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철 감독님이 촬영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써니>를 통해서 아역배우 심은경이 아니라 배우 심은경이 되어보자고.” 영화 <써니>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말이다. 영화가 끝난 뒤, 어린 임나미로 출연했던 심은경을 단지 유호정의 아역으로만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늘 ‘써니’ 친구들과 어울리며 천방지축으로 뛰놀던 나미는 짝사랑하는 오빠 준호(김시후) 앞에서는 다소곳한 숙녀가 되고, 자신을 싫어하던 수지(민효린)의 상처를 발견하고는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의리파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귀여우면서도 털털하고 때로는 능청스럽기까지 한, 작품의 중심을 묵직하게 지키고 서 있는 여고생 나미는 올해로 열여덟 살이 된 심은경이 만들어 낸 캐릭터다. “저는 80년대 10대나 요즘 10대나 별로 다를 게 없다고 봤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너무 시대를 신경 쓰기보다는 지금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다고 하니까 감독님께서, 벌써 캐릭터를 잡았네, 하셨어요. (웃음)”

하지만 심은경이 온전히 자기만의 캐릭터와 색깔을 갖게 된 건 불과 2년 전이다. 수줍은 성격을 고치기 위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MBC <결혼하고 싶은 여자>, <태왕사신기>, KBS <황진이>, <거상 김만덕> 등 스무 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했던 심은경은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지만, 대부분의 아역배우들이 그러하듯 누군가의 아역이라는 타이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어릴 때는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2년 전부터 욕심이 막 생기더라고요. 나름대로 캐릭터도 연구해보고.” SBS <나쁜 남자>에서 “원인이는 평범하지 않은 아이”라는 생각으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갑자기 춤을 추는 등 작은 것 하나라도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렇게 쌓은 내공을 바탕으로 <써니>의 주인공 역을 거뜬히 해냈고, 강형철 감독의 바람대로 대중들은 ‘아역’을 뗀 ‘배우 심은경’으로 그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연기를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올드팝과 록을 좋아하는 음악 취향 역시 또래에 비해 성숙하다. 80년대 음악이 많이 나오는 <써니>에서 심은경이 시대의 격차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도 그 덕분이다. “어떨 때는 정말 옛날로 가서 그때 당시의 학생이 되어보고 싶다는 상상도 해요. 그 당시에는 제가 좋아했던 아티스트들도 많이 나왔었고 그들의 음반도 쉽게 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기타와 드럼 연주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노래를 들으면서 글을 쓴다는 심은경에게 음악은, 더 풍부한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다. 그에게 상상력을 불어넣어 준 음악들을 추천받았다.




1. 서태지의 < Seotaiji 8th Atomos Part Moai (Single) >
심은경이 추천한 첫 번째 곡은 서태지의 ‘T`ik T`ak’이다. 이 곡이 수록된 < Seotaiji 8th Atomos Part Moai >는 4년 만에 선보이는 8집 앨범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첫 싱글 앨범으로, 전체적으로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처음 ‘T`ik T`ak’을 듣고 “아, 바로 이거야!”라고 느끼면서 서태지 씨의 팬이 된 곡이에요. 저한테는 혁명 같은 노래죠.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어떤 훌륭한 예술 작품 같은 걸 봤을 때 심장이 막 뛰고 흥분하는 현상이 있다고 하던데 제가 그 곡을 들었을 때 살짝 그랬던 것 같아요. 그 후로 음악을 다 찾아 듣게 됐죠. 처음 만난 사람과도 서태지를 좋아한다고 하면 금방 친해질 수 있을 정도예요. 뮤직비디오도 수십 번씩 봤을 정도로 정말 좋고요.”



