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작은 발걸음이 큰 변화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지난 2010년어렵사리 부활된 이후 올해로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한KBS <드라마 스페셜> 단막 시리즈(이하 드라마 스페셜)는 지난 6월 3일에 시작해 12월 23일에 종영하기까지 인상적인 발자국을 이곳저곳에 남겼다. 새로운 배우의 얼굴을 전하고 이미 알고 있던 배우의 발전을 함께 했으며 신인 작가와 감독이 마음껏 재능을 선보일 수 있는 장이 되어 준 것이다. 물론 <습지생태보고서>부터 <또 한 번의 웨딩>까지, 스물 네 편 모두가 결점없는100점짜리 작품은 아니지만드라마 스페셜이보여준 가능성은 단막극이 아니면 쉽게 만날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연말에 쏟아지는 굵직한 시상식 속에서 주인공이 되기는 어렵지만 다시 보고 찾아 볼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모아 작은 상을 드리는이유는 그래서다.이 얼굴들, 이 이름들은 물론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한 모든 제작진과 배우들의 노력이큰 변화를 이끄는 발걸음이 되길, 그리고 내년에도 또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

2012 드라마 스페셜│작지만 깊은 발자국에 이 상을 드립니다
신인남우 / 신인여우상: 엄태구(<아트>) / 오인혜(<환향-쥐불놀이>)

후보: 윤박(<태권, 도를 아십니까>) / 김수연(<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일요일 밤 11시 45분. 웬만해선 시청자의 눈길을끌기 어려운 시간에 엄태구와 오인혜는 자신들의 낯선 얼굴을기억해야할 이름으로알렸다. 엄태구에겐 페이크 다큐라는 무정형의 판과 겨루듯 ‘찌질’하지만 귀여운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굴리는 유연함과틀에 박히지 않은 표정을 보여준 힘이 있었다. 자의식과 불안함 사이에서 밉지 않은 허세를 부리는 독립영화 감독 준감독은 다소 거친 느낌을 주던 엄태구의 첫인상 위에새로운 표정을 주었다. 귀에 화살이 박힌 조선시대의 환향인 보옥을 연기한 오인혜도 신선했다.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어가는 보옥의 눈물이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파격적인 의상으로 기억되던 오인혜의 것이라는 사실을 검색해보지 않는 이상 모를 만큼 의외였고,꽤나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2012 드라마 스페셜│작지만 깊은 발자국에 이 상을 드립니다

남우주연 / 여우주연상: 남궁민(<스틸사진>) / 김예원(<내 아내 네이트리의 첫사랑>)

후보: 성준(<습지생태보고서>), 이종석(<내가 가장 예뻤을 때>), 정우(<칠성호>), 임지규(<태권, 도를 아십니까>), 이문식(<상권이>) / 차수연(<리메모리>), 박신혜(<걱정마세요, 귀신입니다>), 조안(<오월의 멜로>)

단막극에서 실험은 발전을 위한 첫 단추다. 남궁민과 김예원은 그 단추를 끼워 새로운 주연의 옷을 입었다. 대학의 정교수 자리를 놓고 자신보다 ‘스펙’ 좋은 첫사랑에게 날선 소리를 지르는 시간강사와 남궁민의 그윽한 목소리는 공존할 수 없을 듯 했지만그는 멜로의 얼굴로 현실적인 남자의 지친 표정을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주연으로서 자신의 새로운 영역을 확보했다.설익은소년의 표정으로아련한 멜로를 보여준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이종석 역시 언급해야 할 이름이다. 유독 남자 캐릭터가 돋보였던2012 드라마스페셜에서 이주 여성 네이트리를 연기한 김예원은 주연을 맡은 게 우연이 아님을 보여줬다. 네이트리가 사랑스러웠던 건 어설픈 한국어 발음을 흉내내서가 아니라 캐릭터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본기가 김예원에게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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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조연 / 여우조연상: 이재원(<습지생태보고서>) / 박효주(<칠성호>)

후보: 김희원(<태권, 도를 아십니까>) / 김예원(<아트>)

이재원과 박효주를 감초라는 흔한 말로 설명하기는 옳지 않다. 짧게 등장했지만 대본이나 연출에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존재감을 발휘했기 때문이다.온갖 허세를다 부리지만 친구들의 좁은 자취방에 슬그머니 들어온 녹용은 원작의 사슴이드라마에선 사람이 됐듯 <습지생태보고서>에서는 배우 이재원의 매력으로 재탄생됐다. JTBC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의 능청스러운 변호사 전상진을 만나게 한 계기가 되기에도 충분할 정도였다. 전작 SBS <추적자 THE CHASER>의 털털한 조 형사를 지우고 조선족 최재화로 돌아온 박효주 또한 목소리만으로 음침한 칠성호 세트에 버금가는공포를 자아내는 ‘포스’를 보여주었다.



