나들 홀리는 눈웃음과 멋지게 앞머리 쓸어 넘기기가 특기였던 동생 코지, 안정된 라이브 및 마쓰오 형제 돌보기를 주로 담당하던 한국인 멤버 재근 오빠가 환히 웃고 있는 포스터는 노량진의 레코드점까지 가서 얻어온 나의 1호 보물이었다. 좀처럼 울리지 않던 나의 삐삐 벨소리가 KBS 1위까지 올랐던 Y2K 전설의 명곡 ‘헤어진 후에’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비록 그토록 훈훈하던 마쓰오 형제는 어설픈 한국말 실력과 엽기 표정으로 카메라에 얼굴 들이대기 등 4차원 성격으로 소녀 팬들의 환상을 와르르 무너뜨리긴 했지만, 그리고 그 뜨거웠던 인기가 하룻밤의 꿈이었던 양 Y2K의 활동은 곧 끝나고 말았지만 눈보라 속에서도 열창하던, 팬클럽 이름마저 신화 속의 미소년 ‘아도니스’였던 그들은 분명 밀레니엄의 왕자님이었다.
글 최지은
90년대의 오빠들│오 나의 오빠님!
90년대의 오빠들│오 나의 오빠님!
‘태사자 인 더 하우스’의 마법, 태사자
‘아~ 예~ 태사자 인 더 하우스!’ 그리고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건널 수 없는 요단강을 사이에 둔 ‘젝키팬’과 ‘에쵸티팬’ 조차 한 목소리로 외치게 하고, 80년대 언저리에 태어난 중생들을 노래방에서 일치단결 시키는 신비의 주문 ‘도(道)’. 1997년, H.O.T. S.E.S. 등 글로벌 네이밍의 아성이 높던 때 ‘네 명의 큰 남자들’ 태사자(太四子)는 오리엔탈리즘의 색채를 띄고 등장했다. 데뷔 초에는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한 같은 소속사 출신의 김희선이 그룹명을 지어준 일화로 주목 받았지만 멤버들의 매력과 능력 또한 출중했다. 리더임에도 일찍이 허당스러운 이미지를 구축했던 천(天) 김형준, 참한 새신부 같았던 풍(風) 김영민, 좀 노는 유학생 오빠 이미지의 우(雨) 이동윤과 불안한 듯 새침한 랩퍼 운(雲) 박준석까지. 이들은 믹키유천, 별빛찬미 이전에 호를 선점한 아이돌이었다. 또한 싸이 이전에 새의 날개짓을 형상화한 안무로 정말 저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곡의 분위기를 살린 선견지명의 아이콘이었다. 동시대 남자 아이돌들이 소년스러움을 강조할 때 수트 차림의 어딘가 회사원스러웠던 성숙한 오빠들은 2001년 로 가요계를 떠났다. 그러나 ‘아~ 예~’만 들어도 자동반사적으로 떠오르는 ‘태사자 인 더 하우스’의 마법은 영원할 것이다.
글 이지혜
90년대의 오빠들│오 나의 오빠님!
90년대의 오빠들│오 나의 오빠님!
오빠가 아니라도 괜찮아, 아이돌
정확히 말하자면 오빠가 아니라서 좋았다. 이미 삼촌뻘인 총각들을 보며 “오빠”라고 울부짖는 일에 익숙했던 여중생에게 아이돌은 동갑내기, 고작 해야 한 살 차이라는 치명적인 매력으로 어필하는 듀오였다. 미국 교포의 트레이드마크인 더듬이 앞머리를 휘날리는 쪽이 최혁준, 짙은 눈썹에 좀 더 통통한 쪽이 이세성이라고 우리들은 잘도 구분했지만 스키를 무대의상으로 배우던 시절답게 사이즈가 갑절은 커 보이는 보드복 상의 때문에 더더욱 조막만 해 보이는 얼굴을 어른들은 도통 헷갈려 하기도 했다. 데뷔곡의 제목은 ‘바우와우’. 개 짖는 소리로 소년 듀엣을 출격 시키는 소속사의 과감함이 경이롭지만, 당시에는 그마저도 이국의 신비로운 단어로 들릴 뿐이었다. 게다가 최혁준이 힙합그룹 coast 2 koast의 최유진과 형제 사이이자 배우 나오미의 막내아들이며, 이세성은 브라질 상파울루 출생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둘의 어눌한 한국말은 오히려 세련된 태도의 조건으로 비춰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2집 앨범 발표와 맞물려 H.O.T.가 등장했고, 이들의 소속사는 젝스키스라는 대항마를 준비하며 1년 남짓 활동한 아이돌의 해체를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다. 머지않아 멤버들에 관한 어두운 뉴스를 듣기도 했지만, 결국 이세성은 경영학을 전공한 사업가가 되었고, 최혁준은 음악 공부를 계속 해 프로듀서이자 DJ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잊어간 오빠들과 달리, 이토록 성장사를 간간히 추적한 이유는 또래의 안녕을 기원하는 일방적인 우정 때문이라고 해 두자.