2. Paul McCartney의 < Back In The U.S. Live 2002 >
“2년 전부터 비틀즈에 빠졌어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그들의 음악에 영향을 받는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제일 처음 산 음반이 < Abbey Road >인데, 순전히 재킷 사진만 보고 샀어요. 정말 멋졌거든요. 앨범 수록곡들은 들어보니 ‘역시 비틀즈!’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어요. 그중에서도 ‘Something’이라는 곡을 추천하고 싶어요. 다들 이 앨범에서 ‘Come Together’를 많이 아시지만 저는 그다음 트랙인 ‘Something’을 더 좋아해요. 멜로디만으로도 사람들을 설레게 만들 수 있다는 것에 감동했어요.” 심은경이 추천한 ‘Something’이 수록된 앨범 < Abbey Road >의 음원은 현재 온라인 서비스가 되고 있지 않아 부득이하게 폴 매카트니의 라이브 앨범 < Back In The U.S Live 2002 >로 대신한다.



3. Pink Floyd의 < The Dark Side Of The Moon >
핑크 플로이드의 < The Dark Side Of The Moon >은 무려 14년간 빌보드 앨범차트에 머물렀던 전설적인 앨범이다. “‘Us And Them’을 듣고 핑크 플로이드에 빠지게 됐어요. 처음에는 잔잔하게 시작하다가 점점 웅장하게 퍼지는 멜로디가 정말 좋아요. 핑크 플로이드가 당시 남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지금 들어도 경이롭다고 느끼는 사운드를 들려주거든요. 새로운 걸 시도했다는 의미가 큰 그룹이에요. 그 점이 저한테도 많은 영향을 주고요.” 심은경의 말처럼 핑크 플로이드는 웅장하고도 실험적인 사운드로 유명한 밴드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내기도 한다. 반전을 노래하는 ‘Us And Them’, 자본주의를 풍자하는 ‘Money’가 대표적인 경우다.



4. ToTo의 < Toto IV >
1980년대 팝송을 듣고 자란 세대라면 1983년에 발매된 이 앨범의 ‘Africa’와 ‘Rosanna’를 기억하고 있겠지만, 심은경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활약한 토토에 대해 “당대 최고의 밴드”라고 극찬하는 건 조금 희한한 일이다. “MBC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 20주년 기념으로 ‘100장의 앨범’을 뽑아주셨는데 그 리스트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 노래에요. 정말 잘 만든 곡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제가 팝송의 영어 가사를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웃음) 멜로디가 독특하고, 멤버들이 다 세션 출신이라 그런지 연주도 정말 깔끔하더라고요.” 아프리카의 타악기 연주로 시작되는 ‘Africa’는 “들을 때마다 기분이 굉장히 좋아”지면서도 묘한 설렘을 안겨주는 곡이다.



5. 이터널 모닝의 < Eternal Morning >
심은경의 마지막 추천곡은 에픽 하이의 타블로와 페니(Pe2ny)가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이터널 모닝의 ‘White’다. “중학교 1학년 겨울에 들었는데 겨울 감성에 맞게 잘 나온 곡이었어요. 가상 영화의 OST라는 주제로 낸 앨범이라 각 곡마다 다 스토리가 있잖아요. 그걸 나름대로 상상하면서 들어보니까 정말 잘 만든 앨범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걸 들으면서 저 나름대로 글도 써보고 저한테 영감을 많이 준 앨범이었어요. 우리나라에서 이런 인스트루먼트 앨범이 쉽게 나오지 않는데 참 반가웠어요.” 실제로 앨범 부제가 ‘존재하지 않는 가상 영화 사운드 트랙’인데, 특정한 장면이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도록 각 곡마다 짤막한 소개 글을 덧붙여놓았다. ‘White’는 서사 영화를 위한 음악으로 ‘동틀 녘, 눈으로 덮인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한 천사의 그림자가 순백 위로 일어선다’는 내용을 담은 곡이다.




올해 초 심은경은 “연기를 안 하는 평범한 학생의 삶”을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무려 7년 동안 쉬지 않고 카메라 앞에서 섰던 그는 그동안 마음 한구석에 꾹꾹 눌러놓았던 여유를 조금씩 꺼내 들고 있다.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비록 영어는 서툴고 공부도 빨리 따라잡아야 하지만 좀 더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내가 좋아하는 연기 하면서 남들보다 조금 느긋하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조금씩 성숙해져 가는 것 같아요. 헤헤.” 낯선 땅에서 더 많이 놀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고 돌아오길 바란다. 그것이 곧 우리가 다음 작품에서 보게 될 심은경의 모습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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