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이은호 기자]
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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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졌다는 건, 어딘가 빛이 있다는 이야기다. 시련이 온다는 건 어딘가 구원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의미. 빛과 그림자 그리고 시련과 구원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지만 반드시 공존하기 마련이다. 지난 6일 발매된 루시아의 앨범 ‘라이트 앤 쉐이드(Light & Shade)’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시련이 있는 곳엔 늘 구원도 뒤따르는 법. 그러니 우리, 배우지 말고 깨닫자. 빛나는 구원을 찾기 위해.

Q. ‘라이트 앤 쉐이드’ 챕터 원 앨범이 지난해 여름 발매됐다. 당시 챕터 투는 겨울에 나온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게 올해 겨울이 될 줄은 몰랐다.
루시아 : 나 역시 작년 가을 즈음에는 챕터 투가 나올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육체적으로 힘들더라(웃음). 발매시기를 묻는 분들이 많아서 부담도 됐고. 죄송한 마음에 ‘녹여줘’라는 싱글을 발매했고, 콘서트 다음날부터 이번 음반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이때까지 쉴 새 없이 달려왔지. 다행히 올해 안에 음반이 나오게 돼서 지금은 마음이 가볍다.

Q. 연작 앨범들은 대게 미니 앨범으로 제작되잖아. 그런데 이번 ‘라이트 앤 쉐이드’는 두 장 모두 정규 앨범이고, 심지어 트랙 수도 많다. ‘빛과 그림자’라는 테마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모양이다.
루시아 : 내가 평균 일 년에 한 장 이상의 음반을 낸다. 다작을 하는 편이기도 하고 앨범 욕심도 있고. 항상 그 해에 내 나이를 대표할 수 있는 앨범을 한 장씩 내려고 한다. 챕터 원이 스물아홉 살의 기억이라면, 이건 내 서른의 기억이 되겠지. 스스로 떳떳하게 자부할 수 있을 만한 앨범이 된 것 같다. 사실 12곡은 나도 처음 해 봤다. 할 말이 많았다. 노래에는 내가 살면서 깨닫고 얻어간 인생관이 녹아나잖아. 올해 서른 살이 되면서 내가 더 넓어지고 포용하는 바가 커진 것 같다. 스스로가 더 열리고 확장된 느낌이다.

Q. 원래 재즈를 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앞쪽 트랙에는 재즈적인 느낌이 많이 묻어난다.
루시아 : 재즈의 장르적 특성을 일부러 넣으려고 한 건 아닌데, 곡의 느낌을 살리려다 보니 자연스레 들어가게 됐다. 스윙의 리듬이나 왈츠 혹은 보사노바의 느낌이 조금씩 섞인 것 같다.

Q. ‘아플래’에서는 알앤비 보컬리스트 같은 느낌도 나고.
루시아 :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목이 계속 아팠다. 내가 성격이 예민하고 스스로에게 혹독하게 구는 편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노래를 부를 때 내 기량이 다 드러나지 못했던 것 같다. 최근에는 서른이 되면서(웃음) 더 넓어지고 편안하고 스스로가 안정된 느낌이다. 마음이 변하면서 목이 아팠던 것도 없어지고 건강해졌다. 그래서 보컬적으로도 예전보다 열려있는 소리로 녹음할 수 있었고. 또 녹음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 늘어가고 있다. 톤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를 계속 연구하면서, 더 선명하고 강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신경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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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수록곡 ‘달과 6펜스’의 경우 동명의 소설이 있다. 그림에 몰두한 화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 그래서 이 노래의 ‘너’는 음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루시아 : 맞다. 내가 많은 곡을 쓰는데, 노래 속 ‘연인’과 ‘그대’와 ‘너’가 실제 연인인 노래는 거의 없다. ‘달과 6펜스’도 마찬가지다. 노래 속 ‘너’는 듣는 사람들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에게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면, 그 사람을 생각하며 들을 수 있겠지. 꿈 혹은 삶 그 자체로 생각할 수도 있다. 풍요롭게 해석될 수 있는 곡이었으면 좋겠다. 듣는 사람속의 세계 안에서 울릴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고전문학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우리가 어렸을 땐, 무언가를 얻고 구하는 게 오로지 책을 통해서만 가능했잖아. 깊은 사유가 필요했고 고찰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는 게 굉장히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래서 고전문학은 읽는 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한다. 현대소설과는 사유의 깊이 완전히 다르니까. 지고의 예술을 통해서 사람은 더 깊어지고 성장하고 강해진다. 사실 이 곡의 가사가 책 내용과 완전 결부되진 않는다. 책에서 느꼈던 정열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사운드도 풍성하고 환상적으로 극화시켜 꾸몄다.

