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성의 10 Voice] <패션왕>, 욕망이라는 것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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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안84의 웹툰 은 요컨대, EBS 청소년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살던 주인공이 KBS 의 세계로 편입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만화 속에서 교실이라는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전혀 다른 목표를 위해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두 집단은 어떤 접점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주인공 우기명은 각고의 노력 끝에 다른 세계로의 이동에 성공하는데, 그 통로는 바로 패션이다. 그래서 의 세계에서 패션은 곧 인물의 전투력을 의미한다. 어른의 시선에서 수선한 교복, 고가의 신발, 비상식적인 헤어스타일은 마냥 우스꽝스러운 것들이지만 우기명의 학교에서 이것은 인물의 능력을 나타내는 척도로 기능한다.

끊임없이 비웃게 되는 약자의 판타지

이 만화가 참신하다면, 그것은 다만 패션과 스타일을 통한 배틀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KBS 의 ‘꽃미남 수사대’에 이르기까지 과장된 패션의 경쟁을 통한 풍자개그는 이미 여러 번 시도 된 바 있다. MBC 의 정형돈은 패션을 통한 도발을 자신의 캐릭터로 차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은 웃음을 위해 패션을 왜곡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만화는 지나치게 사실적이며 현실감 있게 오늘날 십대들을 둘러싼 패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웃음을 유발한다. 실제로 만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다수는 현실 세계에서 ‘패셔니스타’로 불리는 유명인을 노골적으로 연상시킨다. 그 인물을 향한 찬사와 동경의 시선 또한 현실세계의 것을 그대로 재현해 낸 것이다. 그래서 만화 속의 아이들을 보며 웃는 일은 곧, 현실 세계의 아이들을 비웃는 일이기도 하다. 이 만화가 단순한 유머에 그치지 않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공포 만화가 이토 준지의 작풍을 참고한 스타일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대상을 해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화 속 아이들의 패션을 손쉽게 비난하는 일이 거리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의 과장된 겉모습을 지적하고 싶은 욕구를 대체해 주는 것이다.

이 쾌감은 그러나 불쾌하다. 그리고 이 양가적인 감정이야 말로 작가가 의도한 모종의 모순이다. 기안84는 그동안 단편선 작업을 통해 여러 번 십대들의 욕망과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은 그 단편들을 집대성한 결과물이나 다름 없다. 우기명이 패딩 점퍼를 통해 처음 패션의 세계에 진입하려다 실패한 사건은 의 도입부를 연상시키며, 드디어 패션왕으로 한 걸음 내딛은 우기명의 행동은 을 답습한다. 주먹이 아닌 패션으로 승부를 겨룬다는 세계관은 아예 의 것을 가져다 쓴다. 소재와 장면을 가져 온 만큼 감수성과 태도 역시 그대로 이식되었다. 만화는 철저하게 약자의 욕망을 그린다. 우기명이 패션왕에 가까워지면서 그가 얻은 것은 고작 여학생들의 관심과 선배들과의 친분이다. 그들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나 기존의 질서를 파기하려는 시도는 감지되지 않는다. 우기명에게 다른 집단이란 붕괴되어야 할 억압이 아니라, 자신의 입성을 위해 오히려 존재해야만 하는 권력이다. 약자의 판타지란, 그렇게나 소박하고도 절실한 것이다. 그리고 만화는 계속해서 그런 약자의 판타지를 비웃게 만든다.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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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만화는 ‘멋이라는 것이 폭발했다’는 문장으로 ‘간지폭풍’을 예고했던 프롤로그에 비해 점점 주춤거린다. 간신히 잘 나가는 친구들 사이에 끼게 되었지만, 여전히 우기명은 우정을 확신하지 못하고, 그의 앞에는 근육질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당도했다. 결국 패션이란 근본적인 변화를 일궈 내기에는 너무나 얄팍하고 일시적인 무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심지어 패션의 힘으로 주목의 달콤함을 맛 본 우기명은 이제 그 위치를 잃을까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은 간단한 고민이라고 축소하겠지만, 만화는 집요하리만치 구체적으로 그 위기감을 파고든다. 그리고 그 고민을 따라가는 과정은 곧 아이들의 ‘병신스러움’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비웃기만 했던 그들만의 패션이 나름의 생존 방식임을 만화는 거칠지만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작품에서 가장 생동감 있게 꿈틀대는 것은 핏과 포즈로 완성되는 패션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십대의 욕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은 역설적으로 다만 십대만의 이야기로 한정되지 않는다. 우기명의 패션에서 벗어났을 뿐,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그 세계에 묶여 있는 어른들 역시 판타지에 홀려 무거운 가방을 사고, 부담스러운 자동차를 산다. 넥타이를 메지 않은 국회의원, ‘밥집 아줌마처럼 생긴’ 여배우를 공격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연예인의 의상을 공개 재판하듯 베스트와 워스트로 나누고, ‘동안’과 ‘완판’을 칭찬의 수식어로 사용하는 태도 역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우기명과 아이들의 차림새를 비웃는 것으로 자신이 그들과 다른 어른임이 증명 되었다고 생각한다. 가짜 패딩 점퍼 때문에 친구에게 놀림 받은 일을 상품평에 쓴 우기명에게 판매자는 “고객님의 인생은 진짜니까요! 화이팅이에요!”라는 답글을 남겼다. 결국 우기명은 진짜 인생을 살게 될 것인가. 그리고 차마 우기명에게 화이팅을 외칠 수 없는 우리는 각자의 진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화가 연재 된 것은 이제 겨우 10회. 앞으로 어떤 전개가 펼쳐질 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그러나 이 파헤친 우물의 어두운 수면에 비치는 얼굴이 완전한 타인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 만화는 웃긴다. 슬프고 무섭다.

글. 윤희성 nine@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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