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선│내게 힘을 주는 영화들
이 참한 아가씨의 어디에서 이런 에너지가 나오는 것일까? ‘박하선 수난기’라 할 만한 영화 <음치클리닉>에서 그녀는 몸개그도, 망가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박하선은 백수에 짝사랑만 10년째인 동주가 되기 위해 지하철에서 침을 흘리며 졸고, 술 먹고 검은 마스카라 눈물을 흘리며, 한 번 들으면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의 음치가 되어 노래를 부른다. MBC <동이>의 기품 있고 온화한 인현왕후나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백구처럼 사랑스러운 박 선생에게 익숙한 이들에게는 생경할 만큼 낯선 모습이다. “저는 이게 더 편해요. 연기할 게 없어요. (웃음) 음치 연기도 원래 노래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 쉬웠구요. 오히려 <동이> 할 때가 힘들었죠. 제가 이렇게 말이 빠른데 말도 천천히 해야 했고, 사랑하는 남자도 다른 여자한테 보내줘야 했고, 그렇게 구애를 했는데도 자기 싫다는 남자를 잊지 못하고… 정말 답답하지 않나요? 저는 오히려 동주랑 비슷해요. 술 취하면 울기도 하고 집에선 동생을 패주기도 하구요. (웃음)”



실제로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부지런히 생각한 바를 말로 옮기고, 작은 농담에도 시원스럽게 웃는 박하선의 모습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게임에 한 번 빠지면 밤새도록 할 만큼 승부근성이 강하고, 취미도 빨리 완성물이 나오는 요리나 그때그때 결과물이 나오는 그릇 만들기일 정도로 빠르고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박하선에게 연기만은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르다. “성격이 급하고 금방 질려하는 편이에요. 기타도 조금 배우다 말고, 운동도 이거 조금 하다 말고 또 저거 기웃거리고. 정말 꾸준히 하는 건 연기밖에 없는 것 같아요. 거기다 승부근성 때문에 스스로한테 잘 만족을 하지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연기할 때 괴롭기도 하지만 연기만큼 절 집중하게 만드는 게 없네요.” 그래서일까, 연기로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 역시 연기다. 탐나는 캐릭터에 자신을 대입시켜보기도 하고, 선배들의 연기에 감탄도 하면서 힘든 순간들을 이겨내는 박하선이 추천하는 5편의 영화들이다.

박하선│내게 힘을 주는 영화들


1. <댄싱퀸>
2012년 | 이석훈
“사실 좋아하는 장르는 <공감>이나 <시월애> 같은 멜로 영화예요. 코미디 영화를 많이 좋아하진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사는 게 힘들어지면서 좋은 것만 보고 싶더라구요. (웃음) <댄싱퀸>은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때 보고 힘을 많이 얻었어요.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쳐있을 때였는데, “밑바닥부터 올라온 사람에게는 감동이 있다”는 대사에 공감도 많이 되고 힘도 됐어요. 아, 지금은 힘들지만 언젠가는 감동을 줄 수 있겠구나 하면서 힘을 냈어요.”



종종 적역을 넘어, 한 배우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 영화들이 있다. <댄싱퀸>은 20년에 이르는 세월동안 흔들리지 않는 댄싱퀸의 왕좌를 지키고 있는 엄정화에게서 출발했다. ‘신촌의 마돈나’였지만 결혼해서 식구들 뒷바라지 하느라 무대를 잊고 있던 주부 엄정화는 이름마저 그녀의 실명을 내세웠다. 늘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온 엔터테이너로서의 엄정화를 종합선물세트처럼 만끽할 수 있는 영화.



박하선│내게 힘을 주는 영화들
2. <미술관 옆 동물원> (Art Museum By The Zoo)
1998년 | 이정향
“<음치클리닉> 시나리오를 받고, 촬영을 하고, 영화 개봉을 기다리면서 <미술관 옆 동물원> 생각을 많이 했어요. 거기서 심은하 선배님께서 연기하신 춘희라는 캐릭터를 참 좋아했어요. 수수하고 털털한데 사랑스럽고, 하나도 꾸미지 않는데도 참 예뻤어요. 욕심일 수도 있지만 <음치클리닉>의 동주라는 인물이 그렇게 보이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 시절 이성재는 풋풋했고, 심은하는 아름다웠다. 신선한 얼굴이었던 이성재는 까칠하고 따지기 좋아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로맨틱 코미디의 남자 주인공으로 적역이었고, 화장기 없고 수수한 모습의 심은하는 짝사랑으로 속앓이를 하는 여주인공으로 변신했다. 춘희와 철수가 함께 써내려간 시나리오 속 사랑과 현실에서 두 사람의 감정이 포개어지면서 생기는 작은 변화들을 멜로의 재료로 살뜰히 삼았다.



