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기이한 경험이다.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어디선가 본 듯한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는데 이 영화는 시종일관 낯설다. 지난 10월 28일 개봉한 이선균, 서우 주연의 영화 <파주>는 감독 박찬옥의 순수언어로 기술된 신세계 러브스토리다. 관객들은 매번 커브를 돌 때마다 눈이 휘둥그래지는 큰 사건들을 만나지만 결국 극장 문을 나온 후 남는 것은 짙은 안개 속을 ‘천천히 쏘다니는’ 어떤 남과 여의 이미지다. 시종일관 조용하게 그러나 타협할 틈을 주지 않는 <파주>의 행보는 감독 박찬옥의 그것과 닮았다.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이후 7년 만에 선보인 신작 <파주>는 훨씬 말수가 줄었지만 그 세계는 세월과 함께 더욱 단단히 여물었다. 감히 2009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부르기에 조금의 주저함도 느껴지지 않는 영화, <파주>의 박찬옥 감독을 <10 아시아>가 만났다.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 이후 두 번째 작품 <파주>까지 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박찬옥:
성격이 낙천적인 건지, 막 급하게 스스로를 몰고 가지 않았었던 같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리틀 킹>에서 “우리 동네에 참 한심하고 이상한 아저씨가 있어요. 초를 파는데 초에 불이 안 켜져요” 라고 한 소년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아저씨는 돈 버는 행세를 하고 있는 거지 실제로는 장사에 관심이 없는 거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내가 지금 그러고 있나? 나 역시 뭘 한답시고 흉내를 내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안 그러려고. (웃음)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고 주요배경인 ‘파주’는 명확한 캐릭터를 가진 제 3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만났을 때 저 사람 어떤 사람인건 같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역사와 인상을 보여준 달까.
박찬옥:
예전엔 영화를 찍기 전에 공간을 먼저 떠올린 경우가 별로 없었는데 <파주>는 공간이 큰 요소로 작용했던 건 사실이다. ‘한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던 곳에서 계속 떠나려고 시도하는데 번번이 실패한다’는 설정이 먼저였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떠나고자 하는 바로 ‘그 곳’이 어디냐를 생각하면서 파주가 된 거다. 예전부터 많은 감독들이 특정한 공간을 단순히 공간이상으로 작품에 끌어오려고 한 시도는 많았던 것 같다. 예를 들어 <파고>를 보면 그 공간을 떠나서 그 영화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지 않나. 어 그러고 보니 <파고>고 <파주>네? (웃음)

“이선균은 그 어느 것도 과도하지 않은 배우”

<파주>의 촬영은 최근 본 어떤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더라.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톤을 유지하되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미묘한 질감의 변화까지 살려내는 것이 놀라웠다. 또한 파주라는 도시 풍경이나 철거투쟁이나 대상의 결코 아름답지 않은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파주>의 중식 투로 말하자면) 한 장면도 아름답지 않은 장면이 없었다.
박찬옥:
김우형 촬영감독을 처음 만난 건 단편 <느린 여름> 때였다. 지금도 ‘우형아’ 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친구기도 하고. <느린 여름>은 충무로에서 일 해 본 경험이 있는 촬영감독과의 첫 작업이었다. 나 스스로는 함께 열심히 고민하면서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촬영이 다 끝나고 나서 김우형 감독이 오더니 이러는 거다. “우리 다음에는 ‘같이’ 찍자”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그리고 드디어 이 사람하고 콘티부터 ‘같이’ 작업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거다. 특별히 조율하고 합의하는 과정은 필요 없었다. 우형이 영화 내내 “햇볕이 한 번도 안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물론 이미 시나리오에 ‘안개’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나는 그가 찾아내는 앵글이 참 좋다. 화면이 주는 정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김우형 감독이 담아내는 정서 역시 참 좋아한다. 앵글과 카메라가 있어야 할 곳을 정확하게 찾으면 너무나 환한 얼굴로 기뻐하기도 했다.

아마도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영향이 가장 크겠지만 일반 대중에게 이선균의 이미지는 따뜻하고 사람 좋은 ‘키다리 아저씨’ 같은 느낌으로 많이 각인 된 것 같다. 그러나 <파주>에서의 중식은 어둡다면 어둡고 복잡하고 모호한 남자다.
박찬옥:
이런저런 고려 속에서 중식을 이선균이 연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주>에는 큰 사건 사고가 많이 터지는데 배우에 따라 너무 뜨겁게 연기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면 부담스러울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이선균의 온도는 적당하다 싶었다. 일상의 자연스러운 연기 톤도 가능하고 정극 연기도 가능한데 그 어느 것도 과도하지 않은 배우니까.

