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불통 소녀가 땅 위에 섰다. 머리엔 진흙이 덕지덕지 붙었고 얄궂게 올라간 입술은 한층 더 깊어졌다. 육중한 무게감이 일종의 불상처럼도 느껴진다. 물감의 색을 벗고 흙의 옷을 입은 외형은 암울한 느낌마저 준다. 일본의 미술가 나라 요시토모가 올해 5월 신작을 발표했다. 2010년 5월 15일부터 한 달 간 코야마토미오 미술관에서 열린 ‘나라 요시토모 세라믹 웍스’ 전시는 그가 지난 1년간 작업한 도예작품 30 여점으로 구성됐다. 2m가 넘는 크기의 조형물, 표주박 모양의 화병, 호리병처럼 목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 등. 7년 만의 개인전을 종이와 물감 대신 흙으로 완성한 나라 요시토모는 이제까지 없었던 소녀의 3차원 도자기 세계를 구현했다. 이 전시는 2011년 1월 미국 뉴욕에서 다시 열린다.

팬시한 캐릭터가 숨기고 있는 우울한 세계



국내에선 소설가 요시모토 바나나 책의 일러스트 작가로, 혹은 귀엽고 개성 있는 소녀 그림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나라 요시토모는 일본의 2세대 현대미술 작가로 불리는 아티스트다. 독일에서 유학 이후 유럽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현재는 일본은 물론 한국, 대만, 뉴욕 등을 돌며 작업하는 유명작가가 됐다. 2001년 첫 일본 내 전시 ‘I`DON`T MIND, IF YOU FORGET ME’로 그만의 소녀 캐릭터를 각인시켰고, 크리에이터 집단 graf와 함께 작업한 ‘IA to Z ’의 대중적인 성공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현재 그의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MoMA), 로스엔젤레스현대미술관 등에 다수 소장되어 있다.

그저 팬시한 캐릭터로 오해되기 쉽지만 나라 요시토모의 작품은 우울한 세계를 품고 있다. 나라 요시토모의 유학시절 그의 선생이었던 독일의 거장 A.R 펭크은 “나라의 작품은 소녀의 순수, 잔혹함, 고독, 이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려는 강함이 묻어난다”고 평했다. ‘IFrom the Depth of Drawer ’, ‘IMoonlight Serenade ’ 등 전시의 제목도 마냥 밝지가 않다. 일견 예뻐 보였던 소녀는 시간을 들여 응시하는 동안 짙은 어둠을 뱉어낸다. graf와 작업하며 세계 곳곳에 소녀의 다락방을 지었던 ‘A to Z ’는 그 어둠을 고민한 흔적이다. 세상에 태어난 소녀는 자신의 공간을 탐색했다. 그리고 이번 도자기 작품은 그 여정에 대한 결과물이다. 소녀는 앞과 뒤 두 개의 얼굴을 나눠 갖고 서로 다른 두 표정을 짓는다(< Anymore for Anymore >). 보이지 않았던 뒷모습이 보인다. 나라 요시토모는 이번 전시를 앞두고 “점점 아이덴티티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팬시한 세계를 등 뒤로 한 그의 소녀가 한 발짝 크게 성장했다.

사진제공. www.tomiokoyamagalle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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