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소녀를 볼 수 없다. 소년이 아닌 누군가와의 혼례를 앞둔 그 소녀는 큰 집의 담장 너머, 사방이 닫힌 방 안에서 혼례를 준비한다. 목욕을 하고, 예단을 준비하고, 곱게 화장을 하고. 하지만 소년은 소녀를 볼 수 없다. 혼례날, 소년은 소녀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고자 하지만, 그가 본 것은 찰나의 순간 스쳐가는 소녀의 무표정한 옆모습뿐이다. 평생에 남을 그 몇 초의 표정. 바로 내 앞에 있는 것 같지만 닿을 수 없었던 그 아름다운 소녀. 1999년 발표된 이승환의 뮤직비디오 ‘당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을 영상으로 완벽하게 그려내며 그 해 m.net 뮤직비디오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소녀, 신민아는 그렇게 우리 앞에 나타났다.

한 때 소년의 연인이었지만, 이젠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는 신비로움을 가진 소녀. 그것은 신민아의 미래를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디선가 우리와 함께 살아갈 것 같지만, 동시에 우리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매력적인 거리감을 선사했다. 신민아는 브라운 아이즈의 뮤직비디오 ‘with coffee’에서 섬에서 사는 남자에게 갑자기 나타난 아름다운 소녀였고,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는 조폭의 중간 관리자였던 주인공이 차마 다가설 수 없는 연정의 대상이었으며, 드라마 <마왕>에서는 마음속에 죄를 지고 사는 두 남자에게 구원의 대상이 된다.

내 옆에 있지만,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신비로움. 신민아는 일상과 환상을 모두 가진 것 같은 얼굴로 현실과 꿈 사이, 혹은 남자들이 도달하고 싶은 어떤 이상향 같은 존재가 되곤 했다. 그래서, 신민아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는 음악들’에 대해 물었다. 소년에게 평생의 꿈으로 남을 ‘당부’속 소녀의 표정으로부터 지금까지, 신민아의 표정은 그에게 빠진 남자들에게 그들이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새로운 세계를 안내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저는 음악을 잘 몰라요”라며 말 한 신민아의 플레이리스트는 인터뷰를 하던 기자를 정말 예상치 못한 세상으로 데려다 주었다.

1. Goran Bregovic의
신민아가 첫 번째로 고른 음반은 이었다. 이 앨범의 아티스트는 <집시의 시간>, <언더그라운드> 등 에밀쿠스트리차 감독의 영화음악을 담당한 고란 브레고비치. 신민아가 그의 음악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집시의 시간> OST를 통해서였다. “원래 집시 음악을 좋아해요. 집시 음악에는 현대 음악에서는 사라진 원초적인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악기로 멜로디를 만들기 전에, 아마도 사람들은 입으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노래를 만들었겠죠. <집시의 시간>의 ‘Tango’같은 곡들을 들으면 그런 원초적인 자유로움이 느껴져요. 동시에 그런 감정을 품고 세상을 떠도는 집시들의 슬픔도 같이 느껴지구요. 꼭 내가 고요한 숲 속에서 슬픔을 안은 채 정열적으로 춤을 추는 느낌? 집시들은 이 음악을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집시 음악은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더 자유롭게 곡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집시 음악의 매력이기도 하구요.”

2. 심수봉의 <꽃>
“심수봉 선생님이요?” 누구나 자기 나이 보다 훨씬 윗세대의 음악을 들을 수는 있다. 하지만 올해 스물다섯의 스타가 심수봉의 팬을 자처하며 대중적으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2000년대의 앨범 <꽃>을 고르는 것은 놀라운 일일 수밖에. “심수봉 선생님의 팬 입장에서, 그 분의 노래는 사람을 과거의 어떤 순간들로 데려놓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아마 선생님의 가사와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선생님의 가사는 다른 사람들이 함께 쓰는 단어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겪은 상황을 자기만의 말로 표현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지난 세월의 기억들을 차분하게 바라보며 흘러 보낸다는 느낌 같은 것들이요. <꽃>에 들어있는 ‘개여울’이 그랬어요. ‘강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라는 가사를 부르는데, 정말 슬펐어요. 그들의 약속은 지켜지 않았고, 그들도 이미 사라졌는데 강물은 흘러가는구나. 저에게는 그런 곡이었어요.”