시나리오라는 평면은 결국 배우를 만나면서 입체성을 가지게 된다고 믿는다. 중식이 배우 이선균을 만나면서 더해지거나 풍부해진 점은 무엇일까?
박찬옥:
‘신실함’이었다. 원래 시나리오 속 중식은 훨씬 충동적이고 얼치기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캐릭터가 이선균을 만나니 신실한 인물로 바뀌었다. 중식의 캐스팅에 가장 관건은 대학생에서 중장년이 되는 시간을 커버하면서도 어딘가 아직 청년 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였는데 그 점에 있어서도 이선균 본연의 청년스러움이 크게 작용했다.

청년스러움이라는 것은 결코 나이가 만들어내는 건 아닌 것 같다. 삶의 태도일수도 있고 삶의 상태일 수도 있겠다. 감독이 보기에 이선균의 어떤 면이 그를 여전히 청년일 수 있게 놔둔다는 생각이 들던가?
박찬옥:
이선균은 명쾌한 사람인데 반골기질이 있다. 기성의 가치관, 습관화된 어떤 것, 고착된 무언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거부한다. 이선균은 그런 반골기질, 냉소적인 기질이 있는데 특이하고 다행히도 그것이 병리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스타일이다.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하지만 자기 혼자 담아두고 남에게 요구하거나 강요하는 스타일이 아니랄까. 쉽게 타협하거나 게으르게 수용하지 않는 삶의 태도가 그를 계속해서 청년으로 느껴지게 하는 것 같다.

“서우는 그냥 배우로 타고난 사람”

서우는 그간 깜찍함이나 당돌함으로 사랑을 받아왔는데 <파주>에서는 그녀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을 대부분 제거했더라. 건조하고 서늘한 느낌. 그런데 신기한 것이 그 매력을 거세한 곳에서 비로소 서우의 또 다른 매력이 발견되었다.
박찬옥:
은모 역시 8년의 시간, 중학생부터 아가씨가 될 때까지의 커버력을 가장 크게 고려했다. 아역배우 따로 성인배우 따로 두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캐스팅에 한계가 많았다. 처음에 시나리오 모니터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한국, 외국 다 통틀어 은모를 누가 하면 좋을까 하고 물었는데 힐러리 스웽크가 떠오른다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그 배우가 너무 딱이라서 싫더라. 너무 잘 어울리는 느낌이라 오히려 화사했으면 했다. 서우는 아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다. 학습될 수 없는 어떤 표정이 순간순간 저절로 튀어 나오는 식이다. 그건 배우로서 축복이다. 배우들 중에서도 일반인에 가까운 에너지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냥 배우로 타고난 사람이 있다. 서우는 후자다. 그 폭이 좁은 사람은 조절하는 폭도 좁아서 좀 쉬운데, 감정의 폭이 유독 큰 사람이라 그걸 조절하는 게 쉽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그걸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때 전자와 달리 정말 엄청난 걸 보여 줄 수 있다. 서우는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강하다. 동물적인 느낌이랄까. 이선균이 식물적인 느낌이 있으니 그 둘의 조화가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이선균이 ‘키다리 아저씨’의 이미지를 얻고 난 이후는 점차 섹시함과 멀어지는 느낌이었는데 <파주>를 통해 다시금 섹시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찬옥:
꼭 이야기 해줘라. 기뻐할 거다. 모든 배우나 감독은 영화를 끝내는 순간이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시간이다. 특히 이선균은 정말 마음을 다해 이 영화를 찍었던 것 같다. 본인도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옛날에는 탁 찍고 좀 객관적으로 빠져 나와서 자기 연기나 작품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작품은 이게 안 보인다고.

“<파주>는 배덕(背德)에 대한 영화”

1968년 생, 80년대 학번, 한양대 출신. 이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민주화 투쟁, 학생운동 등과 연결되는 느낌이 있다. 역사에게 자유롭지 못한 세대랄까. “왜 이런 일 하세요?”같은 질문과 답을 많이 구해야 했던 세대기도 했고. 중식의 캐릭터는 일종의 목격을 통해 만들어진 걸까.
박찬옥:
중식의 캐릭터의 역사를 말하자면 이 인물이 만들어진 과정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파주>를 만들면서 이 영화는 배덕(背德)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배’를 행하는 자는 은모였다. 은모가 ‘대의를 가지고 다 같이 하는 어떤 일을 망쳐놓고 떠난다’는 설정이 먼저였던 거다. 처음에는 바닷가 작은 섬에서 학자들이 모여 연구를 하는 해양연구소를 배경으로 생각하다가 돈이 많이 들 것 같아서 포기했다. (웃음) 그 다음은 스쾃이라고 버려진 건물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불법 점거하는 설정을 생각 했다. 실제 트리트먼트까지는 스쾃을 배경으로 쓰기도 했다. 그런데 예술가들이나 지식인들이 왔다갔다하는 것도 좀 싫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스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포기했다. 그러다 다 같이 하는 ‘어떤 일’이 철거투쟁이 된 거다. 그러면서 ‘덕’을 행하는 중식의 역사가 역순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을 하던 그 남자가 유배지처럼 파주를 찾아오고 거기 살던 사람은 떠나려고 하는 구조. 부채의식이나 시대에 대한 고려가 특별히 있었던 건 아니다. 설명한 대로 중식은 그런 순서로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거대책위원회, 화염병 투척, 철거 크레인의 등장은 사회적인 의도로 읽히는 게 사실이다. 용산참사 같은 현실적인 뉴스가 작용한 부분도 있고.
박찬옥:
그러게. 시각적인 게 참 강렬한 것 같다. 사실 영화 전체에서 짧은 시간 등장할 뿐이고 그것도 최대한 줄이면서 갔는데 이미지를 강력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80년대도 아니고 극장에서 이런 옛날 이야기를 봐야 하냐, 시나리오에서 철거투쟁 빼라는 충고를 많이 듣기도 했다. 결국엔 예산과 걸려서 영화를 늦게 찍게 만드는 큰 요소가 되기도 했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80년대에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라고 그게 과거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계속 해나갔다. 그런 중에 용사참사가 터졌다. 지금은 오히려 21세기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받아들이시는 것 같다.

