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언 “삶과 음악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숙제”
이이언의 음악은 늘 낯설다. 몽롱한 선율에 우울을 노래했던 밴드 MOT의 음악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감성이었고, 솔로 1집 앨범 < Guilty-Free >는 디지털을 전면에 내세우며 각종 노이즈까지 음악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지난 12월 26일 발매된 < Realize > 역시 친절하지 않다. 이 앨범은첫 솔로 앨범에선상상하기 어려웠던 ‘어쿠스틱’을 표방할뿐더러, 그것마저 기존의 어쿠스틱과 같은 소박한 사운드와는 거리가 멀다.다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건, 이이언은 불균질한 것들의 조화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균형을 찾아내기 위해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매번 낯설지언정, 위화감이라곤 없는 이이언을 만났다. 그의 짧은 침묵과 망설임,작은웃음 모두 대화의 일부였다. 마치 그의 음악이수없이 쪼개질 수 있는소리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Q. 지난해 2월 솔로 1집 앨범 < Guilty-Free >를 발매한 지 열 달 만에 어쿠스틱 앨범 < Realize >를 냈다. 솔로 앨범을발매하는 데 약 4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번에는 텀이 굉장히 짧다.

이이언: 솔로 1집 작업을 하면서 너무 힘들었다. 4년 동안 앨범 하나를 붙잡고 계속 작업하다 보니, 그 시간 동안 스스로 소모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정작 내 삶은 함몰된다는 느낌이랄까. 곡은 이미 2년 전에 다 나와있었는데, 다시 마음에 들 때까지 편곡을 하느라 2년을 더 보냈던 거다. 길게 보고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작업 스타일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았다. 텀을 조금 더 짧게 가져가되, 스스로를 쥐어짜 내듯 작업하는 게 아니라 약간 느긋하게. 일종의 루틴(routine) 개념으로. 그런 점에서 이번 앨범은 테스트 드라이브라는 의미도 있다.



Q. 그래서인지 최초 발매 예정일로부터 3개월밖에 지연되지 않는 쾌거를 달성했다던데. (웃음)

이이언: 지금까지 늘 마감을 어기면서 살아왔는데, 그나마 이번에는 최단 기간 연장 기록을 세웠다. 애초에 발매 목표를 지난해 9월 말로 잡았을 땐지킬 수 있을 거라고 50% 정도는 믿고 있었건만. (웃음)

“리메이크는 나와 청자의 게임”

이이언 “삶과 음악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숙제”

이이언 “삶과 음악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숙제”
Q. 전자 음악에서 벗어나 어쿠스틱으로 바꾼 것도 본인을 소모하는 작업 방식에 변화를 주려는 방편이었나.

이이언: 분명 그런 측면도 있다. MOT 앨범이나 솔로 1집 때는 대부분 컴퓨터로 혼자 작업하다 보니 내가 짊어지는 작업량이 막중했고, 이번에는 세션들과좀 분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앨범의 기획 의도 때문이었다.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되, 이이언의 음악이라는 일관성을 보여주자고 생각했다. 방법론을 바꿔도 본질이나 핵심이 되는 부분들은 여전히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거라고 여겼다.



Q. 확실히 < Realize >는 어쿠스틱이라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느낌이 없기도 했고, 지금껏 이이언이 해온 음악의 기본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신기했다.

이이언: 어쿠스틱은 심플하고 미니멀한 것이 좋다고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정형화된 선입견이기도 하지 않나. 모두가‘Less’라고 한다면 오히려‘More’가 더 좋은 게 될 수도 있는 거다. 그래서 일부러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드럼의 편성을 앨범의 여섯 개 트랙 전부에서 고정적으로 유지했다. 이 앨범엔 재지(jazzy)한 느낌이 많이 묻어있는데, 사실 재즈에서도 기타와 피아노를 함께 쓰는 경우는 드물다. 굳이 두 악기를 같이 쓰려고 한 건 나름대로 내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빼곡한 느낌 안에서 서로 부딪칠 것 같은 악기들을 잘 배치하고 조율해서 아귀가 들어맞는 느낌으로 가는.



Q. Daft Punk의 ‘Harder Better Faster Stronger’리메이크한 4번 트랙 후반부에서 그 부분이 확실하게 드러나더라. 각 악기가 최대치의 소리를 내고 있는데 그게 조화롭게 들린다. 그래서 왜 이 곡을 어쿠스틱 버전으로 리메이크해야겠다고 생각한 건지 더 궁금했다.

