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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이를 먹는다는 게 그리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나날이 푸석해지는 피부와 그보다도 한 발짝 먼저 시들해지는 삶에 대한 감각. 도도히 흐르는 세월의 강물을 조용히 바라본다는 것은 말처럼 쉬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길동무’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배우 김현숙에게 케이블채널 tvN ‘막돼먹은 영애씨’는 그런 존재다. 2007년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1’로 대중을 만났던 그녀는, 2013년 11월 열두 번째 시즌을 마쳤고, ‘영애씨’와 ‘현숙씨’ 모두 서른여섯 살이 됐다. “영애가 성숙해졌다”고 말하는 ‘배우 김현숙’의 성장을 ‘영애씨’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다.

“수없이 헤맸던 환상 속에 키보다 높은 꿈은 무뎌지고, 철없음으로 얼룩진 나날들 시간 속에 묻히겠지” 나이 듦에 대하여 묻자 김현숙은 조용필의 ‘끝없는 날개짓 하늘로’를 흥얼거렸다. ‘막돼먹은 영애씨’와 동명의 뮤지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김현숙,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는 그녀의 눈빛에서는 ‘연기’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열정이 읽혔다.

Q. 지난 2007년 시즌1으로 시작해 어느덧 시즌12까지 왔다. 기분이 어떤가.
김현숙: 매번 아쉽다. 열두 번째 시즌까지 오다보니 이젠 ‘제작자의 마인드’도 생겼다. 이번에도 쫑파티 때 작가들에게 독설을 날렸다(웃음). 남들은 뭐 그렇게 유난을 떠느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냉혹한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분발해야 한다. 시즌을 더할수록 책임감이 무겁다.

Q. 이번 시즌에서는 출연진부터 세부 설정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다음 시즌을 위한 포석이긴 했지만, 위험부담도 큰 선택이었을 듯하다.
김현숙: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연출을 맡은 한상재 PD가 “이제는 선택을 해야겠다”고 말하더라. ‘막돼먹은 영애씨’는 여타 드라마와 다르게 어느 누군가의 힘만으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아니다. 주인공만큼 다른 배역들의 비중도 크다. 아무래도 시즌이 장기화됨에 따라 기존의 설정으로는 크게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힘들었다. 큰 모험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옳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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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새로 합류한 라미란, 한기웅 등의 배우도 안정적으로 극에 녹아들었다. 다만, 골수팬들의 입장에선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다.
김현숙: 이해한다. ‘대머리 독수리’ 유형관, ‘개지순’ 정지순 등 조연들의 활약이 대단하지 않았나(웃음). 이번 시즌에 새로 합류한 배우들이 잘해줘서 크게 걱정은 없다. 오히려 다음 시즌이 기다려질 정도다.

Q. 러브라인만 놓고 보면 이젠 제작진의 ‘밀당 기술’이 정점에 이르렀다는 느낌이 든다. 영애씨는 이번 시즌에서도 사장님(이승준)과 연하남(한기웅) 사이에서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김현숙: 연기하는 입장에선 감정선 잡기가 쉽지 않았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기분이었달까? 두 번째 파혼을 당하고도 ‘마마보이’ 사장에게 사랑을 느낀다니 정말 영애다운 설정이었다. 연기할 때 감정의 당위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고민이 깊었다. 결론은 ‘헤어질 때도 이유가 없듯이 다시 사랑에 빠질 때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여러 조건만으로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 그런 방향성을 정하고 나니 연기하기가 수월해졌다. 한기웅은 조금 느낌이 다르다. 아직 이야기 흐름상 영애에게 기웅은 동생 이상의 의미는 없다. 문제는 기웅이 신인 배우이고 나이가 어리다 보니 실제의 나조차도 그가 동생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다(웃음). 근데 마지막 회 찍고 나서 사석에서 보니 기웅이 동생이 아닌 남자로 보이는 순간이 있었다. 다음 시즌에는 나의 연기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겠다(웃음).

