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세를 짜야지, 베스트로.” 영화 <작전> 속 황종구는 주식이라는 욕망의 난전에서 가장 많이 가지는 자가 되기 위해 이중, 삼중의 판을 짠다. 베스트일 줄 알았던 그 판은 결국 자신을 집어 삼키지만 현실 속의 배우 박희순은 분명 성공률 높은 판세를 짜고 있다. 그것도 베스트로.

12년간 연극을 하다 뮤지컬, 단편 영화를 거쳐 상업 영화의 인상적인 조연까지 그는 촘촘하게 배우의 판을 짜왔다. 영화 <가족>에선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소름끼치는 조폭 창원으로, 그 해 남우조연상을 휩쓴 <세븐 데이즈>에선 괜히 정이 가는 막무가내 김형사로. 그리고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선 ‘우정’이라는 강박 앞에 무력한 남편의 얼굴을 반전처럼 꺼내놓았다. 그렇게 박희순은 급하지 않게 숨 쉴 공간을 만들어가며 대중과 가까워졌다. 마침내 <작전>의 황종구 안에 돈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지만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욕망의 화신을 담아내며 성큼 다가왔다.

박희순은 어느 날 갑자기 벼락처럼 뇌리에 박힌 스타는 아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늘 곁에 있던 친구처럼 은근하다. 우리가 몰랐던 사이에도 십여 년을 연기만 해온 남자. 이제 우리는 겨우 몇 편의 영화로 그를 알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유독 양각으로 도드라지던 배우에게 진한 잔향을 남긴 ‘진짜’ 영화 5편이 여기 있다. 이 영화들이 만들어내는 120여분의 시간 안에서 박희순은 “작은 이야기가 있는 영화”를 흠모하는 씨네 키드이기도, “정말 사랑하고 싶은데” 놓쳐버린 사랑을 그리워하는 남자이기도 하다.

1. <델리카트슨 사람들> (Delicatessen)
1991년 │ 감독 장 피에르 주네

“사람들이 인육을 먹는 센 소재인데도, 예쁘지도 않은 주인공들이 다 사랑스러워 보이는 재기 발랄한 영화예요. 캐릭터들도 하나하나 다 살아있고요.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영화를 다 좋아하는데, 이런 영화를 한국에서도 만들 수 있을까, 감탄하면서 여러 번 봤어요. 아마도 이렇게 독특하고 재치 있는 영화를 한국에서 만든다면 장준환 감독이 잘 만들 수 있지 않을 까요? 하하.”

식량난으로 사람들이 더 이상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된 어떤 시대. 그러나 ‘델리카트슨’ 정육점이 위치한 아파트의 입주민들은 정육점 주인에게 은밀하게 인육을 제공받는다. 이들의 계략에 말려들어 한 덩이 고기가 될 루이종(도미니크 삐농)은 주인의 딸 줄리(마리로어 더그나크)와 사랑에 빠진다. 엽기적인 이야기와 대비되는 따뜻한 색감과 발랄한 위트가 장 피에르 주네 감독 영화가 가지는 일관된 개성의 출발점을 보여준다. 줄리와 루이종 일행의 합주 장면은 인육에 목을 매는 사람들과 대비되며 인간에 대한 긍정을 쉽게 저버릴 수 없게 한다.

2. <언더그라운드> (Underground)
1995년 │ 감독 에밀 쿠스트리차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와 이런 게 진짜 영화다! 라고 느꼈어요. 연극적인 상상력과 영화적인 상상력이 절묘하게 조화된 스케일이 큰 영화인데요, 왜 그런 얘기 우리나라에도 있잖아요. 일제 식민지가 끝난 지도 모르고, 깊은 산속에서 자기들끼리만 살다가 발견된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얘기랑 비슷해요. 그래서 전쟁을 소재로 했으면서도 우리 정서에 잘 맞는 것 같고요. 언더그라운드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게 되는 사건도 너무 뜻밖이었고, 그것 때문에 더 재미있었죠.”

1995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3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이 지루할 새가 없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들이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 특유의 경쾌한 집시음악과 함께 이어진다. 블랙키(라자르 리스토프스키)와 마르코(미키 마노즐로빅)는 전쟁으로 인해 지하세계로 피신한다. 지하와 지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인 마르코는 지하에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일에 그들을 이용한다. 어이없는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 지상으로 나오게 된 사람들은 수십 년 만에 진실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아픈 상처를 간직한 대륙, 유고의 상흔을 전쟁에 대한 조소를 담아 어루만지고 있다.