이이언: 원곡이 내가 해오던 음악과는 거리가 먼 편이라, 좀 더 도전하는 매력이 있었다. 리메이크를할 땐늘 이런 생각을 한다. 어떤 곡이가진 본질이 있는데, 그 곡을 다른 아티스트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본질도 새롭게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방법론이 대비되면서 내가가진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더 두드러지게 되기도 하고.



Q. 이를테면 곡의 가장 기본적인 뼈대만 남긴다는 건가.

이이언: 쉽게 말해 원곡이 있는 경우, 멜로디와 코드, 가사 등 청자들이 기본적으로 기대하는것이 있다. 리메이크는 나와 청자들이 공통으로알고 있는룰을 갖고서 게임을 하는 거다. 그들의 기대를 내가 얼마나 만족시키고 배반하는지 말이다. 그런 유희적인 측면 때문에 리메이크 작업은 항상 즐겁게 하고 있는데, 다만 이번 리메이크에서 세션들은 머리를 쥐어뜯더라. 워낙 박자가 빠르고 음을 하나하나 촘촘하게 메우는 편곡이어서 세션들에게 자비가 없는 것이긴 했다. (웃음) 그런 부분의 악보를 줄 땐 보통 “여긴 아마 팔이 세개거나 그러지 않으면 힘들테니, 적당히 가능한 버전으로 해줘”라고 하는데 다들 어떻게든 해낸다. 그러니 내가 요구하는 한계도 조금씩 높아지는 것 같다. (웃음)

Q. 그게 이이언이 음악의 균형을 만들어내는 방식일 텐데, 좋은 균형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답을생각하고 있는걸까.

이이언: 그건 아니다. 단지 균형에 대한 감각을 계속 배워간달까.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알고 있었던 것을 조금씩 더 넓혀간다는 의미에 가까울 것 같다. 균형이라는 건 사실 음악 작업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 있는 부분이고, 그래서 음악을 하기 전에도 균형을 파악하는 일을 좋아했다. 예컨대, 대화에서도 농담과 진지함 사이의 균형을 찾게 되는 식으로 말이다.



Q. 뮤지션과 생활인의 삶 사이에서의 균형은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는 것 같나.

이이언: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땐 아직 좀 모자라지만, 예전의 나와 비교하면 현재는 상당히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솔로 첫 앨범을 발표한 후 인터뷰에서 ‘음악에 대한 강박을 덜고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겠다’고 했는데, 말을 하면서도 ‘이게 가능할까?’라는 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순조로운 것 같다.이번 작업을 하면서 조금 더 느긋해져도 되겠다는 걸 느낀 거다. 기본적으론 세션들의 재량에 맡기고 의사소통을 통해 조율해가는 방식을 쓴건데, 내가 하나하나 꼼꼼하게 한 것과는 조금 달라도 괜찮은 결과물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나름대로 의미있고 재미있는 작업이 아닌가 싶다.

Q. 하지만 음악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기존의 방식이 한편으로는 정체성이었을 수도 있을 텐데.

이이언: 그게 과제인 것 같다. 삶의 질과 음악 작업 결과물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희생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바꿔가는 것. 지금까지는 내가 축적해놓은 작업 방식과 스킬, 노하우, 개발한 악기 프로그램들을 쓰지 않고 다 뒤집으면서 굳이 더 어려운 길로 갔다. 이젠 내가 갖고 있고, 잘해왔던 부분들을 충분히 살리면서 작업을 조율하면 고통을 좀 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막상 해보면 또 어떨진 모르겠다. ‘역시 새로운 게 필요해!’ 이럴 수도 있겠지. (웃음)

“사실 성격은 까칠하진 못한 편이다”

이이언 “삶과 음악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숙제”
Q. 흔히 당신의 음악에 내려지는 ‘실험적’이라는 평가도 그 때문인 것 같은데, 창작자로서 그 표현을 들었을 땐 어떤 생각이 드나. 기본적으론 찬사의 의미가 있지만, 한편으론 ‘미완’이라는인상을받을 때나오는말이기도 하다.

이이언: 많이 듣기도 하고, 나도 내 음악을 설명하다 보면 종종 쓰는 수식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나는 실험 중인 작품을 사람들 앞에 내놓진 않는다. 실험은 혼자 하고, 성공했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선보이는 거다. 그러다보니 발매 후 내 음반을 들을 때도 후회가 거의 없다. 수정할 부분이 있었다면 작업 단계에서 이미 뒤엎는 과정을 다 거치니까. 그래도 굳이 그것까지 까칠하게 “잠깐만요. 실험적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고요” 이러긴 뭐하고 (웃음), 그 정도면 적당히 뜻은 통한다고 생각한다.