Q. 반면 ‘그 노래’나 ‘잿빛의 노래’에서는 노래/음악이라는 대상을 비유 없이 드러내잖아. 뮤지션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게 더 쑥스러웠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루시아 : 예술에는 1회성 이상의 가치가 있다. 예술의 향기가 작가의 생명보다도 더 긴 작품을 나 역시 하고 싶고. 그런데 요즘에는 예술이나 문학적인 표현들이 ‘오글거린다’는 말로 공격받기 일쑤다. 뮤지션 입장에서 ‘오글거린다’는 반응이 굉장히 두렵다. 아무것도 아닌 말일수도 있지만, 예술성을 말살시키는 단어다. 총살당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자기표현을 줄인다. 더 담담하고, 더 무채색으로. 나 역시 고민했다. 두려웠고. 하지만 만약 그 부분에서 겁을 먹고 타협했다면, 지금의 루시아도 루시아의 작품들도 없었을 거다. 그냥 버텼다. 내 작품으로 설득하고자 하는 고집, 자기 확신이 강했다. 내 표현에 대해서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잿빛의 노래’ 같은 경우는 오글거린다고 바로 총 맞을 수도 있는 가사다. 편곡자도 ‘이런 가사 너밖에 안 쓴다’고 했다(웃음). 곡을 낼 때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는 가사가 그것뿐이었다. 내가 영향 받은 고전의 느낌으로, 내가 음악을 설명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사실 가장 걱정했던 곡이 ‘잿빛의 노래’와 ‘달과 6펜스’였는데,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다.

Q. 얘기를 나누면서 느낀 건데, 예술가로서 당신이 가지는 예민한 감수성과 연예인으로서 보여야 하는 사회성이 상당 부분 충돌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루시아 : 다행히 나는 둘 사이의 분리가 잘 되는 것 같다. 만약 작업할 때의 예민함이 일상에도 섞인다면, 내 삶은 정말 엉망진창이 됐을 거다. 하하. 그리고 우리 부모님이 성격이 완전 반대다. 아버지는 정말 밝고 긍정적으로 재밌는데, 어머니는 순수 예술가다. 달빛의 미묘함까지 느끼는 분이지. 나는 두 분의 성격을 모두 물려받은 것 같다. 무대에 서거나 방송을 할 때에는 아버지의 성격이 나오고, 작업을 할 땐 예민함이라는 꺼내 든다. 아! 작업할 땐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편이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서 다른 사람의 보살핌이 필요하다(웃음).

Q. ‘사이’는 이번 앨범에서 거의 유일하게 말랑말랑한 감성의 노래다. 다른 수록곡들과 이질감이 느껴질 수도 있는데.
루시아 : 예전부터 정규 음반에는 듀엣곡을 실어왔다. 힘들고 어려울 때뿐만 아니라, 행복한 감정, 이를 테면 20대 초반의 ‘썸’ 타는 감정을 대신 노래해주는 것 역시 아티스트로서의 역할이다. 어린 팬들이 이 노래를 특히 더 좋아해주더라. 내 목소리가 중저음이라서 나한테 어울리는 보컬을 찾기가 정말 어려웠다. 미성이면서도 노숙한 보컬이어야 했다. 듀엣 상대를 반 년 가량 찾아 헤맸는데, 같은 소속사 소수빈 군과 톤이 잘 어울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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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타이틀곡 ‘너의 존재 위에’는 CCM 같기도 하고, 메시지도 강하다. 작업도 5년이나 걸렸다며.
루시아 : 그 곡의 테마를 썼던 게 5년 전이다. 정말 좋은 노래가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완성이 안 되더라. 그렇다고 억지로는 할 수 없다. 거짓말이 들어가면 듣는 사람들도 분명히 알거든. 그래서 기다렸다. ‘내가 이 노래를 충분히 이야기할 만한 깊이를 아직 가지지 못했나보다, 이 곡의 무게를 못 따라가나 보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이번에 이 곡이 갑자기 써지더라.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정리가 됐다. 이 노래가 세상에 태어날 준비가 됐구나. 보통 타이틀곡을 정할 때 항상 사장님과 이견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둘 다 이 곡을 타이틀곡으로 꼽았다. 인정을 받은 것 같았다.