3. <미치고 싶을 때> (Gegen Die Wand)
2004년 │ 감독 파티 아킨

“사랑 얘긴데, 두 남녀가 열렬히 사랑한다기보다는 서로 사랑임을 알았을 때 그 사람은 여기 없다, 로 설명되는 영화예요. 전 이 영화를 보면서 김춘수 시인의 <꽃>이 생각났어요. 진절머리 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또 진절머리 나는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하고… 보고 있는 저도 참 안타깝더라고요. 저도 사랑을 열렬히 하고 싶은데 그게 참 지진하고, 망설여지고, 고민하고, 그러다 놓치고 그러거든요. 이 영화가 딱 그런 느낌이에요. 보는 데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클럽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술에 절어 사는 남자 카히트(비롤 위넬). 보수적인 가족들에게서 벗어날 길은 자살 아니면 결혼 밖에 없다고 믿는 시벨(시벨 케킬리)은 그에게 계약결혼을 부탁하고, 그렇게 둘은 함께 살게 된다. 미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것만 같던 삶은 서로에 의해 점차 활기를 띄게 되지만 세상은 둘을 행복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흘러가게 한다. 광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던 카히트의 눈이 속절없이 지나가버린 사랑에 대한 슬픔으로 변해버렸을 때, 영화는 안타깝게 막을 내린다. 2004년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4. <피와 뼈> (血と骨)
2004년 │ 감독 최양일

“영화 보면서 무섭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아메리칸 싸이코>의 싸이코보다 여기서 기타노 다케시가 더 무섭더라구요. 영화 속 일본의 가족에 대한 정서가 우리나라하고도 비슷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의 연기를 보면서 어떻게 다른 해석을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이었어요. 아직 제가 아버지, 아니 남편도 못해봐서(웃음) 그 상황을 100퍼센트 다 실감하진 못했지만 기타노 다케시의 연기 덕분에 전율을 느끼며 봤어요.”

재일교포 2세 작가 양석일이 실제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쓴 원작을 역시 재일교포 감독이 영화화했다. 김준평(기타노 다케시)은 가족들에게는 죽어 없어져 버렸으면 좋을 아버지로, 노동자들에게는 인정사정 없는 수전노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돈과 아들에 집착하는 그는 끝없이 재물을 모으고, 악착같이 일하며 세상의 규율과 도덕과는 무관한 삶을 산다. 그러나 폭력으로 모든 것을 짓밟던 그의 육체도 결국은 늙고 병들어 바스라진다. 일본의 국민 배우 기타노 다케시가 영화 안에서 김준평의 삶 자체를 피 냄새 나게 살아냈다.

5. <록키 호러 픽쳐쇼> (The Rocky Horror Picture Show)
1975년 │ 감독 짐 셔만

“극단 목화에서 12년 정도 연극을 하니까 매너리즘에도 빠지고 답답했어요. 무거운 작품을 주로 하다 보니, 스스로한테도 지치고 다른 걸 하고픈 욕구가 있던 차에 뮤지컬 <록키 호러쇼>를 하게 됐죠. 영화 <록키 호러 픽쳐쇼>의 프랭크 퍼터 박사가 제가 하고 싶었던 캐릭터였거든요. 굉장히 변화무쌍하고, 여기서 팀 커리의 연기에 소름이 끼칠 정도잖아요. 프랭크 퍼터라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가진 인물을 천박하지도 않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잘 표현한 것 같아요.”

바른 생활 커플 자넷(수잔 서랜든)과 브레드(베리 보츠윅)는 스캇 박사에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기 위해 여행에서 수상한 무리들을 만나게 되고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루를 보내게 된다. 남성과 여성을 한 몸에 지닌 외계인 프랭크 퍼터 박사의 농간과 그가 창조한 완벽한 생물체, 박사를 처치하려는 하인 남매의 음모 등 기괴한 사건들이 신나는 음악, 화려한 분장과 함께 끝도 없이 터져 나온다. ‘Time Warp’에 맞춰 춤을 추는 프랭크 박사 무리들에 물아일체 하다 보면 오십견에 딱딱해진 어깨가 절로 말랑해진다.

“영화 이야기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키를 쥐고 있어요”

“호주로 떠나요. 한 달 안에 다 찍어야 하거든요. 하하하.” 한 달 만에 영화 <십억> 사막 로케이션을 끝내야 하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얘기하면서도 박희순의 너털웃음은 기분 좋게 허공을 울린다. 박희순은 살아남는 자가 십억 원을 차지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장PD 역할을 맡았다. 8명의 참가자들이 말 그대로 사막에서 목숨을 걸고, 서로의 바닥을 드러내도록 만드는 인물이다. “저는 조종만 하는 역할이라 액션이 없어요, 오히려 다른 배우들이 고생이죠. 그래도 장PD는 영화의 이야기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입니다.” 주연급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기대작에서도 박희순은 영화의 향방을 좌우하는 중심에 섰다. 박해일, 신민아, 이민기 등 개성 있는 배우들 사이에서 박희순은 또 어떻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까. 한 달 뒤, 사막에서는 황사를 누르는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 올 것 같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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