3. Cesaria Evora의
“여행을 갈 때는 그 지역의 음악을 들어요. 내가 보고 있는 곳을 음악으로 다시 느끼면서 그 곳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 지역의 모습이 떠오르게 되죠.” 그래서, 신민아에게 아프리카는 세자리아 에보라의 노래로 기억된다. 신민아는 에단 호크와 기네스 펠트로가 출연한 영화 <위대한 유산>의 OST에 담긴 세자리아 에보라의 ‘베사메 무쵸’를 통해 아프리카 음악의 매력을 발견했다. “제가 알던 ‘베사메 무쵸’가 아니었어요. 노래를 느낌 그대로 흥얼거리듯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음반을 들을 때마다 아프리카 음악이 우리의 트롯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스럽고, 구성진 느낌 같은 것들이요. 아마 두 노래 모두 음악의 원류에 가깝기 때문 아닐까 해요. 노래는 결국 자연스러운 흥얼거림이잖아요. 슬퍼지면 목소리가 떨리고, 신이 나면 목소리가 꺾이기도 하구요. 그녀의 노래에는 그런 자연스러운 감정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아요.”

4. Yann Tiersen의
영화 <아멜리에>에서 흘러나오던 아코디언 연주를 기억하는가. 그 아코디언 연주가 바로 얀 티에르상의 솜씨다. 고란 브레고비치와 얀 티에르상처럼 유럽의 영화 음악가들은 신민아의 또 다른 음악적 취향 중 하나다. 최근에는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함께 왈츠를>의 음악을 담당한 막스 리히터의 음악들을 즐겨 들었다고. “어린 시절 외국 애니메이션을 즐겨 봤어요. 그러면서 여러 나라의 음악을 자연스럽게 듣게 된 것 같아요. ‘이 음악은 어떤 세대가 들어야 한다’는 것보다는 시대와 공간을 모두 초월하는 음악이 좋아요. <아멜리에>나 의 ‘Les jours tristes’같은 곡들에서의 아코디언은 복고적이고, 따뜻한 느낌을 주거든요. 현재의 숨 가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이런 음악을 들어요. 반대로 막스리히터의 음악들처럼 몽환적인 느낌의 음악들을 듣기도 하구요. 밤에 불을 끄고 음악을 들을 때 저에게 다른 나라, 다른 시간의 꿈을 꾸게 만드는 게 이런 음악들이에요.”

5. 김정미의 <바람/추억>
신민아가 선택한 마지막 앨범은 1970년대를 풍미한 여가수 김정미의 앨범 <바람/추억>이다. 그의 세대라면 이름조차 모르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는 가수. 하지만 신민아는 김정미, 김추자, 그리고 신중현의 이름을 연속해서 언급한다. “예전 한국 뮤지션들에게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감정들이 있는 것 같아요. 유럽이나 아프리카 음악은 가사보다는 멜로디가 먼저 귀에 들어오잖아요. 그런데 1960,70년대 음악들은 다른 것보다 가사가 가장 먼저 와 닿아요.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은 멜로디를 통해서 가사가 가장 먼저 가슴을 때리거든요. 김정미 선생님의 ‘불어라 봄바람’같은 노래가 그런 매력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신중현 선생님의 ‘꽃잎’도 좋아하구요. 옛날 음악을 일부러 찾아서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저는 음악을 들을 때 아무 정보도 없이 들으려고 하거든요. 내가 전혀 모르는 음반을 만나 음악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가는 것 같은 느낌, 그게 음악이 제게 줄 수 있는 기쁨 같아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부딪쳐 보면서 지금의 나를 깨고 싶어요.”

2009년, ‘당부’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의 신민아에게 과거를 돌아보니 어떤 생각이 드냐고 물었다. “글쎄요. 저는 시간은 그냥 시간인 것 같아요. 아직 과거를 돌아보고 내가 어땠었구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대신 계속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그런가? 저는 제가 배운 것 보다 배울 게 훨씬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니까요.” 신민아의 말처럼, 요즘 신민아는 배우로서 지금과는 또 다른 경력을 쌓아나가고 있다. 1970년대의 로큰롤 문화를 다룬 <고고 70>에서는 춤과 노래를 선보여 화제가 됐고, <고고 70>뒤에는 요리를 소재로 한 로맨스 영화 <키친>을 선택했다. “<고고 70>은 내가 하고 싶은 것, 그리고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에 도전한 작품이었어요. 앞으로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부딪쳐 보면서 지금의 나를 깨고 싶어요.” 지난 10년간 우리들에게 닿을 수 없는 세상의 여성처럼 다가왔던 신민아. 이젠 그가 스스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글. 강명석 (two@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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