CCM 느낌이 난다는 건, 뮤지션으로서 최대의 난제다(웃음). 절대 의도한 게 아니다. 오히려 피하려는 편이지. 아주 어릴 때부터 성당을 다녔는데, 그러다보니 성가, 가스펠을 들으면서 내 음악관이 만들어진 것 같다. 가사에도 ‘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곤 하는데, 종교적인 의미의 신은 아니다. 작가는 자신이 가진 재료들로 곡을 쓰잖아. 그런데 나는 신적인 존재가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거든. 그런 철학이나 주관이 곡에 많이 들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신의 개념은 천주교 안에서의 신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의 신 혹은 관념적인 신이었다.

Q. 아픔과 치유에 대한 노래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주목하게 된 계기나 그걸 내가 치유해줄 수 있겠구나 알게 된 계기가 있다면?
루시아 : 처음 음반을 낼 때는 내가 내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담았다. 당시 괴롭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고, 그래서 나 자신을 위로를 해주는 곡을 썼다. 그런데 그 노래들이 세상에 발매되고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받기 시작한 거다. 나를 위해서 쓴 곡이 내가 전혀 모르는 생명체에게 똑같이 위로를 줄 수 있구나, 똑같이 그를 일으켜 세워 줄 수 있구나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피아노 앞에서 곡을 쓸 때 그 사람들이 생각나더라. 전에는 망망한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젠 상대방이 보이기 시작한 거지. 이번 음반에서 위안과 치유를 의도했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아니다. 다만 내가 지나온 괴로운 시간을 지금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지금 그들이 듣고 싶은 말, 그들에게 필요한 말을. 그러다 보니 나 자신에게 하는 얘기를 쓸 때보다 할 말이 더 많았다. 음악가로서의 혼란과 두려움이 반 이상 사라진 것 같다. 더 견고한 땅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옳게 가고 있구나, 내 시간을 훌륭히 썼구나. 스스로 떳떳할 수 있는 음반이 된 것 같다.

Q. 하지만 이런 내용의 가사는 캠페인 송 혹은 건전가요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런 걱정은 안 하나.
루시아 : 안 한다. 내가 자부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진실성이다. 나는 아픈 시간을 겪었고 당시에는 원망스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왜 그런 일을 겪었는지 알 것 같다. 이런 일을 하려고 그랬던 거다. 어떤 말이 필요한지, 어떻게 그 시간을 헤쳐 나갈 수 있는지 깨달았고 그것에 대해서 곡을 쓴다. 거짓된 위안이나 내가 모르는 이야기, 상상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절대 쓰지 않는다. 사실 위로와 치유가 굉장히 많이 필요한 시대이고 거의 모든 싱어들이 위로송을 만든다. 하지만 단순히 ‘괜찮아’ ‘잘 될 거야’ 하는 말로는 약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넌 지금 나아가고 있다는 것, 너의 힘듦과 슬픔을 직면하길 바란다는 것, 사실은 이게 네가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보다 대단치 않다는 것, 그리고 그걸 깨닫고 강해지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말길 바란다는 거다. 위로 뒤에 이어지는 강력한, 힘 있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Q. 마지막 트랙이 ‘강’이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지? 조심스러운 질문이지만,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노래인가?
루시아 : 몇 년 전에 사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전에는 그 일에 대해서 말을 하기도 힘들었다. 내 입이 말하는 걸 내 귀가 듣는 게 못 견디겠더라. 그런데 작품을 만들고 노래를 하는 일은 나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안에 응어리진 게 너무 많아서 그걸 토해내는 작업을 하는 게지. 음반 녹음을 한창 하던 중에, 견딜 수 없이 괴로운 밤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피아노 앞에 앉아 눈물을 펑펑 흘리며 곡을 썼다. 그리고 그 노래를 만들고 나서, 뭔가 작용이 일어난 것 같다. 사별에 대한 이야기를 비로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게 된 거다. 그래서 고맙다. 내게는 한 발자국 더 디딜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너무나 어려운 노래지만, 거울 같은 노래이기도 하다. 내 모든 노래 중에 유일하게 피아노와 보컬로만 이루어진 곡이다. 앞으로도 이런 간결한 사운드,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맨얼굴 같은 노래를 많이 들려주고 싶다.

