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방송가에 VJ들이 활약하던 때가 있었다. 음악 프로그램에서 뮤직비디오를 소개하는 역할을 하던 사람들. 하지만 케이블 TV의 음악 전문 채널에서도 음악 프로그램이 사라지고, 그들의 자리에 신인 연예인들이 등장하면서 VJ는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기상은 가장 먼저 VJ로 데뷔했고, 가장 유명한 VJ출신 방송인이다. 1994년 M.net의 VJ로 채용된 이래 단 한 번도 프로그램을 쉬지 않으며 케이블에서 공중파로, 오락 프로그램에서 KBS <세계는 지금>, EBS <부모>같은 교양 프로그램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특히 지난 5년 5개월 동안 진행을 맡았던 M.net <와이드 연예뉴스>는 그에게 연예 뉴스 전문 진행자라는 새로운 영역을 부여했다. 최근 <와이드 연예뉴스>를 떠난 이기상에게 <와이드 연예뉴스>를 떠나는 소감과, 15년 동안 방송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들어보았다.

5년 5개월 동안 진행한 <와이드 연예뉴스>에서 물러났다.
이기상
: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라 아쉽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떠날 때는 “이제 때가 됐군요”라며 (웃음) 나오는데, 이번에는 제작진에게 할 수 있는 게 더 많지 않느냐고 말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내 입장이고, M.net도 요즘 연예 정보 프로그램의 방향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오랫동안 <와이드 연예뉴스>가 1등이었는데, tvN 가 역전을 했으니까. 제작진도 나름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와이드 연예뉴스>가 연예 저널리즘을 제대로 세웠으면 했다”

이후 연예인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프로그램이 유행했다. 그게 대세라는 건가.
이기상
: 연예 뉴스에도 트렌드가 있다. SBS <한밤의 TV연예>같은 공중파 연예 뉴스가 7년여의 전성기를 지나 시청률이 떨어지면서 <와이드 연예뉴스>가 나왔다. 그런데 이젠 그것도 포화 상태가 됐다. 그 때 가 나와서 더 독하고 센 걸 보여줬다. 하지만 <와이드 연예뉴스>같은 정통 뉴스 프로그램도 언제나 그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와이드 연예뉴스>는 처음부터 정보 중심의 뉴스 쇼였다. 뉴스 진행도중 자막으로 각종 차트를 보여주기도 했고. 어떻게 이런 형태로 시작했던 건가.
이기상
: <한밤의 TV연예> 리포터를 하면서 많은 걸 느꼈었다. 인터넷 연예 뉴스가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시대에 위클리 연예 뉴스가 의미를 갖기는 어렵다. 그래서 데일리 뉴스쇼로 가자고 했다. 자막으로 차트를 전달하는 것도 그런 부분에서 필요할 것 같아 내가 건의했었고. 시청자들은 이제 연예 뉴스가 뭔가를 가르쳐 준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보지 않는다. 필요한 정보를 얼마나 빨리, 임팩트있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철저하게 뉴스 전달에만 충실했던 것도 그 때문인가.
이기상
: 나는 멘트에 대한 욕심은 많지 않다. 대신 전체적인 틀 안에서 프로그램을 보려고 한다. 한국에서는 작가가 써준 대본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소화하느냐에 따라 MC의 능력이 결정 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진행자가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의 색깔을 만들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초반에는 코너명을 정하는 부분까지 참여했었다. 워낙 M.net에서 오래 일하면서 함께 일하는 제작진과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가능하기도 했었고. 물론 한국에서는 방송사가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때문에 진행자가 그만큼의 권한을 가지기는 쉽지 않지만, 연예 뉴스 프로그램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진행자가 그런 역량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행자가 나와서 연예인에 대해 몇 마디 조크나 던지고, 그 사람과 얼마나 친한지 얘기하는 건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

그러면 <와이드 연예 뉴스>같은 프로그램이 어떻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이기상
: 프로그램만의 논조를 가져야 한다. <와이드 연예뉴스>가 시작할 당시 경쟁력을 가졌던 건 위클리 연예뉴스에 비해 매우 빠르게 취재를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어디서 찍든 장동건은 장동건이니까 (웃음) 더 빨리 내보내는 쪽이 힘을 가졌다. 그런데 이것도 2~3년 지나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아이템은 노후화 되고, 뉴스를 데일리로 전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해졌다. 그래서 뚜렷한 논조를 가진 프로그램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면 같은 것도 더 깊고 다양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예를 들어 故 최진실 씨 사망 소식을 전할 때 하루에 5~6시간씩 대본 없이 현장 중계를 했던 적이 있다. 물론 그 때 고인의 주변을 지나치게 캐는 연예 뉴스 프로그램에 대한 비난이 있었던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사랑했던 연기자이고, 고인의 떠나는 길은 누구나 보고 싶어했다고 생각했다. 영구차가 지나가는 장면에서 영구차에 달려들어 찍는 것하고 고인에 대한 위로의 마음을 담는 건 전혀 다르지 않는가. 모든 아이템에 그런 논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상황은 열악했고, 독하고 센 연예 뉴스들이 대세가 됐다. 그러나 논조를 가지고 세게 가는 것과 세지기 위해 논조를 갖는 건 다르다. 세지기만 하면 결국 독해진다. <와이드 연예뉴스>가 연예 저널리즘을 제대로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우리나라 방송은 왜 모범생 아니면 날라리만 있어야 하나”

