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것도 근성이다. 51권, 56권, 64권(모두 한국 정식 발간 기준), 흔히 ‘원.나.블’로 불리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기를 얻고 있는 이들 만화는 그 권수만으로도 압도적인 작품들이다. 간혹 각 작품의 팬덤끼리 서로를 비하하기도 하지만 소년만화 특유의 많은 요소를 공유하고 엄청난 연재 분량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원.나.블’은 만화 팬들에게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통한다. 특히 2010년에는 일본 내 만화 판매량 1위(), 2위(), 5위(), 2011년에도 1위(), 2위(), 8위()를 기록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들 만화는 과거의 전설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역사를 쓰고 있다. 쉽게 뛰어들기에는 너무나 압도적인, 하지만 그만큼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이 세 작품의 매력에 대해 그들의 첫 모습부터 지금까지 따라왔던 한 독자로서 분석을 시도하고, 아직 ‘원.나.블’의 세계가 낯선 이들을 위해 이들이 소년만화로서 공유하는 항목들을 정리해보았다. 만약 이 작품 모두를 사랑하는 팬이라면 ‘원.나.블’의 주인공들이 현실 속에서 나이를 먹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엉뚱한 상상과 역시 만화의 골수팬인 어느 열혈 트위터리언의 트윗을 보며 공감하고 즐길 수 있길 바란다.

그들처럼 어렸던 적이 있다. 1997년, 열일곱 루피가 나룻배 한 척에 몸을 맡기고 첫 항해를 시작하고, 2년 뒤 열네살 소년 나루토가 닌자 마을의 우두머리 호카게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또 2년 뒤 귀신을 볼 줄 아는 고등학생 쿠로사키 이치고가 사신의 역할을 대행하게 되었을 때도, 만화책 첫 번째 권을 넘기던 손은 아직 생업의 기술에 길들여지지 않았고, 보는 눈에는 의혹보다는 호기심이 있었다. 그동안 는 15년 동안 연재되었지만 루피와 밀짚모자 해적단은 단 두 살 더 먹었을 뿐이고, 의 나루토 역시 그러하며, 이제야 갓 연재 10년을 넘긴 의 이치고 역시 겨우 고3이 됐다. 그동안 루피는 현상금 3억 베리가 넘는 해적 최고의 루키가 되었고, 나루토는 나뭇잎 마을의 영웅이, 이치고는 소울 소사이어티를 구한 은인이 되었다. 어쨌든 그들처럼 어렸던 적이, 있었다.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 만드는 진행형

나이를 먹는다는 건, 또래였던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을 기억의 뒤편에 남겨놓는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다. 강백호()가 그랬고, 히로(< H2 >)가 그랬으며, 호야() 역시 최강 요괴 백면인을 꺾고 평범한 학생의 삶으로 돌아갔다. 연재가 끝나도 일상은 계속되는 우리에게 모험의 끝은 곧 망각으로 이어진다. 하여 그들의 모험과 도전은 미완인 상태로 끝났을 때 좀 더 오래 회자될 수 있다. 는 그 자체로 이미 위대한 작품이지만 북산이 첫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연재가 종료됐더라면 지금처럼 불멸의 아레나에 오르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 , , ‘원.나.블’로 통칭되며 현재까지 일본 를 통해 연재되는 일련의 소년만화들은 10년이 넘도록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통해 불멸의 영역에 물리적으로 도전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들 작품의 주인공들은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성장했지만, 앞으로 그들에게 얼마나 더 많은 장애물과 모험이 남아있는지는 짐작할 수 없다. 루피와 동료들은 이제야 신세계의 바다에 도전할 힘을 얻었고, 나루토에겐 닌자 전쟁과 사스케와의 대결이라는 거대한 미션이 남아있다. 최강의 적 아이젠 소스케를 꺾은 이치고지만 그의 아버지와 우라하라 키스케의 관계, 왕속특무대의 존재를 비롯해 수많은 복선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의 작가가 을 그리면 50권이 되도록 드래곤볼이 뭔지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는 괜한 게 아니다. 연재된 지난 시간보다 더 큰 앞으로의 기대가 이들 작품에는 있다.

