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아무리 생각해봐도 ‘순수의 시대’는 강한나의 영화다. 영화의 중요한 길목마다 강한나의 몸을 빌린 가희가 있다. 가희는 상황을 쥐락펴락하고, 상대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극의 흐름을 기꺼이 뒤바꾸는 인물이다. 여배우라면 한번쯤 자신을 던져보고 싶은 캐릭터임에 분명하다. ‘순수의 시대’에서 강한나는 처절했고 강한나는 과감했으며 강한나는 순수했다. 그리고 실제로 만난 강한나는 영화 ‘순수의 시대’ 만큼이나 열정적이었다. 연기를 대하는 태도가 특히나 그랬는데, 캐릭터 분석이나 연기관에 있어서 보통이 아니란 생각을 하게 했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칭찬이다. 지켜봐야할 여배우가 나타났다.Q. ‘순수의 시대’에 대한 화제의 많은 부분이 베드신에 집중 돼 있는 게 사실이다. 19금 영화의 운명이기도 한데 출연 배우로서 일견 아쉽기도 하겠다.
강한나: 그 부분이 많이 기사화 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시면 이 영화가 베드신이나 노출이 전부라 아니라는 걸 알아주실 거라고 생각한다.
Q. 영화를 보자마자 “‘순수의 시대’는 강한나 영화네!’라고 생각했다. 진심이다.
강한나: (부끄러운 듯) 가희가 극 중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이라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웃음) 이전에 독립영화 단편들을 많이 했었다. 아무래도 단편이다 보니까 캐릭터의 한 부분이 극대화 돼서 보여 지는 부분이 많았다. 그에 반해 가희는 상업영화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의 입체성을 지닌 인물이어서 조금 더 깊이 있게 접근해야 했다. 다양한 분석이 요구되는 인물이었기에 나에게는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도전이자 고민이었다.
Q. 가희는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감정을 농밀하게 가져가는 인물이다. 이 캐릭터의 핵심은 뭐라고 생각했나.
강한나: 가희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라고 생각했다. 속은 한없이 여린 사람인데 애써 강하려고 하는 여자. 그래서 더욱 슬픈 여자라는 생각을 했고, 그런 면모를 표현하려고 애썼다.
강한나: 나는 아직도 나를 모르겠다. 배우가 자신을 똑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렸을 때는 내가 뭘 좋아하고/싫어하는지, 뭐가 옳고/그른지에 대한 생각이 뚜렷했다. 어떻게 보면 흑백논리였다. 그런데 연기를 하면서 흑과 백 사이에 수많은 회색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연기라는 게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작업이라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Q. 스스로의 어떤 새로운 면모에 가장 놀랐나.
강한나: 내가 공소공포증이 있다. 그런데 연기에 집중하다보니 강물에 뛰어내리는 씬을 찍을 때도 무서운 줄 모르겠더라.
Q. 상대배우 신하균과 비슷하네. 신하균도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카메라가 돌면 본능적으로 몰입하는 스타일인 걸로 안다.
강한나: 와. 그게 참 신기하다. 그동안 안 무서운데 무서운 척 했던 게 아니라 진짜 무서워했던 거거든. 어릴 때 물에 빠져 죽을 뻔 한 기억이 있어서 물도 무서워하는데 수중 장면도 별 탈 없이 찍었다. 촬영하는 동안 ‘대체 이게 뭐지? 나는 대체 누구지?’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 ‘내 스스로 나의 한계를 만들 필요가 없겠구나’, ‘앞으로 조금 더 도전해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Q. 굉장히 중요한 걸 이 작품을 하면서 깨달은 셈이다. 선물 같은 작품이네.
강한나: 맞다. 내겐 너무나 큰 선물이다. 나를 알아가는 시간, 내 한계에 부딪혔다가 깨지고 넘어서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Q. 가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슬픔이라면, 강한나를 움직이는 동력은 뭔가.
강한나: 기쁨?(웃음)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 다행히 행복을 멀리서 찾지 않는다. 내가 가진 작은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편이다. 그것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인 것 같다.
