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 “요즘 제일 경계하는 건 타성에 젖는 것”
최민식 “요즘 제일 경계하는 건 타성에 젖는 것”
지난 6일 SBS 에 출연한 최민식은 영화 촬영을 자주 빠졌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뺨을 맞고도 아무런 변명 없이 펑펑 울던 류승범이 그렇게 예뻐보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짧은 에피소드를 통해 최민식이 어떤 배우인지, 선배인지, 사람인지를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출중한 연기력보다 철두철미한 프로 정신을 으뜸으로 생각하는 배우, 그래서 기본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는 후배에게는 “강력한 응징”도 마다하지 않는 선배, 그러나 그 후배의 눈물에 함께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나이. 최민식은 그렇게 25년을 배우로 살아왔다. 이번 영화 (이하 )를 본 사람들이 극 중 대사를 빌어 “최민식, 살아있네”라고 입을 모으는 건, “타성에 젖지 않기 위해” 걸 그룹 소녀시대의 ‘훗’ 춤까지 익힌 50대 배우의 근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도 멜로 할 줄 안다”며 머릿속으로 그려 본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근성이 향하는 다음 목표는 아마도 멜로 영화일 것 같다. 거친 목소리와 단호한 어조, 순박한 미소가 교차했던 최민식과의 대화를 옮긴다.

소녀시대 삼촌팬이라는 사실이 굉장히 화제가 됐다. (웃음)
최민식: 나이를 먹으면 알게 모르게 자꾸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그럴 때마다 소녀시대를 본다. 소원을 말해보라고? 그래, 내 소원은 말이다, 으흐흐흐. 일상에서 특별한 경험을 습득하려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소소한 것에 대한 느낌과 촉을 세우고 있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 그게 참 힘든 일인데.

“조금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쳐서는 안되는 게 최익현”
최민식 “요즘 제일 경계하는 건 타성에 젖는 것”
최민식 “요즘 제일 경계하는 건 타성에 젖는 것”
아무래도 영화 의 오대수나 의 장경철을 연기했던 배우라는 점에서 더욱 신선하게 받아들여진 것 같다. 배우 입장에서도 이후 대중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텐데 어땠나.
최민식: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대중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다. 그냥 내 입맛에 맞는 걸 택할 뿐이다. 만약에 그런 걸 고민했으면 를 어떻게 하나. 작품 속 세상이 흥미로운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은 어떤 부분에서 흥미로운 작품이었나.
최민식: 요즘엔 많이 제작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서사극을 정말 좋아한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 긴장하면서 보는 영화가 아니라 그냥 주-욱 보는 영화들 있지 않나. 옆에 먹을 것도 갖다 놓고, 중간에 전화도 오면 받다가 다시 볼 수 있는 영화들. 러닝타임이 길다, 스토리가 장구하다는 점에서 배우가 느끼는 부담감은 없다. 오히려 더 도전해보고 싶은 욕구가 치고 올라오지.

오대수와 장경철에 비해 최익현은 유머코드도 있고 연민의 감정도 느껴지는 인물이라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좀 여유로웠을 것 같은데.
최민식: 캐릭터 자체가 주는 정서적 압박은 없었다. 때는 가짜 피인 걸 알면서도 진짜 피 냄새처럼 느껴져서 막 구역질을 했다. 상황에 대한 압박, 설정에 대한 압박, 캐릭터에 대한 압박, 행위에 대한 압박까지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이번엔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는 없었지만 대신 방대한 양을 소화해야 했다. 다른 친구들은 자기 분량 다 찍었다고 서울 올라가서 쉬는데 나는 주구장창 부산에서 촬영하고. (웃음) 조금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쳐서는 안되는 게 최익현이 모든 인물, 모든 사건과 연관성이 있다.

다른 이유로 늘 긴장상태였겠다.
최민식: 보통 영화는 순서대로 촬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실타래 같은 신경섬유를 다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그 때 감정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고 이렇게 해서 이런 비즈니스 결과가 나왔구나. 굉장한 집중력을 요하기 때문에 신경이 면도칼처럼 변했다. 헐렁해 보이는 연기도 다 생각에서 나오는 거지, 그게 그냥 하는 게 아니거든. 뭐라 그럴까, 참 피곤하다.