그건 연예 프로그램뿐만이 아니라 진행자에 대한 당신의 관점인 것 같다. 당신은 오락 프로그램 안에서도 좀 더 진지하고 이성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기상
: 그게 케이블TV나 나 같은 케이블 TV의 VJ 출신 방송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공중파에서는 다들 아나운서 아니면 개그맨으로 역할이 양분 돼 있었다. 하지만 연예 뉴스 프로그램에서는 두 가지가 함께 필요하다. 너무 망가지지도 않지만, 딱딱하지도 않아야 한다. <와이드 연예뉴스>같은 경우 데일리 프로그램이다 보니 때로는 대본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날의 뉴스를 보도해야 했다. 그 때 가벼운 코멘트를 던지느냐, 사건에 대해 어떤 관점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프로그램의 성격이 달라진다. 신뢰성을 유지하면서 누구나 쉽게 다가설 수 있게 하는 진행이 무엇이냐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포지션을 지키긴 어렵지 않나. 요즘에는 이른바 ‘들이대는’ 콘셉트의 리포터들이 활약하는데.
이기상
: 사실 10년 동안 버티기 너무 힘들었다. 먹고 살려면 공중파도 해야 하는데, 공중파에서 나 같은 VJ 출신은 포지션이 애매했다. 예능에서는 뻣뻣해 보이고, 교양에서는 날라리 같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 방송은 왜 모범생 아니면 날라리만 있어야 하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한밤의 TV연예>를 하면서 내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됐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좀 더 신뢰성 있는 이미지가 필요하면 나를 불렀고, 반대로 교양 프로그램에서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원할 때 나를 캐스팅했다.

하지만 그만큼 애매한 위치일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그런 정체성을 유지했나.
이기상
: 개인적으로 가수 이은미 씨와 친한데, 그 분 매니저에게 이은미 씨도 이젠 대중적인 노래 좀 불러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이은미인거야” 그 때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자기 색깔을 가져가는 게 어렵지만, 그 색깔을 가져가면 이은미 씨처럼 자기만의 브랜드가 생긴다. 그러려면 욕심 부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좋은 기회라도 나한테 안 맞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 메인 MC라고 해서 내가 독하고 센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운이 아주 좋았다. 나는 매니저도 없고, 누구한테 먼저 무슨 일을 하고 싶다고 어필하지도 못했다. 늘 누군가 전화로 출연 제의를 먼저 해서 일을 시작했다. 방송의 흐름에 몸을 맡기되, 내가 이 방송에서 보여주는 이미지가 무엇인가에 대해 집중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 살아남을 길은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쉽게 전달하는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

그런 자세는 방송에서 살아남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다. M.net에 VJ로 들어오기 전까지 어떻게 살았나.
이기상
: 내 좌우명이 ‘멋있게 살자’다(웃음). 나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너무 학구적으로만 파고드는 것도, 가볍기만 한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아는 것하고 노는 걸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건데, 그게 방송에서도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 당신 같은 사람들은 점점 사라진다. VJ라는 말도 이젠 많이 사용되지 않는다.
이기상
: 그렇다. M.net도 원래는 ‘뮤직 네트워크’였지만 이제는 음악보다는 트렌드 채널이 됐다. 이젠 VJ의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이 활동할 곳은 없다. 하지만 연예 뉴스건 음악 프로그램이건 늘 스탠더드의 역할을 해주는 존재들은 필요하다. 스탠더드가 없으니까 연예 뉴스 프로그램에서는 냉정한 판단이나 이성적인 논조를 가진 뉴스들이 점점 사라지고, 음악 프로그램도 점점 자리잡기 힘들어진다.

앞으로 당신이 해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없나.
이기상
: 음악을 전문적으로 다루면서도 쉽게 전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 나는 메인스트림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음악하고 아주 상관없는 사람도 아니다. 그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주류와 비주류,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들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음악을 전달하고 싶다.

<와이드 연예뉴스> 다음에 당신은 어떤 길을 가고 싶나.
이기상
: 잘 모르겠다. 단 하루도 데일리 프로그램을 해보지 않은 적이 없지만, 그건 모두 내가 그 프로그램에 출연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먼저 찾아온 것들이었다. 내 캐릭터와 주관을 지키면 언젠가는 다음 단계가 왔다. <와이드 연예 뉴스>를 그만 두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라는 얘기구나 싶었다. 이제 또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려야지. (웃음)

글. 강명석 (two@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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