이들이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판타지물이면서도 완결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역시 엄청난 분량이었던 의 경우 우주 최강 초사이어인이라는 설정을 무너뜨리고 퓨전이나 계왕신, 마인부우 같은 설정을 이어 붙여야 했다. 지금 이 적은 최강이지만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 세계는 미지에서 불가지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미지의 세계는 ‘아직’ 알 수 없는 곳이고, 불가지의 세계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곳이다. 모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전자다. 즉 ‘원.나.블’이 악마의 열매의 능력과 약점(), 사신과 호로의 대립() 같은 설정으로 세계의 한계를 두를 때, 저 미지의 세계를 모두 경험하겠노라는 모험의 동기가 생긴다. 하여 그들의 긴 모험은 완결을 유보하며 억지로 이어지지 않고, 온전한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된다. 기억의 뒤편은, 아직 그들의 자리가 아니다.

나이 들지 않은 소년이 던지는 질문
[위근우의 10 Voice] 더이상 어리지 않은 당신을 향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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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블’ 자체의 내용보다도 지금 이곳에서 ‘원.나.블’을 꾸준히 읽는 것의 의미가 중요하다면 그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나이 먹고 일상이라는 이름의 급류에 휩쓸리지만 여전히 루피와 나루토, 그리고 이치고는 격랑 속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현재진행형으로 가고 있다. 어른이 되며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를 동시대의 그들이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원.나.블’은 가치라는 말로 포장되어야 하는 쓸모 있는 무언가에 대한 요구, 즉 어른들의 가치 평가를 무시한다. 의 경우 종종 타 만화의 팬들에게 ‘허세치’라는 오명을 듣지만 자신이 폭주했을 때 적의 왼팔과 왼쪽 다리를 베었으니 자신의 왼팔과 왼쪽 다리를 베라고 말하는 이치고가 허세의 극치라면, 해적의 낭만을 무시하는 루키들을 상대하지 않고 그냥 맞고만 있던 루피와 조로는 고집쟁이이며, 강대국의 평화는 약소국에게 폭력이기에 닌자 마을을 붕괴시키겠다는 페인에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폭력 없이 평화를 쟁취하겠다는 나루토는 무책임하다.

밀짚모자 해적단이 로빈을 구하기 위해 사법의 섬 에니에스로비에 뛰어들고, 이치고와 친구들이 오리히메를 구하기 위해 호로의 본거지 웨코문드에 잠입하며, 사스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나루토가 오로치마루의 근거지에 가는 것처럼 ‘원.나.블’이 빼앗긴 동료를 구하는 모티브를 공유하는 건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여기서 동료를 왜 구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동료는, 친구는 그냥 소중하며 그들을 위해서는 목숨도 걸 수 있다. 이 순환논법은 철들지 않은 십대의 호기 딱 그만큼이다. 하지만 어떤가. 친구를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무모함도 세상을 향해 지지 않겠노라 소리치는 허세도 없는 거울 속의 나이 먹은 내 모습에는, 과연 그걸 뛰어넘는 지혜와 성숙한 신념이 있다 말할 수 있는가. 지금의 신중함은 주저함의, 노련함은 노회함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여 ‘원.나.블’의 현재진행형 모험은 자체로서도 흥미롭지만 지금 나의 삶에 찌든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춰볼 수 있기에 더욱 의미 있다. 물론 만화책을 보는 것만으로 내 안의 무모한 소년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소년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으리라 말할 수도 없다. 다만 15년이 지나도 루피가 해적 세계의 거물들에게 거침없이 고무고무 바주카를 날리는 순간마다 이것 하나 정도는 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무서운 걸 몰라 쫄지 않고, 계산적으로 숙고하지 못해 내 기분에 따라 행동할 줄 알았던, 그들처럼 어렸던 적이, 우리에겐 있었다.

글. 위근우 기자 eight@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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