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의 영화는 춤을 춘다. 배우는 결승점을 향해 직진으로 내달리는 주자가 아니라, 복제될 수 없는 리듬 속에 춤을 추는 무희다. 달빛 아래 골목을 달려, 바닷가 셋방을 지나, 구름 속을 걸으며, 안개 낀 도시를 헤매며, 빗속에서 대 숲에서 진흙탕에서 끝없는 춤을 춘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올 때까지,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데뷔작인 <개그맨>부터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첫사랑>, <남자는 괴로워>, <지독한 사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형사 Duelist> 최근작 까지, 이명세의 영화들은 좀처럼 한 줄 영화 설명이나 몇 페이지의 시놉시스에 가둬지지 않는다. 텍스트로 설명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되는 이명세의 영화는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어, 그냥 영화다. 읽을 수도, 들을 수도 없다. 그저 러닝타임을 다 바쳐 스크린 속에 흐르는 그것을 온전히 목격하는 수밖에.

그런 이명세 감독이 “영화를 영화로 찍는 다섯 감독의 영화”를 추천 리스트로 고른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크 타티, 오즈 야스지로, 페데리코 펠리니, 찰리 채플린 그리고 버스터 키튼까지. 다음 다섯 편의 영화는 그 거대한 세계들로 통하는 열쇠일 뿐이다. 이명세는 던졌다. 당신들은 열어라. 거기, 영화가 있을 것이다.




1. <윌로씨의 휴가> (Mr. Hulot`s Holiday)
1953년 | 자크 타티

“이 영화를 보고나면 정말 휴가를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들어요. 휴가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단순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온몸으로 느껴지는 휴가의 기운, 그리고 휴가가 끝났을 때 달콤하지만 동시에 슬픈 기분, 인생의 행복 같은 것들. 이런 모든 것들이 마지막 스탬프에 쾅 찍히죠.”

여름이다. 모두들 떠나는 바캉스를 윌로씨도 떠난다. 하지만 북적이는 바닷가에서 이 남자는 어쩐지 겉도는 느낌이다. 관객들은 <윌로씨의 휴가>를 통해 감독 자끄 타티의 외로운 페르소나 이자 <플레이타임> 등 그의 영화의 대표적 캐릭터로 등장하는 트렌치코트의 어리바리 신사, 윌로씨와 첫 대면을 하게 된다.



2. <만춘> (Late Spring)
1949년 | 오즈 야스지로

“나는 모든 영화에는 그 영화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절대 숏’이 있다고 생각해요. <만춘>의 유일한 클로즈업, 사과를 깎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그런 숏인거죠. 딸을 시집보낸 저 아버지는 이제 혼자서 사과를 깎을 수밖에 없구나, 라는 걸 보여주는 순간. 압축된 시어처럼 한 인생이, 그 영화 전체가 보이거든요.”

아내를 잃고 홀로 남은 자신을 걱정하던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고분 분투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만춘>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계절, 그 쓸쓸한 절기 중 하나다. 주인공도 비슷하고, “아 오늘 날씨 좋구나” 같은 거의 반복적인 대사, 집안의 구조나 숏도 동일한 오즈의 영화를 이어보면 그게 어느 영화에서 나온 장면이었는지 헷갈릴 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평생을 거쳐 단 한 편의 영화를 찍었는지도 모르겠다.



3. <로마> (Roma)
1972년 | 페데리코 펠리니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은 만약 내가 영화학교를 만든다면 꼭 모시고 싶은 주임교수 중 하나예요. <로마>는 그 학교의 교과서이구요. 미국에서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이것이야 말로 영화의 전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특히 화려하고 시끄러운 로마의 시장장면이 아주 재미나요. 나이든 여자가 파는 거울에 한 젊은 여자가 잡히는데, 그 순간 늙음과 젊음이 교차하면서 흘러가는 시간이 느껴져요. 인생의 명멸, 저렇게 우리의 인생이 흘러가는 구나를 느끼게 하는, 그게 바로 영화죠.”

