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하진 기자]
연극 ‘베헤모스’로 돌아온 배우 문성일 / 사진제공=㈜PMC프러덕션
연극 ‘베헤모스’로 돌아온 배우 문성일 / 사진제공=㈜PMC프러덕션
반원형의 캄캄한 무대 위, 객석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아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여기서 관객들의 눈과 귀를 집중시켜야만 이후 극이 순탄하게 흐른다. 막중한 사명감을 안고 배우 문성일이 걸음을 뗀다.

연극 ‘베헤모스'(연출 김태형)는 부유한 집안의 명문대생 태석을 둘러싼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각기 다른 이해관계에 놓인 인물의 이야기가 녹아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문성일은 태석 역을 맡았고, 오검사와 이변호사를 모두 상대한다. 그는 원작에서의 수동적인 면을 배제하고 인간이 지닌 사악한 본성에 집중했다. 덕분에 작품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졌고, 태석이란 캐릭터도 살아났다.

10. ‘베헤모스’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내용은 물론 구성, 연기까지 쉬운 작품은 아닌 것 같다.
문성일 : 다른 작품과 다른 특징이라고 하면 드라마를 원작으로 했기 때문에 이미지의 컷이 많다. 물론 관객들이 보기엔 도움이 되는 영상 기법과 무대 활용도 잘 만들어져 있지만 연기를 하는 입장에선 사실 그게 더 힘들다. 이미지의 컷으로 가다 보니까 스톱(STOP) 돼야 하는 것 마저 진행을 하고 있어야 한다. 모든 작품이 집중력을 요하지만, 특히 이 작품은 방심하면 안 된다. 내 턴이 아니더라도 턴인 것처럼 말이다.

10. 연습을 철저히 할 수밖에 없었겠다.
문성일 : 오프닝 다음 태석의 장면 전환이 계속되는 솔로신이 있다. 정말 배우의 힘으로 가져가야 하는 건데, 아직 많이 부족한다는 걸 느꼈다. 배우의 시선, 어디를 바라보는지, 장소 등이 명확하게 구분돼 연기를 하지 않으면 관객들은 따라갈 수가 없다. 혼자 해내야 하는데 그 부분이 많이 힘들었다.

10. 그 장면에서 관객을 몰입시키지 않으면 다음부터 힘들어지니, 부담도 컸을 것 같다. 게다가 태석이란 인물의 감정도 매우 복잡하고.
문성일 : 기본적인 플롯도 어려운데, 태석의 상태가 쉽지 않았다. 살인을 저지른 것에 대해 숨기고 오히려 더 차분해지기 위해서 다른 생각을 하고. 관객들은 ‘저 사람 왜 저래?’라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고. 외줄타기였다. 어딘가로 치우치면 안 되니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애썼다. 할 때마다 연출에게 확인을 받았다. 관객들이 태석의 상태를 보았을 때, 설득할 수 있는 포인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연기했다.

10. ‘베헤모스’는 사실 시국과 맞물려 더 주목받는 작품이기도 하다.
문성일 : 원작과 다르게 가겠다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캐릭터의 변화가 있다. 입체적으로 만들려고 했다. 현재의 상황에 따라, 이 작품이 충격적이지 않다는 반응도 있었다. 어떠한 매체가 다루는 소재보다 현실에서 더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지는 시점에 관객들이 궁금해할까, 늦지 않았나라는 걱정과 부담도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조금씩 캐릭터가 바뀌었다. 오 검사와 이 변호사의 캐릭터는 사실 변화가 없지만, 태석은 다르다.

10. 태석은 원작과 어떻게 다를까.
문성일 : 원작에선 태석이 괴물로 보이지 않았다. 이유가 있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인물처럼 탈출구가 있었다. 그런데 ‘베헤모스’에선 태석마저도 모두 괴물이다. 어느 순간엔 수동적인 인물일 수 있지만, 능동적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이 나오니까, 이 아이는 이기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공포증을 떠나 우선 살아야겠다는 게 키워드였다. 계속해서 이기적인 선택의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연출도 내게 ‘계속 이기적으로 선택하고 있지?’라고 묻고, 나 역시도 주춤하지 않으려고 한다. 처음엔 지나치게 사이코패스처럼 보일까 봐 주춤했었다. 배우가 얼마나 입체감 있고 다이내믹하게 선택하고, 설득이 돼야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쉽지 않았다. 단순히 화만 내지 않게 보이기 위해서 말이다.

10. 그렇다면 성공한 것 같다. 작품을 보면서 태석이 가장 나빠 보였다. 그의 행동 중 가장 늦게 이해한 부분은 어디였나.
문성일 : 스스로를 속이는 인물이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병이든 뭐든 다 이용하는. 그래서 설득이 됐다. 나라면, 내가 죽는 건 정말 싫었을 것 같거든. 그렇다면 스스로도 속일 수 있는 거다. 선택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세 번째 취조 때, 독백을 하는 것이다. 원작과 대사가 다르다. 대본에 있는 그대로 가져가면 태석이가 보이지 않더라. 엄마에 대한 대사가 있는데, 살짝 들어가긴 하지만 바뀐 뒤엔 다른 의미의 대사가 더 부각된다. 덕분에 관객들에게 태석이 얄미워 보이는 것 같다.

