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죄는 미워하나 버릴 수만은 없는 존재로 바라봤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정하연: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도 그랬다면 어떤 식으로든 싸움을 하겠는데 그 당시의 시대 안에서 저지른 짓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봐야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문제 같아요. 우리가 바라는 건 재벌들이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가 자신이 만든 것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줬다는 걸 알고, 이제 돌려주고 쓰다듬어서 진짜 자본가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람들도 “이건 아닌데 아닌데 아닌데”하는 마음을 가져야 재벌이든 세상이든 바뀌는 거지 “가만 있어봐 우리 아파트 평수 좀 더 늘리고” 이러면 못 바뀌는 거죠.

의 나영이는 이런 시대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한 가지 방식을 보여준 걸까요?
정하연: 젊은 사람들하고 이야기할 때 그런 말을 해요. 니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한 번 긍정적으로 살아봐라.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열심히 살아요. 내가 이거 아니면 못 살겠다 하면서 원하는 걸 찾아야 하는데 그런 열망이 없으니까 이 산업화 된 시대에 휩쓸려가며 사는 거예요. 후배들에게도 그래요. 진짜로 니가 꼭 쓰고 싶은 걸 써라. 자꾸 기성 작가는 뭘 쓰나 기웃거리면 절대로 작가 못 된다. 그게 진짜로 형편없는 생각이라도 니 관점을 가지고 일을 하면 니 세계가 생길 거고 그러면 그 세계 속에서 니가 행복하다.

“은 작가로서 최고로 행복했던 작품”
정하연 작가 “작가 지망생에게, 진짜로 니가 꼭 쓰고 싶은 걸 써라” -2
정하연 작가 “작가 지망생에게, 진짜로 니가 꼭 쓰고 싶은 걸 써라” -2
정말 욕망의 불꽃을 가져야 한다는 거네요. (웃음)
정하연: 저도 제가 바라는 게 작가로서의 명성 같은 건 아니었어요. 돈이나 사랑도 아니었고. 사실 어렸을 때는 야구 감독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도시락 두 개 싸서 동대문 야구장에 가서 매일 경기를 보기도 했고. 두 번째는 연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옛날엔 좀 잘 생겨서.

하하.
정하연: 진짜 농담이 아니에요. 그 때는 여대생들이 저하고 커피 한 잔 먹자고 줄을 섰다니까. (웃음) 그런데 연기를 하다 보니까 내가 자의식이 너무 많은 거예요. 나는 왜 여기 와서 떠들고 있고, 저 사람들은 저기 있나. 그러다 보면 대사 까먹고 선배들한테 몽둥이로 맞고. (웃음) 그래서 연출도 했는데, 사람들이 연출 보다 글 쓰는 사람을 더 쳐주는 거예요. 그 때 최인호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신춘문예 가작에 됐는데, 걔는 특별대우를 받는 거야. 학교에서도 여자들이 졸졸 따라다니고.

역시 인생의 결정에는 이성 문제가… (웃음)
정하연: 최인호가 연극반에서는 나한테 야단맞는데 밖에서는 내가 걔를 따라다녀야 술이라도 얻어먹겠더라고. (웃음) 그래서 신춘문예에 나가려고 세 작품을 썼어요. 코미디, 토속적인 거, 희극. 그 중 희극이 당선됐는데, 그 작품의 작가를 내 동생 이름으로 썼어요. 정하연. 그게 지금 내 이름이 된 거에요.

나영이의 인생이 괜히 나온 게 아니네요. (웃음) 그렇게 작가가 됐다면 왜 작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이 많으셨을 거 같습니다.
정하연: 작가가 무슨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시나리오도 썼는데 돈을 자꾸 떼먹히고, 그래서 라디오 드라마 쓰고. 내가 원하던 모습하고는 거리가 멀었죠. 그런데 어떤 선배님이 시청률 10%만 돼도 몇 백만이 보는 건데 “이거 하기 싫은 데 내가 왜 해” 이러고 쓸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야단을 치셨어요. 그 때부터 내 직업은 드라마 작가라고 마음 먹은 게 한 이십년 된 거 같아요. 그 때부터 열심히 써요. 요즘은 방송작가 된 것도 괜찮은 인생 같아요.

그런 점 때문에 작가로서의 현실과 이상이 충돌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나요?
정하연: 은 100부작으로 기획됐는데 50부작에서 끝나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이야기가 너무 압축되기도 했고. 제일 아쉬운 작품 중 하나에요. 제가 근본적으로 어두운 성격이 있는데 이 그래도 밝게 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시청률이었어요. 내 나이에 한 번 더 망하면 이제 끝이구나, 그런 절박함도 있잖아요. (웃음) 같은 작품을 하면 사람들이 작가가 시청률을 생각하지 않고 좋은 작품을 하나 남기려고 애쓴다고 봐주지 않잖아요. “그거 이제 늙었나봐” 이러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말씀이네요.
정하연: 정말 그래요. “헤까닥해서 일 못 주겠어” 이러는 거예요. 작가는 방송국이나 시청자가 뽑아주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점에서 참 허탈한 직업이거든요. 그래서 나는 뽑혀야 살 수 있는 주제에도 뭐 하나 성공하면 내가 하고 싶은 걸 우기면서 확 망하고 그래요. (웃음)