<파주>는 은모의 성장기이도 하지만 어쩐지 중식의 행로에 더 마음이 갔다. 아마도 개인적으로 그 또래 남자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처음엔 시대에 대한 부채감, 이후는 선배 아이에 대한 죄의식, 이후는 죽은 아내. 그렇게 쫓기듯 떠밀리듯 살아가던 남자가 비로소 멈춰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박찬옥:
그렇다. 중식은 중식대로 어떤 인생의 정류장에는 도착하는 느낌을 담아내려 했다. 물론 그것이 종착역은 아니겠지만.

“해방기 때 실존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쓸 예정”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와 비교한다면 의도적으로 유머를 제거한 느낌이다.
박찬옥:
첫 번째 영화에서 사람들이 좋아했고 장점이라고 말했던 걸 모두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질투는 나의 힘>의 대사가 좋았다면 <파주>에서는 꼭 필요한 대사를 제외하고는 최소한으로 줄였다. 또 <질투는 나의 힘>이 일상을 정밀하게 묘사한 부분이 있었다면, <파주>는 서사를 아주 크게 갔다. 사람들이 내 영화 지루하다고 왜 아무 일도 안 일어나냐고 해서 <파주>는 사건 사고도 아주 많게 만든 거다. (웃음) 그런데도 지루하다고 하면 할 어쩔 수 없지만.

그래서 <파주>는 결국 멜로 영화일까?
박찬옥:
멜로다. 사랑 이야기다. 사실 처음 트리트먼트에서는 남자, 여자가 아니었다. 누나가 사고로 죽고 매형이랑 사는 남동생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하니 <질투는 나의 힘>의 구조와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질투는 나의 힘>도 동성애적 시선도 많았고. (웃음) 그런데 그 인물이 여자로 바뀌니 동성애라 말하지 않고 멜로라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중식은 은모를 처음 본 순간부터 측은지심이 있었다. “우리 언니 건드리지마”라고 하는 순간부터, 오죽하면 저럴까 싶었을 거다. 그래서 내내 그 아이를 보살펴 주었던 거고. 은모도 처음에는 이 감정이 뭔지 잘 모르다가 따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 남자는 나에게 뭐였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혼자 못 살아간다는 게 두려웠다”는 너 없이는 못살아, 같은 사랑의 표현 일 수도 있고, 내가 형부에게 이런 마음을 품으면 안 되지 하는 경고이기도 했을 거다. 중식 역시 은모를 좋아했지만 롤리타 식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길>의 젤소미나와 잠파노 같다고 생각했다. 외로워 일수도 있고 집착일수도 있고 삶이 피곤해서기도 했을 거다. 그런 투쟁을 장기간 이어가던 사람의 감정상태가 정상은 아닐 테니. 그렇게 키스도 하고 후회도 한다. 원래 중식이 “하나님은 나를 이런 식으로 정신 차리게 하세요”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식은 그 누구보다도 은모를 사랑했다고 말해도 되는 사람이다. 섹슈얼하게는 잠시 며칠 동안 사랑했겠지만,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작품을 보려면 또 다른 7년을 기다려야 할까?
박찬옥:
아니다. 바로 시나리오를 쓸 거다. 해방기 때 실존인물에 대한 이야기인데 예산이 커서 좀 걱정되긴 한다. (웃음) 하지만 이야기를 제작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로만 타협해서 만들기가 싫다는,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 데뷔를 했다고 해서 두 번째 영화 만들기가 보장되지 않는 것처럼 항상 이번이 마지막 영화일 수 있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그 순간 가장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는 거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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