2012 드라마 스페셜│작지만 깊은 발자국에 이 상을 드립니다
작가상: 유보라 작가(<태권, 도를 아십니까>)

후보: 권기영 작가(<친구 중에 범인이 있다>), 최서현 작가(<환향-쥐불놀이>), 강지희 작가(<복마전>), 백혜정 작가(<아빠가 간다>, <유리 감옥>, <칼잡이 이발사>), 한상운 작가(<습지생태보고서>, <아트>)

‘루저’들의 세계는 누구나 접근할 순 있지만 아무나 완성할 순 없는 곳이다. 하지만 <태권, 도를 아십니까>는 비루하다 눈총 받는 그 세계를 즐거운 판타지로 완성했다. 서로 때리는 게 아니라 피하는 것으로 갈등을 해결한다는 유보라 작가의 세계관은 비현실적일지언정 허투루 표현되지는 않았다.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처럼 다시 찾기 힘든 순수함이 소박한 캐릭터와 쉬운 구조 속에서 아름다운 동화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다소 익숙한전개가 아쉬었지만 문학적 감수성을 그려낸 <저어새, 날아가다>와 하층 계급의 불운한 하룻밤을 통해 우리 모두의 발밑이 얼마나 연약하고 불안한 곳인지 보여준 <상권이> 역시 유보라 작가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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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상: 한상운 작가(<습지생태보고서>)

시작이 반이라면, 한상운 작가가 만화가 최규석의 <습지생태보고서>를 각색한 것이야말로 탁월한 선택이다. 2005년에 발표된만화 속에 담겼던 축축한 현실이 바뀌기는커녕 버티는 것조차 힘든 청춘들의 자화상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이다.한상운 작가는 등록금을 위한 규석(성준)의 고군분투와 현실과 양립할 수 없는 녹록치 않은 연애가 중심이 된 서사의 큰 줄기와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냄비받침이 되고 만화 속 녹용이 진짜 사람으로 나타난 디테일의 조화를 통해원작의 시니컬한 유머 위에 재기 넘치는 ‘웃픈’ 청춘가를 입혔다. 페이크 다큐 <아트>로 보여준 신선한 발상까지 더해한상운 작가의 존재는작가 개인의 성취를 넘어서 드라마 스페셜 전체로서도 의미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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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감독상: 김진우 감독(<칠성호>, <상권이>)
후보: 이은진 감독(<걱정마세요, 귀신입니다>, <기적 같은 기적>), 백상훈 감독(<내가 가장 예뻤을 때>, <오월의 멜로>)

신인 감독들의 ‘입봉’ 기회인 단막극을 통해 올해도 새로운 이름들이 시청자와 만났다. 밑바닥으로 떨어진 인간의 불우한 처지를 애써 포장하지도 과장하지도 않고 묵묵히 따라가며 담아낸 <칠성호>와 <상권이>의 김진우 감독은 특히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서로를 믿지 못한 채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칠성호 사람들의 광기는 김진우 감독의 우직한 카메라 앞에서 조용히 증폭됐다. 담담하게 그려 더 처절한 연출은 엄마와 아내, 하나 남은 친구로부터 버려진 남자를 통해 불운이 일상이 된 하층민의 삶을 보여준 <상권이>에서도 유효했다. 점점 드라마에서 감독의 스타일을 찾아보기 힘든 요즘이기에 세상의 후미진 곳을 향한 김진우 감독의 날카로운 시선은 반가운 발견이다.



2012 드라마 스페셜│작지만 깊은 발자국에 이 상을 드립니다


감독상: 박현석 감독(<아트>)

후보: 이원익 감독(<환향-쥐불놀이>, <불이문>), 김영균 감독(<태권, 도를 아십니까>, <리메모리>)

웃기지만 결코 우습지 않다는 건 잘 만든 페이크 다큐만이 얻을 수 있는 성취다. 박현석 감독의 <아트>가 바로 그런 경우다.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에 초청됐지만 정작 유료관객은 32명뿐이었던 비운의 걸작 <아지트>의 마지막 필름이 발견되며 시작한 <아트>는 실소와 폭소 속에 창작자의 고민이 삐죽 하고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내미는 수작이다. 박현석 감독은 극 중 <아지트>의 코멘터리 격인 다큐멘터리를 찍는 상황을 바깥에서 그대로 담되 실제 영화평론가들의 진지한 모습을 담는 등 적절히 유머를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연출했다. 여기에 준감독(엄태구)을 통해 세상에 무언가를 만들어 내놓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모든 이들을 위로하는 박현석 감독의 시선은 <아트>가 비단 형식적 새로움만으로 회자될 작품이 아님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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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상: <칠성호>

현재 단막극의 제작 환경은 장르물을 만들기에 녹록하지 않다. 이번 드라마 스페셜은 이전 시즌에 비해 다양한 장르적 시도가 돋보였지만 다소 평이한 반전 장치나 배우들의 연기, 음향에 기댄 부분이 많았던 것 역시 턱없이 부족한 제작비와 빠듯한 제작 일정 때문이 크다. 하지만 밀항선의 살인 사건을 다룬 <칠성호>는 실제 밀항선을 연상케 하는 세트의 힘으로 작품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살인 사건의 진실보다 다른 게 중요한 갑판장 한만호(김뢰하)와 반대로 살인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려는 조선족 밀항자 박용대(정우)의 심리 게임은 칠성호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은유적으로 표현됐는데 이 때 음산한 색감과 분위기로 만들어진 세트가 모두를 잡아먹는 현실이라는 작품의 정서를 묵직하게 받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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