처럼 EBS 드라마를 하는 건 그런 못다 쓴 이야기들에 대한 욕망 때문일까요?
정하연: 은 작가로서 최고로 행복했던 작품이에요. EBS는 원래 시청률이 1프로 내외니까. 시청률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완전히 자유잖아요. 내가 그 시절 서울에서 정말 살았기 때문에 그 얘기를 쓸 작가가 나밖에 없기도 했고. 그래서 사람들이 알아먹든 말든 어려운 말 일부러 골라서 쓰는 거예요. (웃음) 문헌 넣고 철학적인 말 막 갖다 쓰고. 문화사 시리즈인데 내가 알게 뭐냐 했어요. 그러니까 막 신바람이 나는 거예요. (웃음)

은 작가가 원하는 바와 시청자가 원하는 바가 적정한 선에서 만난 작품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정하연: 잘 만났죠. 적당히 대중적이고 적당히 계급적인 문제를 다루기도 하고. 내 작품이 성공할 때는 그런 경우였어요. 좀 알아먹을 수도 있으면서도 특이할 때. 나영이 자체가 특이한 사람인데 이야기 자체도 특이하면 뭔가 헷갈리게 되잖아요. 그래서 요즘도 대본 보면 나 잘 썼네 싶어요. (웃음)

부인할 수가 없네요. (웃음)
정하연: 소득이 한 이만 불 넘어가는 시점에서 어떤 물질적인 풍요가 눈앞에 오고, 반대로 자기만 굉장히 빈약하게 사는 것 같은 경계선에 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는 거 같아요. 그런 시대라서 을 쓰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보통 드라마라면 자신이 몰랐던 딸이 나타났을 때 몰래 만나서 울고 뒤에서 보살펴주고 하겠죠? 그런데 나영이는 이게 운명인데 너하고 내가 만나서 뭐 좋냐고 해요. 너는 너대로 열심히 살고, 나는 나대로 열심히 살자고 하죠. 그걸 나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그만큼 자신의 삶에 솔직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거잖아요. 이 시대에는 그런 여자의 삶도 있는 거예요.

“현대사를 담아가면서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다”
정하연 작가 “작가 지망생에게, 진짜로 니가 꼭 쓰고 싶은 걸 써라” -2
정하연 작가 “작가 지망생에게, 진짜로 니가 꼭 쓰고 싶은 걸 써라” -2
에서 나영이가 백인기에게 전형적인 모성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어요.
정하연: 나영이가 자기 딸한테 느끼는 아픔은 다른 아픔들하고도 다르잖아요. 그렇다고 그걸 표현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래서 “난 지독한 년이다 씨도 안 먹힌다 그러니까 잊어먹고 살아라”가 정답이거든요. 괴롭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나영이를 미워할 수 없죠. 자기 책임을 모면하려고 눈물 흘리는 여자가 아니잖아요. 우리는 어떤 삶 속에서든 살아보려고 하는데, 정작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많은 사람들이 참 무개념 하게 사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사람들 때문에 진짜로 착한 사람들이 피눈물이 나는데, 그 와중에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이런 복잡한 주제를 쓰니까 시청률이 안 나오고 (웃음) 언젠가부터 드라마 작가들은 밤낮 “너네 원고료 많더라” 이런 이야기를 듣는데, 그런 것들이 싫어요.

앞으로 드라마 작가들이 그런 정신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요?
정하연: 그 점에서 아쉬운 부분이 많죠. 예를 들어 KBS는 공영 방송이니까 시청률에서 꼭 1등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느 정도 상업적인 드라마를 만들면서도 KBS다운 드라마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걱정스러운 상황이 돼요. 그래서 종편이 시작되는 것도 걱정반 기대반이에요. 시청률이 분산되니까 확실하게 타겟층이 있는 작품, 10% 중반대의 시청률만 나와도 충분한 작품들을 더 많이 제작할 수도 있을 거예요. 반대로 다 같이 더 독한 걸 만들면 자멸하게 되겠죠. 전에 작가 지망생들에게 강의할 때 그런 말을 했어요. 대박 드라마 찾지 마라, 불행하다. 앞으로 다양한 작품들이 평가받는 시대가 올 테니까 자기 목소리를 가져라.

드라마 작가는 무엇을 써야한다고 보시나요?
정하연: 드라마를 볼 때는 그래도 뭔가 얻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에는 배울 거 하나 없는 드라마들이 많잖아요. 예전에는 부끄러워서라도 그렇게 못했는데 요즘에는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들이 버티기 힘들어지고 있어요. 이 명작이라는 게 아니라, 그래도 자부심을 가지고 내 나름대로 정리를 한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게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뒤에 무슨 이야기를 쓰고 싶으세요? 전에 이방자 여사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정하연: 써야죠. 가능하면 현대사를 담아가면서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한 사람은 망해가는 나라의 왕세자였고, 이방자 여사는 원래 천황의 황태자비 후보 중 한 명이었다는 얘기가 있을 만큼 일본에서 대단한 위치였는데 조선의 왕자하고 결혼하게 된 거잖아요. 이런 이야기 속에 한 사람의 인생과 우리의 아픔, 그리고 군국주의로 흘러간 그 시대 일본의 아픔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이방자 여사는 어쨌든 사랑을 이뤘으니까 세기의 사랑이죠.

결론은 사랑이군요. (웃음) 작품에서 늘 순수한 사랑 이야기가 들어가는 거 같습니다.
정하연: 결국 생명을 움직이는 건 사랑이에요. 그리고 연민은 인간의 최고의 가치구요. 왜냐하면 연민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가장 착한 심성이에요. 연민이 있으면 다 용서가 되잖아요. 그 사랑과 용서가 하나가 되면 세상에 그걸 뛰어넘을 게 뭐 있겠어요. 그래서 최고의 가치에요. (웃음)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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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인터뷰. 강명석 two@
인터뷰. 최지은 five@
인터뷰. 김선영(TV평론가)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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