단역 배우조차 ‘1980년대의 나쁜 놈’ 느낌이 나는 게 캐스팅 조건이었을 정도로 시대 고증에 신경을 많이 쓴 작품인데, 최익현이라는 인물에 접근할 때도 시대적 상황을 많이 염두에 뒀나.
최민식: 정치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황이고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만날 최루가스 속에서 살다시피 했던 사회적 상황을 제외하면, 1980년대 인간이 다르고 1990년대 인간이 다른 건 없다. 아버지라는 사람 역시 1980년대 아버지 다르고 2012년도 아버지가 다른 건 아니잖나. 물론 친구 같은 아버지, 가정적인 아버지 같은 성향은 바뀔 수 있겠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 가족을 지켜야 되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을 거다.

결국 은 위협적인 조폭인 동시에 짠한 아버지 최익현의 드라마다. 그만큼 최민식이라는 배우에 대한 기대감으로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들이 많을 텐데, 주연 배우로서의 책임감이 좀 남달랐을 것 같다.
최민식: 내가 잘 표현해내면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무너지면 이 영화는 망한다, 내가 휘청거리면 이건 산으로 가겠구나, 이런 건 있었다. (웃음) 그런 점에서 우리 후배들이 너무 고맙다. 다들 자기 위치에서 한 몫 단단히들 하고 빠진다.

“영화는 팀이 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화합이 제일 중요하다”
최민식 “요즘 제일 경계하는 건 타성에 젖는 것”
최민식 “요즘 제일 경계하는 건 타성에 젖는 것”
최익현은 정말 모든 인물들과 얽혀있는 사람인데 그런 점에서 후배들과 호흡을 맞춰나가는 과정은 어땠나.
최민식: 하정우는 소위 말해 30대 중반의 선두주자로 달리고 있는 배우인데 ‘내가 최민식을 받쳐줄 일 있냐’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무런 사심 없이 이 작품에서 최형배라는 역할로 등장해서 충분히 앙상블을 이뤄주고 빠진다. 선배가 봤을 땐 너무너무 고마운 거다. 운동경기의 목표는 골을 넣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골을 넣겠다고 뛰기만 하면 안 된다. 누군가가 드리블을 해서 패스를 하면 받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연기도 그게 가장 기본이고 가장 힘든 일이다. 연극을 배울 때 ‘상대 대사를 좀 들어, 너 혼자 하지 말고’라는 얘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대화를 할 때는 안 그러는데 연기만 하면 나 혼자 얘기를 하고 이상한 멋이 들리고 카메라를 의식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후배들이 그럴 땐 선배로서 어떻게 도와주는 편인가.
최민식: 만약 경험이 없으면 가르쳐줘야지. 모르는 게 죄는 아니니까. 그런데 아는데도 안하면 맞아야지. 하하하하. 너무 과격한가? 우리 때는 많이 맞고 살았으니까.

현장에서 엄한 선배인가 보다. (웃음)
최민식: 이 작업은 팀이 하는 예술이고 창작이기 때문에 화합이 제일 중요하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의견을 조율하고 자기 것을 양보하되 자기 감성과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최종 목표에 도움이 되게 하는 일이다. 더구나 이쪽은 섬세하고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데 자기 것을 조금 양보하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다. 그런데 만약 한 사람 때문에 전체의 분위기를 해치거나 전투력을 잃어버렸을 때는 선배의 강력한 제제와 응징이 들어가야지.

보통 어떤 경우에 강력한 제제와 응징이 들어가나.
최민식: 감독과의 이유 있는 충돌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나도 그럴 때가 많다.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찍어야 되니까 이 해석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싶을 때는 촬영을 잠시 중단하고 대화를 해야지. 그럴 땐 선배도 옆에서 같이 고민해줘야 하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의도적인 지각이나 배우들 간의 쓸데없는 기 싸움, 난 이런 거 못 본다. 촬영현장에 먼저 와 있는 걸 자존심 상하는 행위로 생각하면 안 된다. 미리 나와서 스태프들하고 얘기도 하고 커피도 마시면서 몸도 풀고 소리도 지르면서 준비를 해야지.

하정우도 인터뷰에서 최민식 선배는 단 한 번도 촬영장에 늦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더라.
최민식: 걔도 그렇게 한다. 흐흐흐. 그래서 내가 정우를 좋아한다. 굳이 잔소리를 안 해도 되는 후배다.

