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까 마흔이 되어버렸네요. 하하하” 그렇다, 이 웃음소리다. 유준상은 MBC 드라마 <여우와 솜사탕>의 능글맞지만 미워할 수 없는 노총각으로 얼굴을 알렸을 때부터 커다란 함박웃음이 가득 그려지는 얼굴을 가졌다. 그리고 그 얼굴은 마흔이라는 나이가 생경할 만큼 변함이 없다. 6조각으로 또렷이 쪼개진 복근보다 더 낯설었던 <리턴>의 미스터리한 남자, 웃을 때가 거의 없었던 매사에 심각한 길상(드라마 <토지>) 등 특유의 유쾌함을 배반하는 인물들을 부지런히 오간 뒤에도, 그가 여전히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생활인의 평범함이 14년간의 고비마다 배어 있기 때문이다. 종종 광고라는 작은 틀에 갇히거나 신비주의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는 배우들과는 달리 그 생활의 흔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짙어진다. 속물인데도 어쩐지 마음 쓰이는 의사와 선생님으로 등장한 드라마 MBC <결혼하고 싶은 여자>, SBS <강남엄마 따라잡기>부터 최근작인 <로니를 찾아서>, “엉 까지 말라”는 명대사를 남긴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이르면 유준상은 그저 손바닥만한 자존심에 하이킥을 맞은 태권도 사범으로, 유치한데다 치사하기까지 한 고 국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배우로서 유준상의 야심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5편의 영화를 고르면서 “마지막 한 편은 물음표로 남겨두면 안될까요? 제가 언젠가 찍게 될 한 편의 영화를 넣고 싶거든요. 추천한 영화들이 제 마음을 움직이고 아름답게 한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영화를 할 거예요”라고 말하거나 “DVD를 구하기 어려워 네티즌들이 영화들을 보지 못하면 어쩌죠”라고 걱정하는 그라면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도 남을 것이다. 10여년도 훨씬 전에 본 영화들의 장면 장면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유준상의 영민한 열정은 그 물음표를 곧 느낌표로 바꿔놓을 것이므로.

1. <토토의 천국> (Toto Le Heros)
1991년 │ 자꼬 반 도흐마엘

“이건 진짜 앉아서 열 번 본 영화예요. 누가 저한테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1번으로 꼽는 영화죠. 주인공의 어렸을 때부터 나이들 때까지의 힘든 삶의 과정이 감독 특유의 판타지 덕에 너무 사랑스럽고, 보고 나면 행복해져요.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오리들이 막 지나가는 와중에 ‘붐붐붐~’ 하면서 음악이 나오는 거예요. 영상에 딱 맞는 음악이 함께 나오면 영화가 더 사는 것 같아요.”

토토는 자신이 태어난 병원에서 친구 알프레드와 부모가 뒤바뀌면서 인생이 꼬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난한데다 아버지까지 여읜 자신의 모든 불행을 모든 것을 가진 알프레드의 탓으로 돌리고, 첫사랑까지 잃고 만다. 시간은 흘러 토토는 청년이 되고, 아저씨가 되고, 노인이 되었지만 알프레드 때문에 그의 일생은 한순간도 천국이 될 수 없었다. 개봉하자마자 그해 유럽의 거의 모든 영화제를 휩쓸었으며, 칸 영화제에서도 황금카메라상을 받았다.

2. <브라질> (Brazil)
1985년 │ 테리 길리암

“이 작품 역시 열 번 이상 본 영화죠. (웃음) 영화 초반에 ‘딴딴딴 브라질 랄라라라라라’ 하는 음악이 나오는데 어찌나 두근거리던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일어나서 춤 춰야할 것 같은 정도였어요. 1980년대에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건 대단한 거 같아요.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아주 좋은 영화인데, DVD로 찾기가 힘들어서 아쉽죠. 예전에는 한국어 제목이 <여인의 음모>였는데 <브라질>이라는 원제가 훨씬 더 좋죠?”

국내에서 비디오로 출시 될 때는 <여인의 음모>로, 좀 더 시간이 흘러 TV에서 방영됐을 때조차도 <컴퓨터 환상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된 ‘제목 수난사’를 겪은 작품. 모든 것이 서류작업에 의해 통제되는 20세기의 어딘가에서 샘은 뭔가 다른 특별한 삶을 꿈꾸지만 관료제를 구성하는 누군가의 작은 실수는 딴 생각하는 샘을 처단하게 된다. 시대를 앞선 테리 길리엄 감독의 감각과 화두는 1980년대가 미래로 바라봤던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재에 실로 유효하다.

