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은 모두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내 안의 무언가를 어떤 감독이 발견하고 끄집어 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것 같아요.
윤여정: 영화 에서 어린 여자애가 하나 나와요. 이재용 감독은 그 여자아이 연기를 보려고 두 번째 본다고 할 만큼 흔히 말하는 아역 연기가 아닌데 정말 연기를 잘 하더라고요. 영화보고 나오면서 이재용 감독이 아 어디서 저런 배우를 만날 수 없을까, 라고 하니까 그 말에 (고)현정이가 나도 저런 감독 만나고 싶어요, 라고 외치더라고. 나는 현정이가 그렇게 박치기 할 때가 참 좋더라.

그건 동시에 윤 선생님의 외침이기도 했겠네요.
윤여정: 그럼요. 이혼하고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나에게 오는 역할은 대부분 이혼한 도시여자였어요. 그때 이종환 감독이 나를 이라는 작품에 캐스팅했었죠. 배우가 그런 기회를 만난다는 건 정말 행운인 것 같아요. 다들 나를 도시적이라고 말할 때 이종환 감독은 나에게서 촌스럽고 맹한 모습을 봤나 봐요. 그렇게 찾아주시는 분이 계시니 배우는 그 앞에서 목숨 걸고 열심히 할 수밖에요.

“한때는 내가 배우라는 게 자랑스럽지 않았다”
윤여정│“죽음과 삶이 찰나예요. 다들 재미있게 살아요” -2
윤여정│“죽음과 삶이 찰나예요. 다들 재미있게 살아요” -2
젊을 때는 꽤 과격한 캐릭터를 즐기셨잖아요?
윤여정: 그러니까 나 같은 영화에 출연했겠죠? 오, 이건 좀 다른데? 하면서. 극단적인 사랑에 목숨 걸고, 결국 같이 죽어버리기까지 하니까, 이런 게 정말 사랑이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점점 나이 들다 보니 그것도 변하더라고요. 서른 몇 살 때쯤, 산울림 극단 대표이신 임영웅 선생님이 나를 연극에 끌어들이려고 한참 노력 하셨어요. 봉건주의 시대 어떤 하녀가 열여덟에 주인에게 겁탈을 당해서 인생을 망치고 사창가에 가는 내용의 대본을 보여주셨는데 저는 못하겠다고 그랬어요. 그때의 나는 열여덟에 몸을 망쳐도 창녀가 되는 방식으로 인생을 망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오히려 입 꼭 다물고 좋은 남자 만나면 모를까. 결국 내 피가 끓지 않는다면 가짜 연기가 될 것 같았으니까.

박철수 감독이 연출하고 김수현 작가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는 정말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습니다. 딸의 인생을 망쳐놓은 사람들을 스스로 처단하던 그 어머니는 영화사에 보기 드문 강렬한 캐릭터였는데, 그렇게 강한 역할에 대한 욕심은 없으신가요?
윤여정: 요즘은 기운이 떨어졌는지 이제 강한 거 말고 바라보는 거 하고 싶어요. 젊었을 때는 그 안에 뛰어들어서 허우적거리느라 정신없잖아요. 그런데 나이 들면 현장에서 조금 멀리 빠져서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상태를 외로워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내가 즐길 수 있으면 좋겠고. 인생이란 게 어느 날 불이 훅 꺼지는 게 아니라 서서히 페이드아웃 하는 거니까.

본인의 인생관을 거스르는 작품은 아예 선택도 안 하시는 거죠?
윤여정: 네, 그건 잘 할 수 없으니까. 못할 것 같은 건 안 해요. 아니다. 한 것도 있었어요(웃음).

어떤 거요?
윤여정: 대본이 왔는데, 20페이지쯤 읽다가 프로듀서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이거 다른 배우에게 갈 대본인데 나한테 온 것 같다고 했더니 아니래, 그래서 감독을 만났는데, 공부 잘하게 생긴 젊은 감독이 나와서 그러더라고, 선생님이 이 영화를 꼭 해줘야 하고, 안 그러면 영화 못한다고. 물론 결정적인 건 감독이 TV에서 내가 담배 피는 모습을 봤는데, 아, 손가락이 저렇게 섹시한 여자가 있구나 했다는데, 내가 거기에 넘어갔잖아요. (웃음)

