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터테인먼트_ 보고, 읽는 이의 머릿속을 하얗게 물들여주는 순수한 연애 엔터테인먼트.
화이트 데이 보다 더 화이트하며 밸런타인 데이보다 더 밸런타인하다.

며칠만 더 있으면 온 세상이 하얀 구연산과 사카린의 색으로 물드는 화이트 데이다. 몇몇 사람들은 이 날이 제과업계의 야비한 상술이 만들어낸 ‘짜가 명절’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3월 14일 하루만큼은 불결한 방송작가라고 알려진 나도 평소의 음흉하고 저질스러운 내면을 버리고 여자친구님에게 순결한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내 속에도 아직까지 그런 소년 같은 순수함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32년간의 세월 동안 내 영혼에 쌓아두었던 갖가지 촉수들과 야 애니 속 소녀들과 라면국물을 찍어먹는 미친 비둘기 따위의 속된 취향들은 쉽사리 사라질 줄을 모르니 나는 이미 뼛속까지 저급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도 그 날 하루만큼은 내 마음에 새하얀 도화지 같은 순수함만을 지니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고민하며 인터넷에 들어가 웹 서핑을 시작했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고민하며 돌아다니고 있는데 검색어 순위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는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찬란한 후광 속에 내 머릿속을 비춰주는 순백색의 그 이름은 바로 ‘원.태.연’. “아! 이 분이 있었구나! 그래, 순수하면 또 원태연이지!!!”

화이트데이엔 원터테인먼트!

그렇다. 우리에겐 언제라도 온 세상을 하얗도록 순수하게 만들어주시는 원태연 님이 계셨다. 제 아무리 속되고 저급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도 당신이 쓰신 문장 한마디로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안 나게, 새하얗게 만들어 주시는 원님의 마력. ‘그래, 이번 화이트 데이는 순수한 원터테인먼트로 가는 거야! 하얗고 깨끗한 백치, 아니 백지처럼 달라진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보여줘야지!’

밤을 세워 시를 읽고 노래를 듣고 뮤직비디오를 감상하며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정말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안 나도록, 몸과 마음에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만을 담을 수 있도록.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다. 데이트 약속을 잡고 그녀를 만나러 가는 나의 마음은 두 근 반 세 근 반. 하지만 교통체증 때문에 살짝 늦을 것 같아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원님의 시를 인용하여 미안함을 전했다. “사랑통행 중~ 약속시간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두근두근 구간 복구공사로 인해 사랑통행이 지체되었으니 복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복구공사’ 에서 인용)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나의 이 로맨틱한 말투에 그녀는 깜짝 놀란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훗, 역시 놀랐나 보군. 하긴 이렇게 사랑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하는데 감동하지 않고 배기겠어?’ 그러나 이런 나의 순수함에 맞춰주기가 아직은 쑥스러웠는지 그녀는 이렇게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뭔 소리야, 미쳤어? 빨리 튀어와!”
후후… 쑥스러워 하기는… 좋으면서 괜히 그런다.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화난 척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지어놓은 그녀의 애칭으로 화를 풀어줘야지.
“크림! 나야 케이~ 우리 달콤한 크림~ 기다리느라 힘들었지?” (에서 인용)
다시 한 번 놀란 듯한 그녀의 표정. 역시, 또 감동을 먹었나 보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까지도 이런 나의 변화가 익숙지 않은 듯 이렇게만 대답했다.
“너 오다가 머리에 총 맞았냐?”
후후… 귀엽기는… 이렇게 사람이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그렇다면 다른 원터테인먼트가 또 있지롱~ 나는 여자친구님의 손을 잡고 근처의 가까운 PC방으로 이끌었다. 역시 의아해 하는 표정의 그녀.

“그치? 머릿 속이 하얘지지? 순수해지지? 그치?”

“도대체 PC방은 왜? 게임 하려고?”
“아니야 크림~ 너와 함께 보고 싶은 뮤직비디오가 있어~”
자리를 잡고 앉아 김범수의 를 플레이 하였다. 하지만 제목에서부터 도리질을 하는 그녀.
“뭐야 이게! ? 그냥 짜증보다 더 짜증나는 이야기라고 해라! 어우, 창피해서 내 머릿속이 다 하얘지는 것 같아!”
“그치? 머릿 속이 하얘지지? 순수해지지? 그치?”
이렇게 말다툼을 하고 있는 사이에 노래가 흐르기 시작했고 그녀는 두 귀를 막으며 괴로운 척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악! 나 닭 되서 날아가기 전에 얼른 노래 꺼!”
“왜 그래 크림~ 조금만 참으면 너도 완전히 순수해 지는 걸 느낄 거야~”
그렇게 즐거운 다툼이 계속되는 끝에 노래가 끝나고 반 탈진한 그녀를 보며 나는 이제 그녀도 원터테인먼트의 백미를 맛보아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 이제 영화 시사회 보러 갈 시간이야 크림~”
“뭐…? 또 무슨 영화…?”
“무슨 영화긴~ 뮤직비디오를 봤으니까 이제 본편을 봐야지~ 짠! 여기 시사회 표가 두 장 있지롱~”

“아니 뮤비만 봐도 뭔 내용인지 다 알겠는데 뭐 하러 영화를 또 봐? 나 고문시킬 일 있어? 자, 내가 그냥 줄거리를 다 이야기 해 줄게! 권상우랑 이보영이랑 무지하게 슬픈 사연으로 친해지고 동거도 한다! 하지만 붕가붕가는 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둘이 눈이 맞는다! 근데 권상우는 몸 어디가 아프다! 그래서 이보영을 이범수랑 맺어주려고 한다! 그리하여 둘은 결국 이어지지 못한다! 어때? 이래도 더 보고 싶어? 권상우가 불치병 걸렸다 에 내 전 재산이랑 손모가지를 건다!”
“난 그래도 보고 싶은걸~ 가자 응? 가자~~~”
집요한 나의 설득 앞에 끝내 무릎을 꿇고만 그녀, 지금은 극장 안 내 옆자리에 앉아 커다란 스크린을 마주한 채 하얗게 질려가고 있는 중이다. 눈동자를 보니 이미 초점을 잃은 것이 머릿속이 어제의 나처럼 완전히 비어가는 중 인가보다.
‘거봐… 원터테인먼트를 즐기면 너도 순수해진다니까… 자… 그럼 영화보고 나서는 또 시 낭송해 줘야지… 후훗~ 크림… 손끝으로 코딱지를 파봐~ 네가 팔 수 있는 한 가장 큰 걸로~ 훗~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글. 김종민 (방송작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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