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순재의 역사를 짧은 지면 안에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1935년생, 75년의 삶 가운데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언제나 현역이었던 그는 한국 TV 드라마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함께 해온 방송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텔레비전 방송국은 요즘 같은 중앙방송이 아니라 1957년 종로 네거리 보신각 옆에 HLKZ-TV라는 걸 만든 게 처음이었어. 그 땐 드라마도 생방송이었는데 대학 재학 중에 드라마 두세 편에 출연했지. 그런데 59년에 불이 나서 방송이 다 중단되고 61년 12월에 KBS가 개국한 거야. 그 때 개국 첫 프로로 유치진 선생 희곡을 드라마로 만든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 출연했지. 그러다 TBC가 개국하면서 전속 탤런트 1기로 남자 여섯 명, 여자 세 명이 스카우트돼서 본격적으로 텔레비전에 출연하게 된 거야.” 받아 적는 그대로 한국 방송의 역사가 될 그의 기억들은 5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여전히 또렷하고 흥미롭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일 연속극 주인공(TBC <눈은 나리는데>), 최장수 일일 연속극 주인공(KBS <보통 사람들>), 최고 시청률의 일일 연속극 출연(MBC <보고 또 보고>) 등 다양한 기록들을 포함해 김수현 작가(KBS <목욕탕집 남자들>, MBC<사랑이 뭐길래>), 이병훈 감독(MBC <허준>, <이산>)의 주요 작품에서도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배우로 활약했던 그에게는 지금도 영화와 드라마에서 적지 않은 러브콜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는 대중의 눈에 비춰지지 않는 순간에도 배우로, 혹은 ‘어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10월 개막하는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의 심사위원장을 맡고, 세종대 연극영화과에서 7년째 ‘연기 프로젝트’ 과목을 가르치는데 “1주일에 4시간 수업인데 연기 지도는 그렇게 해서는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기말 공연 작품이 정해지면 매일 저녁 연습을 시킨다”며 열정을 보인다. 이 날 그는 오후 촬영을 마친 뒤 자신이 속한 지역 사회의 저소득층 가정 영유아 지원 센터 오픈 행사에 참석했다가 돌아와 새벽 촬영을 이어가기도 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요구에 대해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하나의 공중 서비스 차원에서 수용한다는 그가 2007년 MBC <거침없이 하이킥>을 함께 했던 김병욱 감독의 새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 출연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백혈병으로 투병하는 어린애들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 애들 어머니들이 나한테 고맙다고 그러는 거야. ‘우린 평생 웃을 일이 없는데 <하이킥> 보는 그 시간에만 웃어요’ 라면서. 요즘 경제가 어렵고 정부도 침몰하고 있는데 우리가 짧은 시간이나마 국민을 즐겁게 하고 웃게 만드는 걸로 사회적 기여를 하고 싶어.”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으며 더 ‘큰 웃음’을 만들어내곤 하는 그가 의욕적으로 덧붙인다. “그리고 또 하나, 슬랩스틱 코미디라는 건 억지 갖고는 안 된다는 걸 제대로 좀 보여 주려고.”

KBS <풍운>
1982년 극본 신봉승, 연출 황은진

“80년대 언론통폐합으로 TBC가 없어지면서 TBC가 만들었던 좋은 드라마들의 역사도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어. 나도 개인적으로 한 2년 정도 공백이 있었는데 <풍운>에서 대원군 역할로 나를 불렀지. TBC 시절에도 <인목대비>에서 광해군 역할이나, <연화>의 악역 민대감 역할 같은 사극을 많이 했지만 이때는 내가 언론통폐합을 당한 입장이니까 공감 가는 부분도 있고, 또 이번에 좀 제대로 해서 새로운 대원군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전력투구를 했지. 이걸로 대한민국 방송대상을 탔는데, 정작 KBS에선 대개 그 시간대 드라마를 잘 하면 주는 대상을 안 주더라구. 그치만 그까짓 것 나한텐 상관없는 거구.”

SBS <꿈의 궁전>
1997년 극본 윤정건, 연출 운군일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온 드라마였는데 당시 주말 시청률이 최고였어. 내가 맡은 인물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고 현역에서 은퇴한 노인이 집안에만 앉아 있는 대신 또 다른 일을 찾아서 노년의 활동을 해 나가는 레스토랑 지배인이었지. 그 때 당시는 요즘 말하는 ‘실버 제너레이션’이다 뭐다 하는 개념이 나오기 이전이었는데도 그런 새로운 캐릭터를 제시하니까 사람들의 평가도 좋고 나도 재미있었어. 그리고 나중에는 실제로 은퇴 후 활동을 하는 노인들도 늘어났지.”

MBC <거침없이 하이킥>
2007년 극본 송재정, 연출 김병욱

“그동안 아주 카리스마 있는 역할도 해 봤고, 홈드라마의 아버지 역할, 악역, 사극의 왕 역할 같은 것들을 다 해봤는데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본격적으로 웃기기 위한 슬랩스틱 코미디를 했지. 그런데 희극이란 것도 별안간에 웃기고 끝나는 게 아니라 앞뒤가 맞고 전제가 있어야 해. 작품이 희극성을 띠는 것 뿐 아니라 배우의 표현이 적절하고 타이밍이 맞아야 관객의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 거지, 배우가 어거지로 이상한 몸짓을 하고 현실성 없는 상황을 만들면 그 순간은 웃기더라도 그게 진정한 웃음은 아니야. 코미디 프로에서 코너들이 자꾸 없어지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

“배우는 새로운 걸 만들어 보겠다는 욕구와 의지가 있어야 해”

수많은 신인 연기자와 스타들은 언제나 진정한 배우, 수명 긴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롤 모델로 첫손에 꼽히곤 하는 이순재는 답한다. “일단 젊은 주인공이 중년 이후로 넘어오는 과정에는 연기력이 바탕이 되어야 해. 그리고 뭣보다 중요한 건, 배우도 하나의 예술인이고 창조 작업을 하는 사람이니까 창조 의욕이 쇠퇴하면 안 돼. 나이가 들고 나면 타성에 젖어서 ‘아, 이건 대충 이러면 되겠지’하며 똑같은 연기를 해버릴 수도 있는데 관객들은 그걸 금세 알아보고 재미없어 해. 물론 그 자체로도 그 배우의 비중이나 명성이 있으니까 만족할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는 항상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 보겠다는 욕구와 의지가 있어야 해. 생명력은 거기 있는 거야.” 데뷔 53년차, 여전히 대기실 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밤샘 촬영을 마다하지 않는 노배우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공기를 울린다.

사진제공_MBC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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