물론 건강에는 안 좋으시겠지만 담배 피는 모습이 정말 멋있긴 합니다. 담배는 언제 처음 배우셨나요?
윤여정: 화장실에서는 안 배웠지. (웃음) 대학교 때, 친구가 실연을 했는데 나보고 같이 담배를 피자고 한 게 처음이었죠. 담배란 게 참 이상한 게, 결혼하고 미국에서 살 때는 아예 안 폈어요. 그런데 이혼하고 나니까 피게 되더라고. 아예 모르는 거였으면 이혼하고라도 안 폈겠지. 지금은 하루에 한 갑 정도? 잘 피지 뭐. 이런 기사 나가면 전매청에서 연락 올지도 몰라요. (웃음) 이재용 감독이 하루는 웃는 얼굴로 ‘선생님 CF 들어오시겠어요.’ 그래서 내가 ‘무슨 CF?’그랬더니 ‘공익 금연광고, 담배 피면 피부 이렇게 된다’라고 그러더라고 (웃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순간 순간 재밌게 살려고 한다”
윤여정│“죽음과 삶이 찰나예요. 다들 재미있게 살아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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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라는 직업을 계속 하게 되는 동력은 무엇일까요?
윤여정: 한때 나는 내가 배우라는 게 자랑스럽지 않았어요. 내가 원했던 일도 아니었고, 주변에 잘나가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인지 이 직업을 멸시도 했었고. 그랬다가 내 인생이 이혼 전 이혼 후, B.D.와 A.D.로 나뉘잖아요. (웃음) 그때 돌아와서 배우가 된 것 같아요. 혹 내가 대기업에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해도 10년 동안 어디 갔다 오면 다시 그 회사가 써주겠어요? 그런 조직은 없죠. 그런데 드라마는 영화는 나를 받아들여주고 일을 줬고, 그리고 내 두 아이를 키우게 해 줬어요. 그때부터 나는 굉장히 감사히 연기를 했던 것 같아요. 어떤 역할이든 가리지 않았고. 그리고 그때 알았어요.

뭘요?
윤여정: 내가 연기를 참 못한다는 걸. 그 전에 유명했었던 건 잠깐 얻었던 허명이더라고. 그냥 운이 좋았던 거죠. 그렇게 철들고 연기를 하려는데 그게 안 될 때 너무 비참했어요. 하루는 어쩜 이렇게 연기를 못할까, 왜 이렇게 안 될까, 사는 게 너무 끔찍해서 울었던 적이 있어요. 그러다가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데, 연기를 이렇게 해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노력을 할 수 밖에 없었죠. 그 상황에서 김수현 작가가 보통 이혼한 여배우는 캐스팅 안 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나를 써 줬고, 나는 거기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숟가락을 놓으면서 대사를 하는 신이 있으면 방에서 숟가락을 놓으면서 대사와 행동의 길이가 맞아 떨어지게 놓고 또 놓고, 대사를 녹음해서 듣고 또 듣고. 오죽하면 임예진이 내 대본을 보고, 언니는 진짜 하는 거에 비해서 노력 많이 한다고 농담을 다 했겠수. 그런데 난 그게 부끄럽지 않았어요. 외우는 거야 구구단처럼 외울 수 있죠. 그런데 안녕하세요, 같이 외울 필요 없는 대사 하나를 하는데도 안녕… 하세요? 안녕하세요! 처럼 수 십 가지 톤이 있는 거잖아요. 그저 외우기만 하면 그런 의미가 부여가 안 되는 거고. 사실 열심히 하는 게 창피한 게 아닌데. 왜 우리는 열심히 하는걸 머리 나쁜 걸로 여기는지 몰라. 미국 농담 중에 “브로드웨이는 어떻게 가나요?”라고 물으면 “Practice” (연습)라고 하는 말이 있어요. 저는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도 그렇고 보통 예술가들에게는 연습 없이 주어진 천재성을 기대해서 그렇겠죠.
윤여정: 가끔 어떤 배우들이 우는 신을 앞두고 시간을 달라고 하는데, 그럴 땐 박근형 씨가 이렇게 말해요. 집에서 울고 와. 감정도 집에서 잡고. 물론 모든 사람들마다 주어진 재능에 따라서 개인차가 있겠지만 거기에 노력이 부가되지 않고서는 하기 힘든 일 인 거죠.

에서 김옥빈이 세상이 재미없어요, 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선생님은 세상이 재미있으세요?
윤여정: 노력해요. 재미있게 보내려고. 나는 젊은 사람들 보다 살 날이 많이 남지 않았잖아요. 정말로 주변에서 많이들 가거든요. 작년에 3명이 갔어. 허무하더라고. 죽음과 삶이 찰나예요. 다들 얼마나 멋있는 사람들이었어. 그런데 그렇게 멋있던 사람들도 죽음 앞에서는 한 없이 약해지더라고. 그걸 보면서 생각했어요, 순간순간 즐기면서 재미있게 살자고.

여운계 선생님이 떠나셨을 때도 많은 생각이 드셨을 것 같아요.
윤여정: 같이 작품을 할 때여서 아파하는 걸 옆에서 다 봤었죠. 어느 날 촬영장에 나왔길래 연출이랑 작가한데 왜 아픈 사람을 나오라 그랬냐고 내가 화를 냈었어요. 그런데 그게 본인의지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여자는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그 여자, 배우잖아. 목숨만 부지하고 집에 누워있는 게 살아있는 건 아니잖아. 물론 현장에서 정신이 왔다 갔다 하면 민폐죠, 하지만 전 바로 이해했어요. 여운계는 살아있어! 그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윤여정 선생님 역시 할 수 있을 때까지 연기를 하실 생각이시죠?
윤여정: 그럼요. 대사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민폐가 안 될 때까지. 그때 누가 날 좀 말려줬으면 좋겠어요. 당신 이제 연기하면 안 된다고.

글. 백은하 on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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