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무엇을 얻었을까. 어린 시절 우연히 만난 한 낭도로 인해 인생이 바뀌고, 사내인 줄 알았던 덕만(이요원)이 계집임을 알았을 때, 연모했던 상대를 왕으로 모실 것을 맹세하며 그가 꿈꾼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족과 갈등을 빚고 목숨을 위협당하고, 정략결혼을 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부족민들에게 배신자로 몰려가며 그가 지키고자 했던 대의는 무엇이었을까. 평생의 정인이자 주군이었던 덕만을 비담(김남길)에게 놓아 보내기로 결심하며 미소 지었던 그 남자, MBC 의 김유신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그리고 엄태웅은 무엇을 얻었을까. 고현정이 천하를 지배하는 미실이 되고 김남길이 청춘스타의 반열에 오르며 이요원은 타이틀 롤의 자리를 지키는 동안 언제나 성벽처럼 이들 뒤에 서 있던 김유신을 연기한 엄태웅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새로운 김유신을 위해 필요했던 맞춤형 배우
엄태웅│느린 사람, 좋은 남자, 오직 한 배우
엄태웅│느린 사람, 좋은 남자, 오직 한 배우
의 김영현-박상연 작가는 작품 초반 우리가 그동안 위인전을 통해 알고 있던, 날래고 용맹스런 화랑이자 자신을 기생집으로 인도한 말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릴 만큼 다혈질의 청년이었던 김유신에 대해 “촌티 나고 정치나 술수도 전혀 모르던 인물이 무적의 군신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데뷔 13년 만에 처음으로 사극에 도전한 엄태웅은 바로 그 새로운 김유신을 위한 캐스팅이었다. 신인 시절 출연한 KBS ‘제주도 푸른 밤’을 비롯해 과 , 영화 , 등에서 평범한 인간의 불안과 고뇌를 지극히 인간적으로 그려냈던 그는 신념과 결핍 사이에서 갈등하는 김유신의 캐릭터를 자신에게 맞는 옷으로 만들어냈다.

“남들이 간단하게 하는 것도 오래 걸려 배우고, 감정에 닿는 데도 한참 걸리지만 어느 순간 조금씩 익숙해져서 옛날에는 할 수 없었던 걸 지금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는 엄태웅의 말대로 김유신 역시 미실의 협박과 회유로 인한 괴로움, 덕만에 대한 연모의 정, 신국에 대한 충성심과 가야 유민들에 대한 책임감을 한꺼번에 진 채 느릿하지만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이다. 연습과 준비까지 근 1년에 걸친 대하 사극의 한 축을 맡아 야전 생활에 가까운 나날을 보내면서도 “배우의 일은 카메라 앞에 서는 것 뿐 아니라 기다리는 것도, 추위를 견디는 것도 포함된다. 계획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안에서 재미를 찾을 수도 있다”고 납득하는 성실함은 이 ‘보통 사람’, 혹은 여느 사람보다도 더 순한 성품의 남자가 그동안 그 치열한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 주는 열쇠이기도 하다.

웃음 뒤에 남은 진짜 인간의 얼굴
엄태웅│느린 사람, 좋은 남자, 오직 한 배우
엄태웅│느린 사람, 좋은 남자, 오직 한 배우
그래서 “수많은 등장인물 가운데 김유신은 가장 계획대로 여기까지 온 인물이고 엄태웅 씨를 통해 벽돌을 하나하나 쌓듯 김유신의 성격이 구축되었다”고 평가하는 박상연 작가는 “다만 여러 가지 제작 여건으로 인해 김유신 캐릭터의 화룡점정이 되었을 압량주 방어선 전투가 밀도 있게 그려지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 때로는 답답해 보일 만큼 우직했던 김유신이 전장에서 그동안 쌓아온 에너지를 제대로 폭발시키지 못한 것은 드라마 제작 시스템의 한계로 인한 아쉬움을 남기지만 당장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은 엄태웅을 가장 엄태웅답게 담아낸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팬들에게는 ‘포스’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사람 다섯 이상 모이는 자리에 가면 몸 둘 바를 모르는, “평생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조차 자신에게 과분한 욕심인 양 조심스러워하는 이 남자는 천부적이거나 천재적인 배우는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인간의 얼굴로 표현할 때, 가장 인간다운 배우가 필요한 순간 우리는 앞으로도 엄태웅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청률 40%가 넘는 드라마에 주연으로 출연해 온 국민에게 눈도장을 찍히고 나서도 “내 인생이 그렇게 달라질 건 없는 것 같다. 변화가 온다 해도 변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지. 괜한 생각 하다가 죽도 밥도 안 되는 수가 있다”며 특유의 ‘흐물거리는’ 웃음을 터뜨리는 이 배우는 그런 사람이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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