강한나: 아직은 감사할 정도로 순탄하게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슬럼프? 그것도 잘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왔다가 지나간 것 같기도 하고…왜, 슬럼프라는 게 심리적인 측면이 크지 않나. 긍정적인 편이라 슬럼프를 잘 느끼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기회들이 주어지기도 했다. 대학도 한 번에 합격했고, 정말 좋아하는 연극들도 했고, 좋은 회사(판타지오)를 만나서 이렇게 활동도 하고 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좌절에서 오는 힘도 분명 있을 텐데, 아직까지는 그렇다.
Q. 뭐, 그렇다고 굳이 실패를 경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지. 안 그래도 최근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말을 들었는데 “성공은 성공에서 배운다”는 말이었다. 장원석PD(‘끝까지 간다’ ‘허삼관’ ‘범죄와의 전쟁’ ‘의형제’ 등)가 해 준 말이다.
강한나: 아! 장원석 PD님, 학교 선배님이시다.
Q. 중앙대!
강한나: 맞다. 내가 ‘순수의 시대’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도 문자를 보내주셨다. ‘시작하는 연기자로서 베드신이 있는 영화에 출연한다는 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그 용기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 대한민국의 멋진 연기자로서 행보를 멀리 보고 걸어 나가길 바란다’고. 그 말씀이 너무나 큰 응원이 됐다. 그것(베드신) 때문에 망설이는 배우들이 많을 수도 있으니까.
Q. 굉장히 많을 거다. 실제로 많은 여배우들이 노출에 대한 고민을 하는 걸로 안다.
강한나: 노출을 위한 노출이라면 절대 못할 것 같다.
Q. 다들 그런 생각을 한다. 문제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해당 영화의 베드신이 노출을 위한 노출인지, 이야기를 위한 노출인지가 정확하게 잡히지 않는다는 거다. 그래서 어떤 연출가의 작품인가가 중요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고민은 신인뿐 아니라 이미 스타가 된 여배우들도 피해가지 못한다. ‘작품은 좋은데, 베드신이 있으니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건 옳다 그르다의 문제라기보다 가치관의 문제라 고민은 더 치열할 수밖에 없을 거다.
강한나: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장원석 PD님의 말씀이 너무 든든하고 감사했다. 주위에서 많이 믿어주고 응원해주시는 만큼 더 책임감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예쁘기만 한 연기자, 안전한 선택만 하는 연기자보다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연기자이고 싶다.
강한나: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저희 회사는 워낙에 배우 중심이다. 이미지 보다는 참된 연기자 쪽으로 가는 걸 지원하는 쪽이라 ‘이미지를 만들어서 가자, 안전하게 가자’ 이런 분위기는 아니다. 나로서는 너무 감사한 일이다.
Q. ‘순수의 시대’의 가희는 상당히 다층적인 인물이다. 여배우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캐릭터인데, 말했듯 농밀한 베드신 때문에 부담도 있었을 게다.
강한나: 사실 이 시나리오 초고를 여자 작가님이 쓰셨다. 각색도 여자 작가님이시다. 김세희 작가님이 초고를 쓰시고 김윤신 작가님이 각색을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시나리오에 베드신들이 굉장히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행위가 묘사돼 있는 게 아니라, ‘마지막인 것을 직감한 듯 애달프게 서로를 만지는 가희와 민재(신하균)’ 이런 식으로 정서들이 쓰여 있어서 읽으면서 ‘아, 감정적으로 정말 중요한 베드신이구나’ 생각했다. 그건 이 시나리오를 본 분들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가희는 남자 선배님들도 많이 탐낸 캐릭터였다.(웃음) ‘이 여자 보통이 아니다. 너무 매력적이다. 나도 가희하고 싶다’고 하며 축하해주셔서, 정말 좋은 기운을 받아서 촬영을 했다. 가희라는 여자의 정수를 제대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개인적으로 욕심이 큰 작품이다.
