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스파이스 “델리스파이스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를 더 쌓고 싶다”
델리스파이스 “델리스파이스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를 더 쌓고 싶다”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왠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슬픈 예감, 이번에는 틀렸다. 2006년 < Bombom > 앨범을 마지막으로 해체설까지 나돌았던 델리스파이스가 5년 5개월만에 7집 < Open Your Eyes >로 컴백했다. 김민규와 윤준호는 공백기 동안 마음을 비워냈고, 이제는 새 앨범을 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데뷔 시절에 만들었던 곡까지 모두 끄집어냈다. 그렇게 완성된 앨범에는 델리스파이스의 지난 세월에 대한 담담한 기록, 앞날에 대한 여유로운 다짐이 담겨있다. 5년 넘게 신곡 없이 “지겹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던” 공연을 해왔던 델리스파이스는 이제야 “떳떳한” 마음으로 무대에 설 수 있게 됐고, 자신들을 기다려 준 팬들에게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우린 델리스파이스”라는 믿음을 안겨줄 수 있게 됐다. 오랜만에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입천장까지 부르텄다는 윤준호와, 유희열이 위기의식을 느낄 정도로 건강해진 김민규를 만났다.

7집 앨범 발매 쇼케이스 때 굉장히 쑥스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하던데, 오랜만에 새 앨범을 들고 무대에 서는 소감이 어땠나.
김민규: 록페스티벌 무대는 야외인데다 사람들도 넓게 퍼져있으니까 덜 부담스러운데, 클럽에서는 사람들의 반짝거리는 눈빛이 막 느껴졌다. 만화책 보면 한밤중에 이리 떼 눈만 보이는 그런 거 있잖나. 새 음반이 주는 심리적 압박감도 조금은 있었다. (웃음)
윤준호: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옛날부터 알고 있던 팬들은 조금밖에 안 왔더라.

그래도 예약 판매만으로 1만 장을 돌파할 만큼 5년 5개월을 기다려 준 팬들이 많았다.
김민규: 다른 건 몰라도 음악적인 반가움이나 놀라움은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단지 오래된 밴드가 돌아와서가 아니라 장르적인 것들, 세세히 들어가자면 가사를 쓰는 방식, 노래하는 창법, 연주하는 스타일 같은 부분에서 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 같았다. 예전에 비해 노련해졌으니까.

“5년 5개월의 공백기는 비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델리스파이스 “델리스파이스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를 더 쌓고 싶다”
델리스파이스 “델리스파이스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를 더 쌓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깜짝 놀란 건 몰라보게 좋아진 김민규의 안색이다. 유희열이 “내가 유일하게 얕잡아보던 사람이었는데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할 정도로. (웃음)
김민규: 자연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된다. 도시를 굉장히 싫어해서 시간이 나면 산이나 바닷가에 자주 갔다. 거기서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니까 근심도 사라지고 좋더라. 하지만 요즘에 다시 슬슬 근심이 생기고 있다. 하하.

어떤 근심?
김민규: 정말 사소한 것들이다. 내 악기가 흐트러지진 않을까, 앰프는 잘 나올까. 스스로를 옥죄는 성격이라 더 힘든데, 힘든 거 뻔히 알고 뛰어들었으니까 최대한 재밌게 활동하려고 한다. 바닷가가 위험한 걸 아니까 구명조끼도 하나 걸치고, 튜브도 하나 끼고. 예전처럼 쓸데 없이 감정적인 허비를 하고 싶진 않다.

두 사람이 함께 캠핑을 갔다가 이번 앨범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서로 마음이 통했나.
윤준호: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캠핑 가서 민규가 만들어 준 음식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감정이 통했다. 딱히 음악 얘길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다시 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느낌이 막연하게 들었다.
김민규: 이미 음악적인 부분은 서로 다 아니까 제일 중요한 건 서로의 의지, 밴드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였다.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그러면 이제 (앨범을) 낼 때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앨범 내기 전에 다 같이 회의하고, 음악 얘기하고, 앨범 재킷 얘기도 했을 거다. 그 땐 다들 쫓기는 느낌이 있었으니까. 아무 얘기를 안 하고도 앨범을 낼 결심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준비가 됐다는 뜻이고, 그만큼 여유로움이 생긴 것 같다.

