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를 했다. 교복 입고 머리 빡빡 깎고 규율에 갇혀 사는 학교생활을 더는 견딜 수 없어서였다. 수업 거부를 주동하다 교무실에 끌려가 매를 맞고 각서까지 몇 차례 쓴 다음이었다. 집안은 유복했고 성적도 좋았다. ‘미래의 서울대 top이 될 인재들’로 뽑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따고 입시 학원에 등록했지만 매일 학원 대신 시간을 보낸 곳은 경복궁 앞 프랑스 문화원이었다. 프랑스 영화에 영어 자막을 달아 한 편에 50원의 입장료를 받던 그 곳에서 하루치 표를 몽땅 사서 영화에 미치고, 음악에 미쳤다. 아무 대학에나 들어가 자유를 얻겠다는 생각에 연세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소년의 꿈은 히피였다. 피아노를 치고 작곡을 하고 글을 쓰고 자유롭게 떠돌며 살고 싶었다. 리차드 바크와 생 떽쥐베리가 롤 모델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비행기 조종사라는 걸 알고 항공 학교에 다니며 비행기 조종을 배웠다. 그런데 그에게는 고소공포증이 있었다.

F4의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KBS <꽃보다 남자>로 대한민국에 F4를 데려온 그룹에이트 송병준 대표의 청소년기는 말 그대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이후의 스토리 또한 여느 만화 주인공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다. 우연히 접한 인류학에 미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던 그는 박사 학위를 받고 미시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교직이 천직은 아니라는 생각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음악을 업으로 해볼까 하는 생각을 그 때 처음 했죠. 그런데 그냥 음악이 아니라 영상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데모 테이프를 들고 무작정 방송국 문을 두드렸을 때 우연히 만난 이가 당시 주목받던 신예, MBC의 황인뢰 감독이었다. 한 ‘시대’를 만들어낸 만남이었다.

90년대를 거치며 황인뢰 감독의 수많은 작품은 물론 <결혼 이야기>, <101번째 프로포즈> 등 영화와 광고, 드라마 음악 수백 편을 작업했던 ‘음악감독 송병준’은 드라마 유통 사업을 거쳐 2000년 초반 드라마 제작사를 설립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덤볐어요. 편성을 잡는다는 게 어떤 건지, 연출자와 작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방송사의 아젠다는 무엇인지, 투자와 배급은 어떤 구조로 이루어지는지, 정부의 지원은 뭐가 있는지를 하나하나 배우는 과정이었죠” SBS <명랑소녀 성공기>를 시작으로 KBS <미안하다 사랑한다>, MBC <환상의 커플>, <궁>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SBS <비천무>를 사전제작 했다 뼈아픈 실패도 맛봤고 올해 초 KBS <꽃보다 남자>로는 높은 시청률과 완성도에 대한 비난을 동시에 얻었다. 하지만 1년의 사전제작 기간을 거쳐 방송 중인 MBC <탐나는도다>를 만들며 대본 회의는 물론 음악 편집, 서우, 임주환 등 배우들의 연기 지도까지 직접 했던 송병준 대표에게는 여전히 창작자와 사업가의마인드가 공존한다. “만약 제가 절대적으로 음악만 하려 했다면 정말 예술이라는 강물 속에 머리 꼭대기까지 담그고 그 안에서 아가미 호흡을 해야 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사업을 하면서 직접적 생산자 대신 한 발짝 떨어져서 조정하는 일이 제 역할인 거죠”

MBC <베스트셀러 극장 – 샴푸의 요정>
1988년, 극본 주찬옥, 연출 황인뢰

“황인뢰 감독님의 <베스트셀러 극장> 중에는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이유’ 처럼 문학성이나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이 있었고, ‘샴푸의 요정’ 처럼 상업성이 굉장히 돋보이는 작품도 있었어요. 당시 가벼우면서도 톡톡 튀는 로맨틱 코미디 같은 장르가 할리우드에서는 상당히 인기 있었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렇다 할 작품으로 나와 있지 않았거든요. ‘샴푸의 요정’은 단막극을 통해 그런 걸 보여 준 작품이었죠. ‘빛과 소금’의 장기호 씨와 함께 주제가를 만들었고, 제가 잠깐 출연하기도 했고, 드라마 속 스튜디오 장면도 제 스튜디오에서 찍었어요. 생각해 보면 단순히 음악만 했다기보다는 감독님과 뭔가를 같이 만드는 게 항상 좋았던 것 같아요.”

MBC <창 밖에는 태양이 빛났다>
1992년, 극본 박정화, 연출 황인뢰

“이 드라마에서도 음악을 맡았는데 어쩌다 보니 헌팅부터 장소 섭외까지 다 같이 하게 됐죠. 괌과 팔라우 로케이션이 있어서 현지 조사차 같이 갔다가 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통역도 하고, 심지어 봉 들고 교통정리까지 했어요. (웃음) 음악감독이 아니라 현장 연출부 막내였죠. 게다가 간 김에 ‘두보’라는 꽤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연기까지 했는데, 감독님이 내 출연 분을 찍으면서 한심해 죽으려고 하시더라구요. 하지만 연기가 본업이 아니란 걸 아시니까 차마 화는 내지 못하고, 나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고. (웃음) 촬영을 마친 뒤에 ‘내가 지금 음악가 데리고 다큐멘터리 찍는 거냐?’라며 서로 킬킬거렸던 기억이 나요.”

MBC <연애의 기초>
1995년, 극본 황선영, 연출 황인뢰

“감독님과는 작품을 하면서 정말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저는 가끔 인류학 기법을 들어 드라마 형태에 대한 의견을 내기도 했는데, 한 번은 여러 사람을 동시에 각자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연구 방법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런 드라마를 구성해보면 재밌을 거라는 제 얘기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지만 <연애의 기초>는 16부작을 4부씩으로 나눠서 방송작가, 배우, 감독, 시청자의 입장을 각각 그린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졌죠. 황인뢰 감독님은 어떤 새로운 시도나 의견을 항상 귀담아 듣고 빠르게 캐치해서 표현해 내는 능력을 타고났던 것 같아요.”

참신한 소재와 빼어난 영상미, 전통 문화와 드라마의 융합 등 눈여겨 볼만한 지점이 많음에도 시청률에서 고전하고 있는 <탐나는도다>에 대해 송병준 대표는 “드라마라는 매체의 특성과 편성 시간대의 중요성을 간과했던 것 같다” 라며 아쉬워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운 소재와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펼쳐내는 데 관심이 많다. 요즘은 드라마 <장난스런 키스> 뿐 아니라 뮤지컬, 중증장애원숭이에 대한 실화 <다이고로야, 고마워>를 각색한 영화도 준비하고 있다. 돈이 될지, ‘대박’이 터질지는 물론 알 수 없다. 대신 사업가의 얼굴을 한 소년이 고백한다. “음악 하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음악이 인생의 모든 것이고 이게 아니면 무엇도 상상할 수 없는 전부’라고 해요. 그런데 저에게 음악은 너무나 소중한, 평생 갖고 놀아도 안 질리는 장난감이에요. 하지만 장난감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저에겐 드라마나 영화 같은 콘텐츠를 만드는 것도 평생 질리지 않을 장난감 같아요.”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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