3. <시계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
1971년 │ 스탠리 큐브릭

“와, 제가 얼마나 좋아하면 이 잔인한 영화를 그렇게 많이 봤겠어요? (웃음)특히 ‘싱잉 인 더 레인’이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요. 또 그렇게 폭력적인 알렉스를 개조시키는 과정도 보아 내기에 쉽지 않은데, 영화 속의 모든 장면들이 묘하게 경쾌하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요. 다소 센 장면들에 숨겨있는 판타지를 느낄 수 있어서 굉장히 아끼는 영화입니다.”

강간과 폭행을 일삼는 알렉스와 친구들은 미래의 런던 곳곳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악행을 벌인다. 그러나 결국 붙잡힌 알렉스는 정부에 의해 인간 개조 프로그램에 투입되고, 과연 ‘악을 처단하는 것은 무조건 절대 선인가 아니면 더 강력한 또 다른 악일뿐인가’라는 물음을 남긴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살해 위협을 받을 만큼 과격하고 폭력적이었던 영화는 영국에선 그의 사후에나 개봉될 만큼 금지작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아카데미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됐고, 뉴욕의 비평가 협회는 감독상을 수여했다.

4. <언더그라운드> (Underground)
1995년 │ 에밀 쿠스트리차

“이 영화도 정말 좋죠?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영화답게 음악도 정말 훌륭하구요. 이 감독은 예전에 <집시의 시간>을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그런데 음반을 구할 수가 없어서 말한 영화들 중에서 <언더그라운드>만 O.S.T.를 못 사서 아쉽네요. <언더그라운드> 역시 영화 전체에 흐르는 판타지가 대단하죠. 특히 하늘로 올라가면서 결혼식 하는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걸 믿기 힘들 만큼 황당한 이야기인데 장면 장면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1995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에게 안겨준 출세작이다. 늘 감독의 영화에서 경쾌한 집시 음악을 선보여온 고란 브레고빅이 만들어낸 아코디언의 선율은 어두운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만들어준다. 꿈에서도 보기 힘들 것 같은 상상력이 총동원된 판타지적인 설정들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사라예보에서 50여년에 걸쳐 지속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다.

5. <노스탤지아> (Nostalghia)
1983년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대학 때 제가 영화연출을 전공했거든요. 이 영화를 가지고 신(scene) 분석을 했는데 진짜 열 번이 뭐예요, 훨씬 더 많이 봤죠. 몇 개의 신으로 구성됐는지를 세어보는데 롱테이크가 어찌나 많은지 총 신이 96개 정도 밖에 안되더라구요. 잠들었다가 다시 깨서 세고, 또 세다가 잠들고 그러다보니까 열 번을 넘게 봤죠. (웃음) 그래서 본 지 정말 오래됐는데도 아직도 세세하게 다 기억해요. 사실 끝까지 보기가 쉽지 않지만 다 보고 나면 ‘아 이래서 좋은 작품이라고 하는 구나’를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누군가는 <노스탤지아>를 두고 걸작이라 칭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생애 가장 지루한 영화라고 난도질 한다. 사실 10분 이상 한 곳만을 비추는 카메라의 집요한 롱테이크에 눈꺼풀이 무겁지 않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란한 볼거리의 향연보다 곱씹을 의미들이 곳곳에 산재한 영화를 보는 시간은 결코 아깝지 않다. 최근 예술영화 전용관 씨네큐브 운영을 경제적인 이유로 접게 되어 안타까움을 남긴 영화사 백두대간의 ‘예술영화 르네상스 프로젝트’ 첫 번째 영화로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다.

“계속 뮤지컬을 하면서 영화도 찍는 게 가장 큰 행복”

“너무 행복했죠. 통영에서의 시간이 어떻게 간 줄 모르겠어요. 촬영이 다 끝나고 떠나기 전에 김상경 군이랑 감독님이랑 엄청나게 큰 전복에 소주를 마시면서 항구를 바라보는데… 그 시간이 너무 좋았고 놓치기 싫었어요. 지난여름이 회상되는 좋은 영화가 나올 것 같아요.” 유준상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이어 홍상수 감독과 두 번째로 함께 한 <하하하>를 최근 끝마쳤다.

통영에서의 시간을 이야기를 하는 내내 “영화 찍는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는 유준상은 음악이 좋았던 영화를 말할 때는 꼭 흥얼거려서 불러주는 천상 노래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비 오는 거리에서 춤추게 만들었던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면서 배우의 꿈을 꾼” 소년은 “계속 뮤지컬하면서 영화도 찍는 게 바람이고, 가장 큰 행복”인 배우가 되었다. 작품을 하지 않는 동안도 “노래와 춤을 꾸준히 연마”하고, “원칙을 지키면서도 자유로운 생각들을 할 수 있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유준상은 자신의 바람대로 언제까지고 영화를 찍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것이다. 그리고 무대와 스크린에 선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즐거움도 계속 될 것이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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