마음이 여유로워진 건 공백기 덕분인가?
김민규: 맞다. 캠핑 가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으면 아마 다른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윤준호: 우리 더 쉬어야겠다면서. (웃음) 되돌아보면 우리한테 5년 5개월의 공백기는 비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런 휴식기를 거쳐 오랜만에 앨범 작업을 해보니 어떻던가. 마음가짐이나 태도에 있어서 과거와 달라진 부분이 있었나.
윤준호: 예전에 앨범을 만들 땐 다시 뜯어고치는 작업을 두려워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마음을 많이 버렸다. 시간적으로나 심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레인메이커’ 같은 경우도 믹싱까지 다 끝난 상태에서 다른 버전으로 바꿨다. 말하자면, 제품을 완성하고 포장까지 다 해놓고 이제 배송만 하면 되는데 포장지를 뜯고 디자인과 설계부터 다시 한 셈이다.

“자연스럽게 흐름에 맡기다보니 우리 나이대에 맞는 앨범이 나왔다”
델리스파이스 “델리스파이스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를 더 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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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록페스티벌 무대에 설 때만 합주연습을 위해 모이던 관계였고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멤버의 변화도 있었는데, 여전히 밴드명은 델리스파이스다. 이름을 그대로 유지한 건 두 사람에게 어떤 의미였나.
김민규: 사실 밴드이름 바꾸는 게 굉장히 힘들고 어렵다. 하하하.
윤준호: 사람들한테 이미 기억되고 있는 밴드이름을 갖고 있다는 건 정말 큰 재산이다.
김민규: 델리스파이스라는 이름에 걸맞는, 그리고 그 이름이 주는 신뢰를 더 쌓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우린 델리스파이스라는 믿음. 그리고 혹시 또 잠깐의 공백기가 생기더라도 동요하지 말라는 메시지랄까. (웃음)

앨범 타이틀인 ‘Open Your Eyes’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될까.
김민규: 우리 자신한테, 우리 팬들한테 하는 얘기다. 너희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음악을 할게. 과거는 과거고 이제 다시 시작하는 거니까 눈을 뜨고 열심히 해보자. 전체적으로 계속 이런 메시지를 주입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앨범 타이틀부터 재킷사진, 수록곡까지 이번 앨범을 관통하는 건 시간인 것 같다. ‘슬픔이여 안녕’이나 ‘세월’을 들어보면 과거에서 벗어나자 혹은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이런 콘셉트를 정해놓고 만든 건가 아니면 곡을 모아놓고 보니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됐나.
김민규: 둘 다인 것 같다. 초반에 우연히 그런 곡들이 모이다보니까 ‘그러면 이 콘셉트로 가보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시간에 대한 곡을 많이 넣게 됐다. 옛날에는 그냥 내던져버리고 내지르는 가사를 많이 썼다면 이제는 사람들을 보듬어주고 어루만져주는 가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억지로 꾸미거나 왜곡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름에 맡기다보니 우리 나이대, 우리 경력에 맞는 앨범이 나온 것 같다.

그런 흐름에 맞는 곡을 구성하는 과정은 어땠나. 무려 100여곡 중에서 11곡을 선택했다고 들었는데.
김민규: 컴퓨터 하드 어딘가에 있는 조각 파일들까지 다 끄집어냈고,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돼있는 것도 컴퓨터에 연결해서 다 복원했다. 그러다보니 오래된 노래들 중에서 옛날에 왜 이 노래를 안 불렀을까 싶었던 곡들이 많이 나왔다. ‘My side’ 같은 경우는 1집 내기 전에 만든 노래였는데 카세트테이프에서 발견했다.
윤준호: 나는 ‘My side’를 이번에 처음 들었다. 그 곡이 델리스파이스 1집이랑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 민규가 나한테 안 들려줬다.
김민규: 그땐 가사도 다 영어였고 내가 너~무 열창을 했다. (웃음) 그게 좀 민망하고 우리 색깔이 아닌 것 같아서 1집에 안 넣었는데, 지금은 그 때보다 노래실력이 좀 나아졌으니까 해보는 거다.

새 앨범을 만들기 위한 과정을 떠나 델리스파이스의 지난 세월을 되짚어보는 시간이었겠다.
김민규: 그렇지. 활동하느라 바쁠 땐 이런 작업을 전혀 못하는데, 시간이 있으니까 이렇게 리플레이 할 수 있는거다.