로마의 모든 것. 페데리코 펠리니의 모든 것. 혹은 존재했던 것과 사라진 것에 대한 모든 것. 로마에서 나고 자란 감독 페데리고 펠리니가 그 땅에 바치는 영화인 <로마>는 현재와 과거, 역사와 현안, 환상과 현실, 도시와 개인, 르포르타쥬와 픽션이 뒤섞이며 내용적 형식적 실험을 강행한다.



4. <서커스> (The Circus)
1928년 | 찰리 채플린

“그야말로 ‘움직임’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죠. 채플린은 지독한 완벽주의자인데 <서커스>를 찍을 당시엔 한 장면을 찍기 위해 필름을 몇 십 만자를 썼다고 하더라고요. <개그맨>을 본 사람들은 주인공 이종세(안성기)를 보며 채플린을 떠올리는데 사실 촬영 당시만하더라도 채플린의 영화를 본 적이 없었어요. 오히려 아이디어를 얻었던 사람들은 코미디언 남철, 남성남이었죠. 나중에 보니 그들이 채플린을 따라했던 거더라고. (웃음)”

서커스단을 배경으로 한 떠돌이 남자의 슬픈 순애보인 <서커스>는 동시에 악덕 고용주에게 도구처럼 이용되다 버려지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안락한 서커스의 장막 아래서 외줄타기를 하는 시스템 속 인생보다는 배고픔에 허덕이고 경찰에 쫓기지만 자유가 있는 삶을 향해 떠나는 찰리의 뒷모습이 긴 여운을 남긴다.



5. <카메라맨> (The Cameraman)
1928년 | 에드워드 세드윅, 버스터 키튼

“2001년 뉴욕 브룩클린의 한 극장에서 버스터 키튼 영화를 봤어요. 정말로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드디어 만난 느낌이랄까. 버스터 키튼은 내가 그 동안 하고 싶었던 말들, 전달하고 싶었던 느낌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사람이었죠. 특히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영화를 이야기하는 <카메라맨>은 시적인 판타지가 담겨 있는 거의 최초의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어요.”

영화 <몽상가들>에는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 중에 누가 더 위대한가”에 대한 격렬한 토론이 이어진다. 물론 그 두 거장의 위대함을 저울질 하는 건 여전히 무모한 시도다. 채플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버스터 키튼은 몸의 언어를 예술의 경지에 올린 위대한 아티스트다. 영화사에 일하는 여자에게 한 눈에 반한 남자가 손에 익지도 않은 카메라와 온몸으로 씨름하는 장면은 무성영화의 위대함을 새삼 확인하게 만든다.




오는 6월 방송을 앞둔 MBC TV 50주년 특별기획 <타임>은 이명세, 류승완, 김현석, 권칠인 등 영화감독들이 한 편씩 연출하는 것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다큐멘터리다. 여기서 이명세 감독이 선택한 키워드는 ‘M’이다. “이명세 50년 역사의 메모리,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될 거예요. 내 영화 속에서 만났던 강수연, 하지원, 박중훈, 장동건, 이연희 등의 배우들을 직접 인터뷰할 예정이구요. 이제 최진실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어쩌면 그것마저 나의 역사일 테고.”

강동원과 함께 첫사랑의 미로를 해매인지도 그러고 보니 벌써 4년이 흘렀다. 그래서인지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이 제작하고 설경구가 주연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차기작 <미스터 K>에 대한 관객들의 궁금증과 기다림은 턱까지 차있는 상태다. 하지만 이명세 감독은 “한국판 007”이라는 분명한 듯 아리송한 카드만을 내놓는다. “아직 이런 영화다, 라고 설명할 수 있지는 않아요. 손잡고 부둥켜안은 상태는 아니지만 이제 막 안개 속을 벗어나 형체가 보이기 시작한 정도?” 올해 안에 촬영이 들어갈 <미스터 K>에 대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좋아했던, 잃어버린 남성관객들을 다시 찾을 영화”라며 포부를 밝히는 이명세 감독에게서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자신감이 느껴진다. 이명세 감독에게 영화란 자신이 꾸는 꿈속으로 우리를 부르는 초대장이었다. 아직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두 손에 쥐어진 ‘미스터 K’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관객과 감독 사이, 역시 이 ‘지독한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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