글 윤희성
90년대의 오빠들│오 나의 오빠님!
90년대의 오빠들│오 나의 오빠님!
내가 바로 원조 꽃미남이다, 최창민
백설기처럼 하얀 얼굴 위에 떠있는 보조개를 한참동안 바라봤다. 잡지에서 찢어온 ‘SPORT REPLAY’ 광고 사진 한 장, 그것이 시작이었다. 솔리드가 해체하고 ‘다시는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으리’ 다짐 또 다짐했건만. ‘남자가 저런 보조개를?’이란 놀라움과 동시에 신대륙을 발견한 것 같은 새로움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말도 안 되게 길고 큰 눈은 매직아이를 심어놓은 듯 나를 빠져들게 했다. 이후 교과서 커버로 , 등의 패션지에 등장한 최창민의 사진이나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산 판매용 사진을 넣어 다니기 시작했다. 또한 눈 사이로 가지런히 내린 머리 한 가닥, 은색 링 귀걸이로 대표되던 최창민의 스타일은 ‘SPORT’에 S가 붙은 가짜를 양산시키기에 이르렀고, 또래의 많은 아이들이 나처럼 백화점에서 ‘최창민 티셔츠’를 만지작거리다 엄마에게 등짝을 맞았으리라. 그렇게 의류 모델, VJ를 거치며 연예인 우등생 코스를 밟다가 ‘영웅’, ‘짱’이란 노래를 발표해 큰 사랑을 받았다. 참으로 한결같다고 느낄 만큼 정직한 창법은 헐렁한 노래 실력을 증명했지만, 댄서출신다운 춤 실력에는 립싱크 하는 입이 맞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긴 팔, 다리를 활용해 정확하게 안무를 소화하는 우아함이 있었다. 이후 송혜교와 함께한 교복 CF와 시트콤 , 그리고 비운의 명곡 ‘눈을 감아’를 포함한 두 장의 앨범까지. 그는 우리들의 패셔니스타였고, 만능 엔터테이너였고, 무엇보다 사슴 같은 외모를 가진 오빠였다. 최창민을 표현하기 적절한 ‘꽃미남’이란 단어가 너무 늦게 나온 것이 한스러울 뿐.
글 박소정
90년대의 오빠들│오 나의 오빠님!
90년대의 오빠들│오 나의 오빠님!
순수한 옆집 오빠 수근수근, 김수근
그렇게 좋아했던 김원준과 신승훈, R.ef와 H.O.T.도 다 잊게 만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이지훈이 약간 느끼한 귀공자였다면, 김수근은 떡볶이 단추가 달린 코트를 즐겨 입을 것 같은 순수한 옆집 오빠였다. 여드름이 나기 시작한 얼굴,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표정과 ‘어떤 약속’을 부르는 애달픈 목소리는 막 사춘기에 접어든 여중생의 마음을 뒤늦게 파고들었다. 발매일보다 약 2년 후에 구입한 1집 테이프는 잘 때마다 틀어놓는 자장가였고, MBC 에서 그가 기타를 치며 송은영에게 불러주었던 푸른하늘의 ‘축하해요’는 한동안 나의 생일축하곡 18번이었다. ‘팬질’을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그가 뿔테 안경을 끼고 나와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뭐”라 말했던 집중력향상 기기나 크래커, 감자칩 CF 등을 TV로 제때 눈여겨 보지 못한 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래서 와 , 등 각종 하이틴 잡지에 실린 사진을 모으는 일에 더욱 열심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같은 반 친구들 중 그의 팬은 내가 유일했고, 덕분에 누군가와 싸우지 않아도 온갖 잡지에 실린 자료들을 몽땅 차지할 수 있었다. 고백하건대, 욕심이 지나쳐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렵게 얻은 H.O.T.의 친필 사인과 바꿔치기를 한 적도 있다. 김수근은 내 인생에서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한, 진정한 의미의 첫 오빠였던 것이다.
글 황효진

편집. 이지혜 seven@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