Q. 그렇다고 해서 이 노래가 마냥 슬픈 건 아니다. 오히려 희망적인 분위기가 읽힌다.
루시아 : 이건 내 철학이자 인생관이기도 한데,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안 좋은 일들 혹은 불행들이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특별한 유년시절을 겪었는데, 그 시절이 없었다면 노래를 쓰는 법, 감정을 채워 넣는 법을 몰랐을 거다. 괴로운 감정을 겪으면서 상대방의 감정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운 거지. 어렸을 땐 그게 원망스럽고 힘들었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노래를 만들 수 있는 같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안 좋은 일들, 쉐이드(그늘)에 속하는 일들은 불행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그로 인해 더 나은 사람, 좋은 사람,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하지만 그 불행을 직면하지 않고 피하려고만 한다면, 그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강’을 만드는 것 역시 슬픔을 직면하고 흘려보내는 과정이었다. 내가 쓰는 곡들이 시련과 상처에 대한 노래일지언정, 절대로 슬픔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희망, 긍정하고자 하는 의지가 다 들어가는 것 같다. ‘배워’도 마찬가지로 ‘네가 떠나서 슬퍼’가 아니라 ‘네가 떠나고 난 뒤에 나는 배운다. 내가 얼마나 강하고 견뎌낼 수 있는지를’이라는 내용이잖아. 슬픔 이후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다. 그거야말로 진정한 치유인 것 같다.

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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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비슷한 맥락에서, 이번 앨범이 시련과 구원의 이야기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빛과 그늘(라이트 앤 쉐이드)은 서로 정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반드시 공존하는 것들이잖아. 시련과 구원도 비슷하지 않을까?
루시아 : 그렇지. 보도자료에 ‘삶이라는 것이 온갖 빛과 그림자로 직조된 하나의 거대한 작품’이라는 말이 있는데, 정확한 비유다. 살면서 마주하는 좋은 일들은 얼마든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작용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강제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안 좋은 일들도 역시, 우리가 똑바로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제대로 된 작용을 줄 수 있을 거다. 이건 하나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아에서 일어는 이야기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우린 이제 그만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는. 우리는 늘 배우면서, 강제적으로 학습되면서 살잖아. 그러나 내가 가진 것들, 내게 일어난 일들을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으면 더 강해질 수 있다. 설명을 하려니까 한도 끝도 없는데(웃음) 내 노래는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만든 노래다. 들으시는 분들이 각자의 재료로 사용해 준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Q. 개인적으로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속임수처럼 느껴질 때가 많은데, 당신은 그 명제에 동의하는 입장이겠다.
루시아 : 글쎄,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은 너무 많이 줄여진 말이다. 아픔은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런데 그 아픔이 바로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화가 나는 거지. ‘성장한다며! 안 하잖아! 아프기만 하고!’ 하하. 아픔과 성장 사이에는 많은 단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엔 ‘이해’라는 단계가 가장 중요하고.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어떻게 내 삶에 녹여낼 건지 이해해야 한다. 이 과정을 무시해버린다면 성장할 수 없다. 사실 성장이라는 단어도 나는 ‘안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평생 내가 안정되기를 바라면서 살았다. 전에는 발이 땅에 안 닿는,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있었지. 그런데 서른이 되면서 발에 땅이 닿는 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정말 많은 일들을 겪고, 또 그 일을 이해했다. 그래서 계속 이야기하게 된다. 우리, 배우지 말고 깨닫자. 나한테 일어난 일들을 다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직면과 사유를 포기하지 말자. 그리고 생각을 하는 게 힘들 때에는 루시아의 앨범을 듣자(웃음).

Q. 여태까지는 휘청거리는 느낌으로 노래를 썼다면, 발에 땅이 닿은 지금은 또 다른 곡을 쓸 수도 있겠다.
루시아 : 매 해 내는 음반은 그 나이대의 증거다. 음반을 들어보면 그 때의 나를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데칼코마니’는 피눈물 나는 젊음의 열정, 내가 정말 뭔가 하나 해보려고 했구나, 하는 불길이 느껴진다(웃음). 그 뒤에 발표한 처연한 노래들 역시 내가 가진 면모를 보여주려고 했고. 나는 내 자신을 하나의 다면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한 쪽 면을 보여줬을 때 좋아하던 사람들이 다른 면을 보여주면 싫어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느냐. 아니다. 나는 또 다른 면을 보여주려고 한다. 사실 한 장 한 장 앨범을 낼 때마다 팬덤이 생기고 기대가 생기기 때문에, 무섭고 두렵기도 하다. 그런데 그 두려움을 다 이겨내면서 하는 게 아니더라. 계속 설득해 나가야 하는 거지. 내가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고 해서, 내가 가진 철학이나 맥이 변하는 건 아니다. 그냥 다른 옷을 입은 루시아라고 생각해주면 좋을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범위를 늘려나가고 싶다. 그리고 왠지는 모르지만 자신 있다.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노래들이 너무나 많다.

이은호 기자 wild37@
사진. 파스텔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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