10. 캐릭터와 실제의 구분이 조금은 자유로워졌나.
문성일 : 예전엔 구분을 못했다. 공연을 할 때만큼은 낯간지럽지만 그 인물로 살면서 빠져있었다. 작품을 조금씩 하고 거기에 대해 분리를 시키는 것도 터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익숙해진 부분도 있고. 공연을 할 때는 잠을 잘 못잤다. 집에 와서 대본을 몇 번 집어 던지기도 하고 말이다.(웃음) 주위에선 ‘끝나면 바로 놀러 갈 것 같다’고 하는데, 계속 연장이다. 밝은 작품이 아닐 때 미간이 계속 찌푸려지는데 동료 배우가 ‘인상 좀 펴라’고 말해줄 정도였다.

10. 언제, 어디서든 연기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는 노력파인가 보다.
문성일 : 한 동료가 ‘타고난 감각으로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노력하고 고민한 만큼 나오는 것 같다. 다르게 보였다’는 말을 해준 적 있다. 사실 그때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노력하는 사람이란 걸 말이다.

10. 같은 작품으로 호흡을 맞추는 배우들과 돈독한 것 같다.
문성일 : 같은 역할을 하는 배우들에게 배울점이 많다. ‘많이 배웠다’고 실제 말을 하기도 한다. 내게 없는 표현, 생각을 하면 나도 갖고 와봐야겠다고 배우는 거다.

문성일 / 사진제공=㈜PMC프러덕션
문성일 / 사진제공=㈜PMC프러덕션
10. 자신감이 있으니까 인정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문성일 : 일에 있어서는 쿨(COOL) 하다. 하정우의 인터뷰에서 배우의 미덕에 대해 ‘이해심이 많은 배우’란 대답을 보고 와 닿았다. 이유는 내가 어떤 사람을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표현을 하겠나. 나라면 못했겠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인물을 머릿속에 그리고 작업을 하다 보니까 이해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이해하려고 한다.

10. 모두를 이해하며 산다면, 문득 ‘나는 누가 이해해줄까’라는 의문이 들지 않나. 외로울 것도 같은데.
문성일 : 인간으로서 고민이기도 하고, 걱정이다.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공식적으론 스물 넷부터 공연을 했는데, 어느덧 8년 차다. 여행을 못 가봤고, 휴가도 없었다. 주변의 것들을 못 보고 오로지 일만 했다. 그게 가장 큰 행복이자, 재미였다. 현재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까 생각도 많아진다. 그러면서 외로움도 늘고. 쉬는 방법을 모른다는 걸 알았다.

10. 잘 쉬는 것도 참 중요한 것 같다. 돌아볼 시간이 있어야 성장할 수 있고 말이다.
문성일 : 너의 인생을 살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니, 사랑을 줄줄만 알있지 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더라.

10. 연기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바뀌었나.
문성일 : 우선 최선을 다하는 게 기본이고, 예전엔 ‘영리한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어쩌면 추상적인 말인데, 지금은 기분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계속 일하고 흐름을 좇고 작품을 하는데 급하게 만들어내니까 놓치고 흔들릴 때가 있다. ‘왜 그럴까’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찾다 보니까, 기본적인 원칙이 나온 거다. 보고 듣고 말하는, 아주 기본적인 원칙을 그냥 지나치는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쉬운 것 같지만 또 한편으론 가장 어려운 것이다. 공연을 하면서 또 하나 느낀 건, 나에게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상대에 대해서도 그만큼 집중해야 한다는 거다. 한 커플이 있는데, 여성이 울고 있다. 그럴 때 남자의 표정을 보면 왜 우는지 그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연기도 마찬가지이다. 반대로 말하면 나로 인해 상대 배우의 연기가 설명되는, 그걸 깨닫게 된 시기가 온 거다. 이 모든 게 맞아떨어지는 배우라면 ‘영리한’ 것이 아닐까. 예전엔 추상적이었다면, 이젠 설명할 수 있게 됐다.

10. 영리한 배우에 대한 스스로의 정의를 내리게 됐다.
문성일 : 대본을 잘 분석하면 영리한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지금까지 작품을 하면서 연출이 그린 그림 안에 캐릭터를 찾아가기 바쁜 배우였는데, 창작이란 작업을 하는 어느 순간부터 쫓아가는 게 아니라 같이 걸어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10. 많이 배우고 느끼고, 또 외롭기도 한 요즘이다. 그래서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인데, 올해의 계획이 궁금하다.
문성일: ‘킬 미 나우’의 재연에 오르기로 했고, 확정되지 않은 여러 작품을 논의 중이다. 올해는 판을 바꿔보자란 생각을 하게 됐다. 창작 외에 라이선스 작품을 통해 또 다른 배움을 알았으면 한다. 배우로서 자존감이 낮아졌는데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도 할 것이다. 이번 작품을 끝내면 다음은 좀 수월하겠지란 생각을 해도 또 다른 도전이다. 정말 수도 없는 벽들과 새로운 문이 놓여 있더라. 예전엔 어떤 일이 펼쳐질까 마냥 재미있기만 했는데, 요즘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려움이 좀 생겼다. 궁금하지 않는 배우가 되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다. 모두에게 궁금한 사람, 배우가 되고 싶다. 두려움보다 기대를 키우며 다음을 도전하는 배우가 되겠다.

김하진 기자 hahahaj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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