다른 직업군처럼 배우들 사이에도 엄연히 선후배의 관계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카메라 불이 켜지면 배우 대 배우로서 마주하게 되는 특수한 지점이 있다.
최민식: 그래서 사실 이 세계는 잔소리를 하면 끝난다. 여기가 학교는 아니잖나. 우리는 돈 받고 일하는 직업 배우들이다. 속된 말로, 선수다. 그러면 알아서 해야 된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알아서 마인드를 바꿔서 현장에 나와야 되고, 직업 배우가 무대 위에서 대사 까먹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만큼 철저한 프로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걸 직업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절대 휘뚜루마뚜루 행동할 수 없게 된다.

실력보다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뜻인가.
최민식: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 직업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이거 하다가 결혼하면 그만이지, 장사하면 그만이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친구들은 치열하지 못하다. 뭔가 비어있다. 그러나 목숨 걸고 하는 친구들은 농도부터 다르다. 뭘 해도 진하게 배어나온다. 나이를 떠나서, 경험을 떠나서 기운과 느낌이 다르다고. 그런 친구들하고 같이 연기하면 나도 기분이 좋다.

“나도 멜로 할 줄 안다”
최민식 “요즘 제일 경계하는 건 타성에 젖는 것”
최민식 “요즘 제일 경계하는 건 타성에 젖는 것”
배우에 대해 “몸을 쓰는 직업인”이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선배보다 후배들과 작업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아진 25년차 배우로서 요즘 가장 큰 고민은 뭔가.
최민식: 몸이야 나이를 먹는 거고 쇠퇴하지만 정신 자체는 끊임없이 진화를 해야 된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것들은 말이야’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 배우들은 그런 말 하면 큰일 난다. 요즘 제일 경계하는 건 타성에 젖는 것이다. 습관처럼 연기하고, 습관처럼 생각하고 어떤 것에 대해 정의를 빨리 내려버리면 안 된다. ‘저 인간은 저래, 이건 이럴 거야’가 아니라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항상 시각을 새롭게 하고 한 곳에 머물지 않게 해야 된다. 왜냐면 우린 삶을 들여다보는 사람이니까. 좋은 놈이든 나쁜 놈이든 이 인간이 왜 이런 행동을 했고 어쩌다 이런 파국을 맞았는지 알아야 한다.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나이에서 오는 한계를 느꼈다고 들었다. 체력적인 부분도 부쩍 신경이 쓰이겠다.
최민식: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꼭 원로배우 같은데 (웃음) 사실 이제 이런 거 하면 힘든 게 당연하다. 이번엔 이런 거 했으니까 다음에는 좀 더 쌈박한 작품으로. (웃음)

예를 들면?
최민식: 멜로지, 멜로. (웃음)

이를테면 같은 멜로인가?
최민식: 처럼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지만 누군가가 나를 그리워하고 사랑해주는 것도 좋다. 괜히 폼 잡고 서양영화 따라하는 거 말고 진짜 우리네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솔직한 얘기를 하고 싶다.

혹시 생각해놓은 그림이라도 있나.
최민식: 고등학교 때 여학생들이 잘생긴 총각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것처럼 남학생들도 그런 게 있다. 할머니가 되가는 은사님을 제자가 계속 좋아하고, 선생님은 장난하지 말라고 하는데 얘는 진짜로 사랑하는 이야기. 그러다가 갑자기 얘가 사이코 패스가 되가지고 으흐흐흐. 이건 절대 안 되고. (웃음) 선생님은 이제 폐경기도 오고 아무도 여자로 봐주지 않는 늙은이라는 상심에 빠져있는데 제자 덕분에 다시 여인으로 인정받는 거지. 한 번은 영화제 뒤풀이에서 윤정희 선생님이 내 앞에 앉아계셨는데, 문득 윤정희 선생님이 내가 어릴 때부터 사모하던 선생님이었다면 어땠을까, 라고 상상해봤다. 그래서 대뜸 “선생님, 저랑 멜로영화 하나 하실래요?”라고 여쭤봤더니 “나야 좋지”라고 말씀하시더라.

그러면 과거의 최민식과 윤정희는 어떤 후배가 연기하면 좋을까?
최민식: 과거는 필요 없다. 나도 멜로 할 줄 안다. (웃음)

글. 이가온 thirteen@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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