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라거펠트는 천재다. 만드는 옷도 그렇지만, 시장 상황이나 사람들의 생각을 꿰뚫는 그의 냉철하고도 정확한 시선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누군가 그에게 트렌드에 대해 물었을 때 들려준 대답도 수많은 예 중 하나. “요즘 가장 주목하고 있는 트렌드가 무엇인가요?”라는 물음에 대한 그의 답은 이랬다. “계절에 맞춰 변하는 트렌드는 거죽일 뿐입니다. 그 안에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커다란 줄기가 있지요.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트렌드는 단 하나입니다. 모두가 얼마를 투자해서든, 어떤 방법을 써서든 자기 나이보다 젊어 보이고 싶어한다는 거죠.” 그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젊어 보이고 싶어한다. 주름을 예방한다는 아이크림을 사기 위해 문화 생활을 포기하고, 어려 보인다는 ‘물광’ 메이크업을 배우기 위해 잡지를 사는 건 내 이야기이자 내 친구들의 이야기이며, 당신의 이야기다. 그래, 좋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대체 우리는 얼마나 젊어 보이고 싶은 것일까?

왜 저 20대 초반의 여자는 40대 남자를 두고 30대 중반 여자와 싸우고 있나

KBS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여자 주인공 세 명 중 두 명은 50대, 한 명은 20대다. 세 여자의 직업적 특성에 맞춰 한명인(최명길)은 카리스마 있어 보이는 정장을 즐겨 입고, 은혜정(전인화)은 부드러운 실루엣에 소재에서는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옷들을 즐겨 입으며 최윤희(박예진)는 단정하게 떨어지는 옷들-직선적인 실루엣의 코트나 셔츠 류-을 입는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 여자들의 차림새 어디에서도 나이를 가늠하게 하는 요소란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헷갈린다. 극 중에서 세 사람이 어떤 관계로 얽혀 있는지,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도록 설정되어 있는지를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설정을 혼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의 운명에 따라 다른 삶을 살게 된 세 친구들의 이야기인가? 아니, 세 자매의 이야기였나? 논지를 흐릴 것 같아 참으려고 했지만 이 말을 안 하고 넘어갈 수 없겠다. 난 성유리나 티파니에게 어울릴 것 같은 옷들을 입고 나오는 은혜정 언니도 이해가 안 되지만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최윤희다. 그녀에게 있어 ‘똑똑하다=나이 무시하고 촌스럽게 입기’를 뜻하는 건가? 똑똑하고 지적인 앵커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은 모양인데 광택 있는 코트들이 왠 말인가. 가죽 블루종을 입고 레깅스를 신는 건 좋다만 ‘만개한 연꽃’ 네크라인 블라우스가 거기 어울린단 말인가?

나이에 맞는 스타일은 항상 옳아요

<가십 걸>이나 <더티 섹시 머니> 같은 드라마를 보면 10대 소녀들은 10대 소녀대로, 20대 아가씨는 20대 아가씨대로, 50대의 바람난 엄마는 또 50대 엄마대로 그 나이에 맞게 멋을 내고, 옷을 입는다. 이런 드라마 속 50대 ‘엄마’들은 프릴 달린 블라우스보다는 실루엣이 지나치게 직선적이지 않아서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셔츠를 입는다. 진주 목걸이라도 리본 등의 첨가물이 달린 요란한 것보다는 진주로만 된 것을 한다. 프린트가 전체를 뒤덮고 있는 옷을 입을 땐 마르니처럼 발랄한 분위기가 아니라 다이안 폰 퍼스텐버그 풍의 섹시하되 우아함을 잃지 않는 옷을 선택한다. 반대로 20대의 옷차림에서는 생기발랄함이 묻어난다. 액세서리를 십분 활용하는가 하면, 화이트 셔츠나 검정 재킷처럼 전문직 여성 같은 옷을 입을 때조차 자신만의 옷입기 방법(레이어드를 한다거나, 유머러스함을 추가한다거나 하는)을 통해 ‘젊음’을 드러낸다. 그로 인해 그들 하나하나는 같은 나이 대에 있는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입는 것이 멋져 보이는가를 알려주는 교본이 된다. 우리나라 드라마들은 어떤가? <미워도 다시 한 번>뿐 아니라 <아내의 유혹>을 보면서 종종 ‘왜 저 20대 초반의 여자는 40대 남자를 두고 30대 중반 여자와 싸우고 있나?’ 하는 의문을 갖는 사람은 나 하나뿐인 건가? 정말이지, 나는 잘 모르겠다.

* ‘스타일’ 시절부터 ‘S 다이어리’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부족한 글을 읽고, 격려하고, 채찍질해준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더 좋은 칼럼과 더 신나는 글쓰기를 위해 잠시 쉬려고 합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안녕하시기를.

글. 심정희 ( 패션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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