Q. 완벽주의 성향이 강해서 그런 부분에도 예민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아닌가 보다.

이이언: 작업할 때만 예민해진다. 사람들한테도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편이어서, MOT 때는 다른 멤버들이랑 합주를 하면 뭔가 좀 아닌 것 같아도 어떻게 말해야 상처가 되지 않을까 고민하느라 힘들었다.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MOT, 혹은 이이언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하는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싫은 소리를 할지언정 결과물이 희생되게 놔둘 순 없겠다고 생각했다. 작업하는 동안은 조금 예민하고 냉정해져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거다. 그걸 빼면 사실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까칠하진 못한 편이다.



Q. 왜 그런 걸까.

이이언: 어릴 때부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모범적인 아이로 자라도록교육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항상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을 앞세우기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라고 배웠다. 갖고 싶은 걸 요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가령 자동연필깎기를 갖고 싶었지만 중고연필깎기를 받고도 아무 말 못했다거나,인라인스케이트 대신 피겨스케이트를 받고도 그냥 탔다거나. (웃음) 어른이 되어 돈을 벌게 된 후에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과감히 사게 됐다. 다만 10년 전엔 장비나 프로그램 욕심도 많았는데, 요 몇 년 사이에는 새로 나오는 것들을 무조건 사기보다 일단 모니터를한다. ‘아니, 세상에! 이런 놀라운 것이 개발됐다니. 상상도 못했던 것이 나왔군’ 하는 것들을 체크해뒀다가 사용하는 거다.

Q. 네이버에 썼던 앨범 작업기를 보니 사람들이 많이 쓰지 않는 음악 프로그램도 사용한다고 하던데.

이이언: 전세계적으로 사용자가 아주 많지 않은 프로그램을 쓰는데, 종종 버그가 생긴다. 그럴 때 내가 버그 리포트를 하지 않으면 영영 이 상태로 있겠다 싶어서 일일이 영작을 한 다음 보낸다. (웃음) 작업의 흐름이 끊기긴 하지만, 어쨌든 나도 일을 하려면 그 문제가 고쳐져야 하는 상황이니까.접어놓고 있는다고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Q. 이걸 옆으로 치워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성격이 안 되는 거다. (웃음)

이이언: 그게 잘 안 된다. 무모하게 계속 붙들고 있는다. 예를 들어 시험을 칠 때 어려운 문제랑 쉬운 문제들이 섞여 있으면 쉬운 것부터 풀어야 하는데, 어려운 걸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학교생활이 늘 힘들었는데, 대학원(한국예술종합학교 뮤직테크놀러지 과정)생활은 정말 재미있게 했다. 공부가 이렇게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달까.

Q. 음악적인 부분에서는 어떤 영향을 받은 것 같나.

이이언: 솔로 1집에서 디지털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던게 대학원 덕분이었다. 시야가 확장됐던 거지. MOT 앨범을 작업할 때는 아날로그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심했다. 심지어 디지털로 작업을 한 소리조차 아날로그의 느낌으로 만드는 데 주력했는데 이제는 좀 달라진 거다. 각각의 장점과 아름다움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MOT의 앨범을 작업한다면 다시 아날로그적인 색채를 내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그건 스타일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Q. 그렇다면 MOT의 새 앨범은 1, 2집의 연장 선상에있을 거라고 봐도 될까.

이이언: 맞다. 이이언이라는 이름으로 앨범을 따로 낸 것도, MOT이 갖고 있던 기존의 스타일과 정체성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화라는 이름으로 갑자기 그 부분을 버리는 건 좋지 않은 것 같다.아마 MOT 3집은 MOT의 정서를 일관성 있게 이어가는 작업이 될 거다. < Realize >를 만들었던 경험을 토대로,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조금 더 개입하고 어떤 부분은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맞춰가는 식으로 나름의 작업 솔루션을 만들어나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완전히 위임해서 ‘마음대로 만들어주세요’ 하는 것보단 여전히 꼬치꼬치 간섭하게 될 것 같긴 한데, 두 방식의 장점을 어떻게든전부 가져갈 수 있는 방향을 고안해나가는 과정일거라고 본다.



Q. 앨범은 언제쯤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나. (웃음)

이이언: 이르면 올해 말? 사실…. 올해 말엔 좀 힘들 것 같다.냉정하게 말하자면내년이겠지만, 올해 말이라고 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하는 말이다. (웃음) 그래야 작업이 지연돼도 내년 초쯤엔 완성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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