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제왕>, 현실은 어렵고 이상은 먼 지금 이곳의 몰락
영화감독이자 각본가인 장항준이 쓴 SBS <드라마의 제왕>은 전작 SBS <싸인>과 같은 인물 구도 안에서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싸인>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아웃사이더 윤지훈(박신양)과 조직의 수장 이명한(전광렬)이, <드라마의 제왕>에는 신인 작가 이고은과 드라마 <경성의 아침>을 제작하는 앤서니 김(김명민)이 있다. 하지만 <싸인>이 진실만을 추구하는 윤지훈을 중심에 놓은 것과 달리, <드라마의 제왕>은 드라마를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앤서니 김의 이야기다. 그는 거대 제작사인 제국엔터테인먼트 시절 회장(박근형)의 지시로 로비자금을 마련했고, 작가를 속여 무리한 PPL을 집어넣었다.

의문사의 진실을 추적하는 윤지훈은 자신을 희생할 각오와 용기만 있다면 진실을 위해 걸어갈 수 있었다. 반면 앤서니 김은 어린 시절 자신을 위로했던 드라마 때문에 제작자가 됐지만, 제작에 필요한 자본과 편성을 얻어내기 위해 권모술수를 쓴다. 제작비를 대려면 무리한 일도 벌여야 하고, 제작진을 가혹하게 몰아붙이기도 해야 한다. 범죄에 대한 진실은 하나지만 좋은 드라마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아웃사이더는 자신의 길만 추구하지만 리더는 모든 상황과 입장을 고려한다. <드라마의 제왕>은 <싸인>보다 일상적인 배경에서 더 복잡하고 답 없는 문제를 푼다.

<드라마의 제왕>은 승부처를 놓쳤다

은 윤지훈이 만든 세상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src="https://img.hankyung.com/photo/202001/AS10AwBb6LzFXstEoAal.jpg" width="555" height="185" align="top" border="0" />

<드라마의 제왕>이 초반에 보여준 매력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수단을 가리지 않던 앤서니 김의 제작 방식은 그를 몰락케 했고, 재기의 희망인 <경성의 아침>을 쓴 이고은은 시청자들을 행복하게 하려면 방법도 옳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앤서니 김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국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도 마다한 이고은을 보며 자기 뜻대로 끌고 가던 <경성의 아침>을 원안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바꾼다. 이고은이 앤서니 김을 통해 드라마의 현실을 알고, 보다 객관적인 눈으로 대본을 써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드라마의 제왕>이 가장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이상은 현실을 알고, 현실은 이상을 잊지 않는다. 그리하여, 더 나은 현실이 시작된다.

그러나 앤서니 김은 <경성의 아침> 편성을 위해 드라마국장(윤주상)에게 뇌물을 주고, 새 국장인 남운형(권해효)에게 방송사 윗선을 통해 압력을 가한다. 또한 제작비가 필요하자 제국엔터테인먼트 회장의 돈을 사기치듯 가져온다. 이 지점에서 <드라마의 제왕>은 <경성의 아침>의 제작 현실과 겹친다. <경성의 아침>이 흥행을 위해 멜로가 필요하듯 <드라마의 제왕>은 재미를 위해 앤서니 김을 계속 위기로 몰아넣고, 때론 옳지 않은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하게 만든다. 그가 권모술수로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이 <드라마의 제왕>에서 가장 재미있을 때다. 앤서니 김의 방식은 보다 현실적이고, 보다 짜릿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고은을 통해 말하는 이상은 아니다. <드라마의 제왕>은 어느 시점에서 앤서니 김의 수단을 대체할 새로운 방식의 드라마 만들기에 대한 답을 향해 가야 했다. 그것이 <드라마의 제왕>의 승부처이자, 이상이 현실로 실현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드라마를 만들려면

아무도 안 믿는다던 앤서니 김은 이제 이고은을 믿고, 자신에게 진심을 다하는 직원들에게 감동받고 눈물을 흘린다.
아무도 안 믿는다던 앤서니 김은 이제 이고은을 믿고, 자신에게 진심을 다하는 직원들에게 감동받고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드라마의 제왕>은 14회까지 답을 찾는 것을 유보한다. 대신 드라마의 재미를 담보하는 앤서니 김에게 더욱 비중을 실어준다. 팽팽하게 맞서던 앤서니 김과 이고은의 관계는 앤서니 김이 표절시비부터 대본작성까지 이고은에게 계속 조언을 하는 멘토와 멘티처럼 변한다. 작품 안에서 앤서니 김의 매력은 높아지지만, 현실과 이상을 놓고 갈등하며 대안을 찾는 드라마의 큰 줄기는 약해졌다. 대신 앤서니 김을 둘러싼 위기와 해결이 반복된다. 앤서니 김과 이고은이 각각 제작비와 표절 문제로 고민할 때, 그들은 대화하던 사람들의 말에서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해결책을 찾는 식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더 나은 답을 찾는데서 오는 드라마의 내적인 변화는 사라지고, 비슷한 구성의 에피소드 내용만이 변한다. <경성의 아침>이 흥행에 성공한다 해도 <드라마의 제왕>의 시청자에게 감흥을 주기 어려운 이유다. <경성의 아침>의 성공은 <드라마의 제왕>이 현실과 부딪치며 얻어낸 결과가 아니라 제작진이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만들어낸 이상적인 상황일 뿐이다.

그래서 앤서니 김이 점차 따뜻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은 이상적인 결과로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안 믿는다던 그는 이제 이고은을 믿고, 자신에게 진심을 다하는 직원들에게 감동받고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는 바깥에서는 여전히 전쟁하듯 살아간다. 이고은의 이상은 앤서니 김의 영향력 안에서만 이뤄질 수 있고, 그의 영향력은 스스로 <삼국지>의 전쟁에 비유한 권모술수를 동원한 전쟁을 통해 확대된다. 사람을 내치는데 주저하지 않는 제국엔터테인먼트 대신 자기 사람을 끌어안는 앤서니 김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공정한 룰이 통하지 않는 전쟁터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싸인>에서 윤지훈은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이들이 진실을 알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드라마의 제왕>은 윤지훈이 만든 세상 위에서 더 좋은 세상에 대한 답을 내는 대신 그들만의 세상을 더 따뜻하게 하는데서 멈춘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드라마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이상을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현실은 어렵다. 현실을 바꾸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가지 않을 수 없다. 더 좋은 드라마를 만들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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