Q. 사랑에서도, 일에서도 갈팡질팡하는 영애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이젠 영애가 전혀 막돼먹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더라(웃음).
김현숙: 영애가 많이 성숙해졌다. 물론 골수팬들은 이전 시즌에서처럼 “내가 이놈의 회사 때려치우고 만다!”고 말하며 막돼먹게 행동하는 모습을 그리워하실 수도 있을 거다. 다만 앵애도, 실제의 나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커질수록 점점 현실적인 인물로 바뀌어가는 것 같다. ‘막돼먹은 영애씨’가 명색이 ‘리얼 다큐드라마’인데 어떻게 비현실적인 것만 보여드릴 수 있겠나. 어느 정도는 참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영애의 일상이 좀 더 현실에 가까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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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느덧 영애도, 당신도 서른 중반에 이르렀다. 배역과 같이 늙어갈 수 있다는 것도 시즌제 드라마에 장기적으로 출연한 배우만 누릴 수 있는 특권 아닌 특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웃음).
김현숙: “내 이름은 이영애, 나이는 서른하나” 시즌1 내레이션이 아직도 생생하다. 2007년에 ‘막돼먹은 영애씨’를 시작했으니 오래되긴 했다. 가끔 초반 시즌 작품들을 돌려보곤 하는데, 정말 모두가 많이 늙었더라(웃음).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여자가 장기간 이야기을 이끌어가는 작품이 또 나올까 싶다.

Q. 내년 초 시즌13 방송에 들어간다고 들었다. ‘막돼먹은 영애씨’가 이토록 오랜 시간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김현숙: 일상적인 것을 특별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 특히 초반 시즌의 이야기들이 그랬다. 모녀관계라든지 회사생활 속 에피소드에 소소한 재미를 더한 것이 주효했다. 일상과 가깝다는 것, 그게 드라마의 숙제이자 의무가 아닌가. 아직도 기억나는 내레이션이 있다. “우리는 비가 그쳤다고 해서 우산을 버릴 수 없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버릴 수 없듯이.” 이처럼 희노애락이 담긴 우리의 일상을 특별한 이야기로 만든다는 점이 시청자들의 공감대를 살 수 있었던 이유 같다.

Q. 그럼에도 언젠가는 ‘막돼먹은 영애씨’도 막을 내리고, 당신도 ‘영애’라는 이름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올 거다. 그 순간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
김현숙: 그 생각은 하기 싫어서 잘 안 한다(웃음). 막상 그 상황이 닥친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원래 누군가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장례식을 치르고 정신없이 바쁠 때는 슬픔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 그런데 해가 바뀌고, 일상 속에 문뜩 울컥울컥 하는 순간이 오는 거다. 너무 ‘막돼먹은 영애씨’를 일찍 만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작품이 완전히 끝났을 때 찾아올 공허함이 두렵다. 죽을 때까지 연기하는 게 꿈인지라, 아마 눈감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영애를 그리워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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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개그우먼으로 시작해 배우까지, 활동 반경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영애’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배우 김현숙’으로서 도전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다면.
김현숙: 연기, 코미디 등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요즘은 영화에 대한 욕심도 있다. 내년 초 개봉을 앞둔 ‘수상한 그녀’(가제)를 찍으며 황동혁 감독과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배우는 누구나 본인의 우주가 있다”는 것. 조금 뜬 구름 잡는 이야기 같지만, 영화는 나만의 매력으로 세계를 재창조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다.

Q. ‘여자 김현숙’으로서도 해야 할 일들이 많을 것 같다(웃음).
김현숙: 20대에는 하도 ‘결혼생활’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결혼 안 할 거다!’라는 마음이 강했다(웃음). 근데 서른 줄에 들어서니 또 느낌이 다르다. 배우라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직업병 같은 거다. 친분이 있는 김보민 아나운서가 “결혼을 꼭 해라. 아이를 낳으면 여자는 다시 태어난다”고 이야기하더라. 결혼, 연애, 더 나아가 사랑에 대한 마음은 항상 열려있다. 잘할 자신도 있다. 이 정도 마음이면 다 시간문제가 아니겠나(웃음).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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