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에는 탱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던 고경표는 문득, “뭔가에 홀리는 것처럼” 눈물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어 가벼운 캐릭터와 실제의 자신이 동일시되는 것에 대한 고민, 진지한 연기를 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지금처럼 자신을 좋아해줄 수 있을지에 관한 두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데뷔작 KBS <정글피쉬 2>부터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tvN < SNL코리아 >를 지나 현재 출연 중인tvN <이웃집 꽃미남>까지, 그가 맡았던 수많은 캐릭터에서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얼굴들이 발견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와 눈빛 속에는 “사춘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이 이미 새겨져 있었다. <텐아시아>가 2013년 주목할 만한 마지막 배우로 꼽은 고경표는 자신이 얼마나 더 크고 넓은연기자가 될 수 있는지 아직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반짝반짝 빛나는│④ 고경표 “기왕 이렇게 된 거,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았고, 도무지 길들일 수 없을 것 같다.필요 이상으로힘이 잔뜩 들어가 있거나틀에 박힌연기를 보여주는 법이 없다. 고경표는 본능적인 감각으로 순식간에 캐릭터를 낚아채 버린다. 끈적끈적한 시선과 말투로 퀴즈를 풀던 게이 모델을 비롯해엄마접근경보기 ‘맘마캡스’를 켜두고 ‘야동’을 감상하는 남학생, 겨드랑이가 땀으로 축축하게 다 젖은 채 반사판을 들고 서 있던스태프 등 < SNL 코리아 > 속 그의 모습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여자 친구의 누드 사진을 휴대폰으로 퍼뜨리고 같은 반 친구에게 눈을 부라리던 데뷔작 <정글피쉬 2>의 일진 봉일태, 누나에게 매일 얻어맞던 MBC <스탠바이>의 어수룩한 남자아이 경표처럼 긴 호흡이 필요한 때에도 고경표는 미끈하게 다듬어지지 않아서 더욱 시선을 끌었다. 그건 아마 대본에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을 정도로“연기할 때 많은 것을 재지 않”는다는 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천재적인 실력을 지닌 웹툰 작가의 문하생이자, 바람기 다분한 남자 동훈으로 살고 있는 <이웃집 꽃미남>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것들을 짜임새 있게 준비해갔을 때 틀려버리면 대처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그래서 경우의 수를 많이 생각하고 현장에 가는 거죠. 예를 들어 동훈에게 맞는 제스처를 두세 가지 정도 준비했다가, 촬영에 들어갔을 때 딱 맞는 것들을 써먹는 식이에요. 대사도 외워가되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하는 편이고요.” 마음 가는대로, 편하게 연기하는 것이라고 짐작해선 안 된다. 작품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 다른 사람들과의 조화까지도 두루 살피는 눈이 있어야만 유효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걸 장진 감독님께서 가르쳐주셨어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연기를 하는 거니까 나 혼자 살겠다고 마음대로 하지 말고, 약속을 지켜야하는 거라고요.” 고경표가 < SNL 코리아 >를 통해 진짜로체득한 것은 남다른 코미디 감각보다 배우라는 직업이 가진의미였다.

“요즘은 짐 캐리에 대해공부해보려고 해요”

반짝반짝 빛나는│④ 고경표 “기왕 이렇게 된 거,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현재를 “고경표라는 사람이 좀 많이 작아져 있는 상태”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연기를 향해 점점 더 커져가는 열망과 캐릭터로 인해 자신을“밝고 가벼운” 사람으로만 보는 인식 사이에서 갈피를 잡는 일이 그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눅 들고 소심해질 때도 있었지만, 고경표는 마침내 스스로 힌트를 구해냈다. “원래 히스 레저나 조셉 고든 래빗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두 사람을 모토로 삼기에는 제가 조금 다른 길로 지나온 것 같았어요. 요즘은 짐 캐리에 대해공부해보려고 해요. 정말 희극적인 사람인데, 정극에서도 완벽한 연기를 해내잖아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던 남자아이는그저 그렇게철이 드는 대신 새로운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더불어 아쉽게 놓친 역할에 대해 “아직은 때가 아니었나봐요”라고 담담하게 고백할 만큼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는 일단 저 멀리 밀쳐둔다. 어쨌든 배우로서 사람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고, 때로는 배반하는 것만이 고경표에게 기쁨을 주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의 성장기를 계속해서관찰할 수 있게 될 것임을 안다.“남들과 다른 시작”을한데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시키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배우는 흔치 않기에 그 자체로 지켜볼 가치가 있다.다행히도 이 흥미로운 이야기가 기록되기 시작한시각은오래 지나지않았다.“데뷔했을 때가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어느 정도 알아봐줄 때라야 발을딛었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끝나면 안 되겠죠. 사람들이 더 많이 알아봐주시고, 더 큰 역할을 맡아야 할 텐데 지금은 그 이전의 준비 단계인 것 같아요. 무릎을 90도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상황인 거죠.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느냐의 시기예요.” 누구나 고경표의 미래를 예감할 순 있지만, 아무도 다음을 예상할 수는 없다. 그저 어느 순간, 지루하게 매만져지지 않은 채 불쑥 나타난 그의 모습에 또 다시 속수무책으로 놀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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