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주의 10 Voice] 구애정, 브라보 유어 라이프!
[김희주의 10 Voice] 구애정, 브라보 유어 라이프!
캐나다 작가 제프 르미어가 쓴 그래픽 노블 는 에식스 카운티라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마을의 사람들은 가족 간의 말할 수 없는 비밀도, 죽음도, 인생의 회한도 담담하게, 또는 처연하게 ‘겪어낸다’. 그리하여, 의 서평은 이 작품을 이 한 줄의 문장으로 설명했다. “르미어의 등장인물은 결의와 조용한 절망을 품고 각자의 삶을 헤쳐 나간다”

MBC 의 구애정(공효진)을 보며 이 문장이 떠올랐다. 구애정은 한 때 온 국민의 심장을 두근두근 뛰게 해 준 걸그룹 국보소녀의 가장 인기 있는 멤버였다. 그러나, 10년 후 그녀는 비호감으로 전락한 생계형 연예인이다. 하루에 스케줄이 딸랑 하나밖에 없는 날도 있고, 삼류 나이트클럽 행사를 뛰는 건 물론이다. 다음 주에도 계속 프로그램에 출연하려면 롤러코스터를 타며 자장면을 먹는 비굴한 벌칙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애정은 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다. 과거 자신을 보는 것 같은 새파란 후배한테 까이고, 동료한테 밟히고, 한 때 자신의 매니저였던 이에게는 따귀까지 맞으면서. 지난 10년 동안 구애정이 무슨 잘못을 한 걸까. 정말 그녀가 국보소녀 해체의 원인이고, 불미스런 사건 사고의 주인공이고, 심지어 야쿠자의 현지처이기 때문인 걸까.

구애정도, 독고진도, 당신의 고민과 다르지 않다
[김희주의 10 Voice] 구애정, 브라보 유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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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에서 이 모든 의혹들이 밝혀지든, 어떻게 활용되든 별로 궁금하지 않다. 톱스타 독고진(차승원)은 애정에게 방송에 나가서 우스꽝스러운 헬멧을 뒤집어쓰고 섹시 댄스 따위나 추고 싶냐고 말한다. 이 멸시어린 시선에 구애정은 “그래야지 편집이 안 되죠. 1분이라도 방송에 더 나와야 저도 먹고 살죠. 저는 프로 들어가는데 목숨 걸었어요. 저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바로 그 순간이다. 애정이 독고진에게 MBC 의 전화 퀴즈를 받아달라고 했을 때도, 애정은 자신의 절박함이 할리우드 유명 감독의 캐스팅을 기다리는 독고진의 절박함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한 물 간 비호감 여자 연예인과 국가대표 호감 남자 연예인의 위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 그러나, 애정은 절박하다. 독고진이 절박한 것처럼. 그 순간 은 처지가 다른 남녀가 우연히 얽히고 투닥거리다 결국 사랑에 빠지는 뻔한 로맨틱 코미디의 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면서 새로운 기대를 품게 만든다. 판타지 같은 그들의 삶도, 우리의 삶의 고민과 다르지 않았다.

KBS 의 34세 노처녀 이소영(장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이소영은 갑자기 회사에서 잘렸다. 남자 직원들은 처자식이 딸려 내치지 못하지만 그녀는 워낙 동안이라 재취업하기도 쉽고, 시집가기도 쉬울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위로와 함께. 하지만 그녀가 가진 건 동안만이 아니다. 14년의 경력도 무용지물로 만드는 고졸 학력, 뼈 빠지게 일해 대학 보냈더니 사고만 치는 동생과 매달 이자 50만원과 월세 40만원, 엄마 약값, 그리고 신용불량자라는 딱지, 이것들도 그녀가 가진 것이다. 대학 합격증을 받고 돌아온 집에 빨간 차압 딱지가 붙어 있던 그 날부터 소영 역시 인생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로맨틱 코미디 뒤에 숨겨진 여성의 삶
[김희주의 10 Voice] 구애정, 브라보 유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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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드라마의 시작을 기다린 여성들이 많았다. 제목만으로도 달콤한 기운이 흘러넘치는 로맨틱코미디들이 이후 허전했던 마음 한 켠을 달래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다소 기대와 다르다. 아직 본격적으로 로맨스가 무르익기 전임을 감안하더라도, , , 그리고 어제 첫 회가 방송된 까지 여주인공 캐릭터는 지금까지 봐 온 로맨틱 코미디의 그녀들과 다르다. 한 물 간 전직 아이돌, 내세울 것 없는 신용불량자 노처녀, 아버지가 보증금을 들고 사라진 탓에 의지와 상관없이 가업을 이은 가사도우미인 그녀들은 적어도 자신의 인생은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구원해야 함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로맨틱 코미디로만 알았던 작품들에 우리의 삶이, 또는 모든 것을 짊어지고 어쨌건 견뎌내야 하는 여성의 삶이 있었다.

우리는 자주 스스로가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그래서 결코 예상한 적 없는 삶에 휘말리는 사람들은 본다. 현실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더 솔직해지자. 우리 대부분은 어릴 적 자신이 꿈꿨던 모습으로 현실을 살고 있지 않다. 비단 삶의 황혼기에 회한에 젖어 과거를 떠올리는 어르신들만이 아니라 흔히 성공한 미래를 그릴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자신이 이 현실을 뒤엎을 능력이 없는 초라한 존재임을 깨달아도,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뻔뻔해질 만큼 절박하다고 좀 봐주세요”라며 독고진에게 매달리던 애정과 “이 나이까지 남들 다 가는 시집은 커녕 그 흔한 연애 한 번 못해보고 늙어가고 있다”며 외치던 소영. 그들이 결의와 조용한 절망을 품고 삶을 헤쳐 나가길.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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