Q. 그렇게 많은 배우들이 탐내는 배역에 캐스팅된 비결은 뭘까.
강한나: (쑥스러운 듯 웃으며) 내가 가희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했던 지점이 감독님이 풀어내고 싶은 가희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오디션을 통해 영화에 합류했는데, 많은 분들이 오디션에서 가희를 ‘팜므파탈’이라고 해석하셨던 것 같다. 듣기로는 많은 분들이 가희 대사를 독하게 표현했다고 하더라. 나의 경우 전혀 다르게 가희에게 접근했는데, 그게 주효했던 것 같다 .
Q. 오디션에서 주어진 게 어떤 장면들인가.
강한나: 세 장면이다. 하나는 가희가 속마음을 숨기고 경순공주(김다예)와 진(강하늘)에게 비단 보부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 진을 공격하기 위한 장면이기에 표독스럽게 표현할 수도 있는 부분인데, 나는 포커페이스로 담소 나누듯 편하게 대사를 했다. 그게 진짜 가희라고 생각했거든. 속을 드러내지 않는 여자. 그리고 민재가 가희에게 칼을 가누는 장면, 가희가 지조를 지키겠다며 뛰어내리는 장면 등이 오디션에 주어진 씬이었다.
Q. 감독님이 오디션에서 그 씬들을 준 이유가 짐작이 간다. 어쩜, 감정적으로 어려운 씬들만.(웃음)
강한나: 안 그래도 나중에 여쭤봤다. 왜 그렇게 힘든 씬들만 주셨냐고. 말씀으로는 그냥 골랐다고 웃으며 말씀하시는데, 내 생각에는 다양한 모습의 가희를 보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리고 운 좋게도 내가 표현해 낸 가희의 모습, 이를 테면 힘 빼고 연기하는 모습 등이 감독님이 생각한 가희와 가장 근접했기에 나를 선택하지 않았나 싶다.
강한나: 평상시에는 전혀 독하지 못하다. 편하게 무던하게 사는 걸 즐기는 스타일인데, 하고 싶은 것 앞에서는 달라진다. 지금은 그게 연기인 것 같다.
Q. ‘배우노트’는 언제부터 썼나.
강한나: 입시 때부터 썼는데, 제대로 된 ‘배우노트’는 대학에서 첫 연극을 할 때부터다. 안톤 체홉 ‘갈매기’가 내 첫 연극이었다. 쉽지 않은 연극이었는데, 그때 ‘배우노트’가 많은 도움이 됐다.
Q. 이 질문은 할까 말까 고민했는데…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의 강한나를 설명하는데 부산국제영화제의 드레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강한나: 그런가 보다. 그 임팩트가 그렇게 클지는 몰랐다.
Q. 그래서 진짜 궁금하다. 지금도 강한나 하면 연관검색어로 노출 드레스가 따라다닌다. 혹시 그때의 선택이 후회는 안 되나.
강한나: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때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아직 내 연기를 안 보신 분들이 더 많지 않나. 평생 연기를 할 텐데,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면 드레스에 대한 이미지는 차차 잊혀지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드레스는 다자이너 맥 앤 로건 선생님의 철학이 담겨있는 옷이다. 그 분의 철학에 공감했기에 입었던 거고. 파격적이라기보다는 정말 아름다운 드레스라고 생각하며 선택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 언제고 그 드레스가 주는 철학이 재평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Q. 이 시대의 ‘순수’는 뭘까. 많은 사람들이 순수가 사라진 시대라고들 하는데.
강한나: 순수라는 걸 입 밖으로 꺼내면 웃겨지는 시대처럼 된 것 같기는 하다. 글쎄. 이 시대의 순수는 뭘까. 그래서 옛 시대로 간 걸까. 다시 묻고 싶어서? ‘당신들 기억하고 있나요?’라고 묻고 싶어서 영화가 옛 시대로 간 것 같기도 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순수는 우리 안에 분명 존재하리가 믿는다. 그걸 평소 얼마나 꺼내 보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Q. 먼 훗날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순수의 시대’가 출발선상에 놓여 있을 텐데,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나.
강한나: ‘너, 그때의 열정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니? 변하지 않고 곁에 있는 분들에게 감사하고 있니? 최고를 보여줄 수 없더라도 최선은 다 하려고 하고 있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싶다. 정말이지 이 작품을 하면서 ‘최선을 다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의심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텐아시아=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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