박하선│내게 힘을 주는 영화들
3. <그을린 사랑> (Incendies)
2011년 | 드니 빌뇌브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 기억에 가장 많이 남은 영화예요. 힘든 장면도 있긴 한데 다보고 나서 오랫동안 남는 메시지가 있어서 좋았어요. 보는 내내 힘들어 죽겠다는 마음보다는 물 흐르듯이 감정이 움직이더라구요. 보고 나서도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구요. 같이 <음치클리닉>을 찍은 김해숙 선배님도 <그을린 사랑>을 굉장히 좋게 보셨다고 하셨는데 좋은 영화는 세대를 아우르는 것 같아요.”



이토록 가혹한 여자의 일생이 있을까.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아이를 강제로 빼앗겼으며 독방에서 15년을 버텨야만 했다. 고문당하는 와중에 강간으로 임신을 했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을 키워야했다. 죽지 않고 살아낸 것만으로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이 여자의 일생을 따라가다 보면 용서와 속죄, 삶의 비밀들과 마주하게 된다.



박하선│내게 힘을 주는 영화들
4. <연애소설> (Lover`s Concerto)
2002년 | 이한
“개인적인 로망인데요, <연애소설> 같은 영화를 꼭 해보고 싶어요. 여배우라면 누구나 손예진 선배님께서 하신 역할을 탐낼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그 역할을 좋아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까 이은주 선배님 역할도 탐나더라구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매력이 있잖아요. 더 나이 들기 전에 이런 청춘멜로 영화를 꼭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저도 잘 할 수 있는데… 시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웃음)”



스무 살, 첫사랑, 그리고 엇갈림. 아직 어려서 어찌할 줄 모르는 감정들은 아직 어려서 더 선명하다. 수인(손예진)과 경희(이은주), 지환(차태현)의 그 시절은 삼각관계로 단순히 재단하기에는 아쉽다. 사랑과 우정, 혹은 그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감정들은 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실체를 알 수 있을 만큼 소중했기에.



박하선│내게 힘을 주는 영화들
5. <천녀유혼> (A Chinese Ghost Story)
1987년 | 정소동
“저 액션영화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천녀유혼>은 사실 여성적인 액션이긴 한데, 제가 처음 본 액션영화라 골랐어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앤 해서웨이처럼 제대로 된 정통액션도 좋지만요. (웃음) 액션만 할 수 있다면 감초처럼 작게 나오는 역할이라도 상관없어요. 평소에도 운동 좋아하고, 많이들 그렇게 안 보시니까 더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몸 쓰는 것도 자신 있구요.”



<영웅본색>이 닮고 싶은 남성들의 우상, 주윤발을 탄생시켰다면 <천녀유혼>은 갖고 싶은 남성들의 우상, 왕조현을 탄생시켰다. 80년대 국내 책받침 시장을 소피 마르소와 양분했던 왕조현이 홀릴 만큼 아름다운 귀신 소천으로, 청순미가 여배우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던 장국영이 어리바리한 행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맨스를 펼친다.

박하선│내게 힘을 주는 영화들


“동주는 같은 여자로서 많이 공감한 역이라 여성 관객들의 사랑을 다시 되찾고 싶었어요. (웃음) <동이> 때만 해도 여자 분들이 꽤 좋아해주셨는데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을 하면서 남자 팬들은 많이 생긴 반면 여자 팬들이 많이 떨어져나가서 슬펐어요. 예전에는 나이 있으신 어머님들만 나를 좋아하시나 하고 서운했는데 이제는 여성분들이 전처럼 좋아해주지 않으시니까 그게 더 서운하더라구요. 털털하고 망가지는 <음치클리닉>의 동주를 통해 다시 여자 분들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요. (웃음)” <음치클리닉>으로 첫 코미디 영화에 도전한 박하선의 목표는 의외로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매 순간 자신의 설정한 작은 미션들을 클리어 해나가면서 지금 이 순간까지 온 박하선의 다음 미션은 무엇일까? 씩씩한 그녀라면 그 미션이 멜로영화의 여주인공이든 액션히로인이든 반드시 클리어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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