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은의 10 Voice]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로맨스, <장난스런 키스>
" />
# 1. 아름답고 평화로운 숲 속 어딘가. 나무에 기대 잠들어 있던 소녀는 동화 속 왕자님 같은 소년의 입맞춤을 받고 눈을 뜬다. 잠에서 깬 소녀는 어디선가 나타난 백마를 보고 저도 모르게 이끌리듯 따라간다. 떨어지는 나뭇잎도 음악에 맞춰 춤추는 꽃밭에서 소녀는 다시 소년을 만난다. 두 사람의 얼굴이 다시 가까워지던 순간, 소녀는 진짜로 잠에서 깨어난다.

# 2. “필요 없어!”라는 말과 함께 소년은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러브레터를 매몰차게 거절한다. 소녀가 지나가는 곳마다 같은 학교 학생들은 “한 방에 차였다며?”라고 수군거린다. 친구들에게조차 무모했다는 평가를 받는 고백이지만 소녀는 입학식 날 신입생 대표로 선서하는 소년에게 반해 3년 동안 짝사랑해왔다며 항변한다.

만화보다 더 만화적인 판타지
[최지은의 10 Voice]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로맨스, <장난스런 키스>
" />
위의 두 장면은 각각 MBC 와 만화 의 첫 부분이다. 순서가 바뀐 게 아니다. 전자가 드라마다. 일본의 순정만화가 타다 카오루의 작품으로 90년대 뜨거운 인기를 모았던 는 일본 내에서만 발행부수 2천 7백만 부를 기록한 메가 히트작이다. 일본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은 물론 2005년 대만 드라마 으로도 만들어져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도 높은 인지도를 자랑한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덜렁이 소녀와 못 하는 것 하나 없는 천재 소년의 우연한 동거에서 시작된 로맨스는 뻔한 설정을 뛰어넘는 매력을 통해 와 같은 순정만화계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판 드라마 방영에 대한 기대 역시 높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MBC 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메가히트 원작을 드라마화 하는 경우 대부분 시청자의 기대는 그 원작을 제대로 구현하는 데 있다. 물론 장르의 이동은 각색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베스트셀러 로맨스 소설 을 바탕으로 한 KBS 역시 주인공 이선준(믹키유천)의 캐릭터를 드라마에 맞추어 바꾸면서 여주인공 김윤희(박민영)와 이선준의 만남 등 여러 에피소드를 크게 각색했다. 하지만 는 주인공 백승조(김현중)를 좋아하는 오하니(정소민)의 감정을 현실이 아닌 꿈에서 시작된 것으로, 즉 만화보다 더 만화적인 판타지로 설정하며 최소한의 감정이입조차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꿈에서 본 ‘숲의 정령’과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같은 학교 남학생을 오랫동안 짝사랑하는 것과, 잘 생긴 신입생 대표가 똑똑하기까지 하다는 이유로 동경하며 짝사랑하는 것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보편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감정일까.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와 이해되지 않는 감정
[최지은의 10 Voice]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로맨스, <장난스런 키스>
" />
로맨스의 무리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백승조와 오하니의 캐릭터가 제대로 드러나기도 전에 난무한 상상 신은 원작에서 일종의 ‘아이돌과 소녀 팬’에 가까운, 그래서 수평적인 관계가 아니라 한쪽의 극단적인 짝사랑일 때 만들어졌던 독특한 매력을 반감시킨다. 인형 탈을 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하니가 백승조에게 ‘똥침’을 놓는다는 발상 역시 짝사랑하는 소녀의 심리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심지어 그 와중에도 오하니에게 귀엽다는 감정을 느끼는 백승조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가 됐다. 오하니의 러브레터 맞춤법을 일일이 고쳐 돌려줄 만큼 남 일에 신경 쓰고 봉준구(이태성)의 도발에 쉽게 반응해 버리는 백승조와, 천재이면서도 대학 입시나 세속적 욕망에 초연한 백승조는 좀처럼 유기적으로 섞이지 않는다. 백승조가 흐릿한 만큼 오하니의 열렬한 애정 역시 방향을 잃는 것은 필연적이다. 봉준구의 존재가 긴장감 있는 삼각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훼방 전문 악녀 홍장미(장아영)도 둘 사이를 공허하게 떠다니며 소모될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5회에서 이들이 모처럼 진로에 대한 고민과 함께 차분한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해 제대로 바라볼 기회를 얻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정도로 “(승조가) 마음을 좀 보여준 건가?”라고 혼잣말하는 오하니처럼 미리 뭔가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청춘 로맨스에서 성장에 대한 기대마저 벌써 버리는 것은 역시 아쉬운 일이다. 그것이 주인공의 성장이든, 작품의 성장이든 말이다.

글. 최지은 five@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