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는 2020년이 되면 원더키디가 날아다니는 세상이 올 줄 알았다. 그러나 2009년에 그리는 2020년은 발전을 꿈꾸기 보다는 문화적, 정신적으로 퇴보일로를 걷고 있는 황폐한 시절에 가깝다. 언론은 제 목소리를 잃고, 대중은 펜 든 손을 꺾이는 이 무렵에 저작권법 개정은 충격과 공포를 부풀리는데 일조 하고 있다. 법이란 어떤 문장을 쓰느냐가 아니라 그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2020년의 어느 날, 험난한 세상살이에 지친 제자가 모교의 스승에게 보내는 이메일이다. 진실 규명을 위해 부득이 하게 개인의 이메일을 공개 하며, 사실 왜곡을 피하기 위해 전문을 개제한다. 그리고 이 편지에는 저작권이 있으니 무단 도용 및 인용을 금한다. 소리 내어 읽으며 발음 연습하는 동영상을 올려도 안 된다. 어쩔 수 없다. 그게 지금 세상의 이치라는 건 다들 알 테니까.

교수님께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 지요. 오래간만에 인사드립니다. 계절은 어느덧 여름이라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눈이 부시기만 한데 더운 날씨에 지치시지는 않으셨는지 걱정입니다.

어려서는 세월이 화살처럼 빨리 간다*는 그 말을 잘 몰랐는데, 졸업 사진을 찍던 날을 돌이켜 보니 옛 어른들의 말씀은 틀린 곳 하나 없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됩니다. 공식적으로 배포되는 사진으로서 이미 피사체 저작권 등록 된 포즈는 쓸 수 없어 졸업 사진을 그냥 포기해 버리는 친구들이 한 둘 아니었지요. 저 역시 누구의 움직임도 아닌 저 만의 몸짓을 개발하느라 사흘 밤낮을 꼬박 고민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진 값에, 앨범 값도 만만치 않은데 포즈 값을 내면서까지 사진 촬영을 강행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평생 한번 찍는 대학 졸업 사진이랍시고 제 블로그에 사진을 올렸다가 포즈 표절로 고소당한 학우의 사례를 듣고 나서 더욱 악착같이 금지 포즈를 피하려고 했던 기억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데 말입니다. 그저 학생일 때는 몰랐던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된통 겪고 나니 다시금 선생님의 가르침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세용 응원가도 마음껏 개사해서 부를 수 없고, 패러디 포스터도 제작할 수 없던 썰렁한 총학생회장 선거 기간 중에 저작권이 말소된 노래들을 찾아 주셨던 일은 아직도 감사합니다. 물론 저작자 사망 후 50년 이상이 지난 곡들이라 대부분 학생들이 모르는 노래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은 언제나 제가 무심코 저작물을 도용할 때마다 저를 꾸짖어 주시는 준법의 등대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갓 입학했던 봄이었나요. 교정 벤치에 앉아 북유럽의 멜로디를 한 소절 휘파람으로 부르고 있었을 때, 마침 자리를 지나던 선생님이 저를 발견하시고는 크게 야단치신 일이 있었습니다.

“이 정신 나간 녀석 같으니. 그렇게 사람들이 다 듣는데서 휘바휘바 노래를 부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게 <미녀들의 수다> 컴필레이션 앨범인 에 수록된 ‘핀란드에 썰매 타루 가세’의 주요 멜로디라는 걸 알고서 그러는 게냐! 니 옆에 있는 개도 제 나름대로 멍멍 하고는 안 짖는 세상인데 참으로 겁 없는 녀석이구나” 하고 진노하여 꾸짖으시는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전 아마 그날 학교 견학을 온 수 십 명의 고등학생들 앞에서 휘파람으로 유행가 멜로디를 분 죄로 검찰 조사를 받았을 게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그 학생들 중 몇 몇은 그날의 풍경을 휴대폰 동영상에 담아 학교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다고 하니 정말이지 십년감수 한 날이었습니다.

그 뿐인가요. 교실 칠판에 기쁜 날을 기념하고자 ‘HAPPY BIRTHDAY’**라고 썼을 때도 제가 선생님을 퍽 곤란하게 해 드렸었지요. 인터넷으로 중계되는 강의였는데 말입니다. 그게 하필이면 저작권 등록된 글씨체인 ‘원더체’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데다가 그 문구 자체가 국제 저작권이 등록된 문장인 줄도 몰랐던 제가 그만 선생님의 수업을 불법의 얼룩으로 물들이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덕분에 지금은 주요 저작권 등록 문구를 100여개는 거뜬히 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으로도 부족했는지, 저는 인턴 생활 두 달 만에 직장을 잃었습니다. 교수님도 구리포터로 알고 계신 구 선배가 일하는 언론사에 입사 했었는데, 시청자 반응 담당이었던 저는 도통 할 일이 없었지요. UCC라도 올라오고, 명대사라도 알려져야 기삿거리가 될 텐데 반응이라고는 재미있다, 없다 몇 줄 글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미 상당수의 유명한 게시판들이 강제 폐쇄를 당한 후라 두 달 동안 제가 쓴 기사는 열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놈의 삼진아웃 때문에 이제는 야구를 보는 사람도 거의 없을 지경이니까요. 특히 드라마 리뷰 기사를 써야 했던 구 선배는 장면 캡처가 불가능하다보니 드라마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 줄 화백을 고용하겠다고 전국의 옛날 극장 간판쟁이들을 찾아다니는 게 주요한 업무였습니다. 그렇게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다 보니 결국 저 같은 인턴들은 별수 없이 해고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선생님. 저는 아직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청년실업이 십년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지만, 저에게도 살 길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제가 노력한 만큼 대가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역시 신화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외람된 말씀을 드리자면, 선생님이 3년 전에 블로그에 손주의 동영상을 올리신 것을 제가 발견했습니다. 옹알이라고는 하셨는데, 이게 그 무렵에 발매된 영유아 자연주의 컨템포러리 앨범 에 수록된 곡과 너무 유사합니다. 그래서 음저협을 고소인으로 한 고소장과 관련 서류들을 첨부해 보내드립니다. 선생님의 엄격한 가르침이 이제야 빛을 발하네요. 선생님까지 하면 벌써 스물일곱 명을 적발했습니다. 쉰 명을 잡아내면 특채로 신설되는 언론통제부 공무원으로 채용될 수 있거든요. 선생님 블로그 링크를 타고 들어가서 또 여러 명을 잡아 낼 것 같습니다. 끝까지 저에게 큰 깨우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늘 준법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소송과 관련 절차들이 끝나면 수박이라도 한통 사들고 찾아뵙겠습니다.
2020년 6월
제자 올림

* 저작권 등록 문장 : 노년 협회 ‘올드 라이트’ : 개인용도 사용 요금 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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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_ 그루브모기(www.groovemogi.com)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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