과거와 비교해 이번 앨범의 이미지가 확 달라보이는 건 ‘Open your eyes’나 ‘Run for your life’ 때문인 것 같다. 예전 앨범에서도 일렉트로닉 요소를 종종 사용해왔지만 첫 트랙부터 이러한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운 건 이번 앨범이 처음이지 않나.
김민규: 아무래도 보코더라는 악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는 것 같다. 사람의 목소리임에도 기계처럼 들리지 않나. 악기 소리 하나를 듣고도 영감을 받아 곡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에 쉬면서 발견한 보코더도 그런 악기 중 하나였다.
윤준호: 민규가 보코더 연주를 넣어서 데모녹음 해온 걸 들었는데, 정말 좋았다. 이거다 싶었다.

예전에 사용하지 않던 악기까지 사용하면서 사람들에게 음악적인 놀라움을 선보이고 싶었던 이유는 뭔가. ‘고백’이나 ‘챠우챠우’의 벽을 뛰어넘어야한다는 부담감도 작용했나.
윤준호: 제2의 ‘챠우챠우’, 제2의 ‘고백’처럼 비슷한 스타일이되 더 멋진 곡을 만들겠다는 것보다 아예 다른 스타일의 대표곡을 만들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타이틀곡도 슬로우 넘버가 아니라 함께 달릴 수 있는 록킹한 스타일의 ‘슬픔이여 안녕’으로 정했다.

“밴드에서 제일 중요한 건 자기 색깔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델리스파이스 “델리스파이스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를 더 쌓고 싶다”
델리스파이스 “델리스파이스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를 더 쌓고 싶다”
두 곡을 발매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고 두 사람 모두 40대에 접어들었다. 여전히 홍대 인디신에서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나.
윤준호: 다행히 우리 이미지가 그렇게 나이 들어보이지 않는 것 같다.
김민규: 우리가 하고 있는 음악이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 시대나 유행에 따라 음악을 했던 사람은 바로 티가 나는데, 우리는 그런 흐름과 무관한 음악을 들려줬다. 트렌드를 초월한 느낌이랄까. 옛날 노래를 지금 듣더라도 그냥 요즘 노래 같다는 느낌을 받지 않나.

데뷔했을 때부터 그런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나.
김민규: 우리만의 색깔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My side’ 같은 열창곡이 1집에서 빠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윤준호: 밴드가 연주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두 번째 문제다. 제일 중요한 건 자기 색깔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자기 곡을 밴드에서 어떻게 녹여내느냐다.

공백기에도 꾸준히 록페스티벌 공연을 해왔는데, 새 앨범과 함께 올해 GMF(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공연을 준비하는 건 또 다른 느낌일 것 같다.
윤준호: 신곡이 포함된 셋 리스트를 짜면, 연습할 때부터 의욕이 넘친다. 2시간도 후딱 가고. (웃음) 그렇다고 기존의 곡들로만 합주하는 게 재미없거나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 때와는 약간 차원이 다르다.
김민규: 록페스티벌 공연을 할 때마다 너무 옛날 곡으로 하니까 지겨웠다. 새롭게 연주할 만한 노래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지겹다는 건 연주자 입장에서 느끼는 감정인가, 아니면 관객들이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는 뜻인가.
김민규: 연주자 입장에서 그렇다는 거다.
윤준호: 옛날 곡을 그대로 가져와서 우려먹는다는 느낌이 스스로 드니까 음악하는 입장에서는 약간 부끄러웠다. 새 음반, 새 노래를 갖고 리스트를 짜야 떳떳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셋 리스트를 짠 첫 공연이 쇼케이스 무대였는데, 공연 후 김민규가 트위터에 “오늘의 노래들도 아이폰3와 같은 길을 가겠지”라는 멘션을 남겼다. 어떤 의미로 쓴 글인가.
김민규: 지금 아이폰4를 쓰는 사람이 아이폰3 유저 앞에서 알 수 없는 자만심을 갖고 자신들이 더 앞서나간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아이폰5가 나오면 아이폰3 유저들이 그걸로 바꾸게 될 거다. 그러면 상황이 역전된다. 앞서나가던 게 뒤처지고, 뒤처지던 게 다시 앞서나갈 수 있다. 그게 자연의 이치인 것 같다.

이번 7집은 어떤 ‘아이폰3’로 남았으면 좋겠나.
김민규: 지겨운 앨범이 됐다가 다시 좋은 앨범이 될 수도 있고, 좋은 앨범이 됐다가 다시 지겨운 앨범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많이 들으면 지겨워지지만 좀 쉬었다가 다시 들으면 또 다른 느낌이 들 거다. 음악에도 인생에도 정해진 답은 없다.

사진제공. 뮤직커밸

글. 이가온 thirteen@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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