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비밀'
2013년 가을, 이삼십대 여자 시청자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KBS2 ‘비밀’을 보는 자와 SBS ‘상속자들’을 보는 자. 둘 모두 한국 드라마에서 우리고 또 우려 더 이상 우려낼 것이 없을 것만 같은 재벌을 다루고 있고, 당연히 재벌과의 로맨스를 실현시킨 신데렐라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이건데, 여전히 재미있다. 그래서인가. 두 드라마의 진검승부가 가열차다. 물론 ‘비밀’이 앞서고 있다. 하지만 14일 오후 종영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상속자들’의 추격 역시 만만치않다.

드라마 여주인공은 편의점 앞에 졸기만 해도, 또 아르바이트를 하기만 하면 턱턱 잘도 만나는 재벌가의 훈남(훈남이라는 대목도 상당히 중요하다, 배 나온 재벌 아저씨는 그다지 매력 없으니까)은 우리 현실에서는 존재조차 모호하다. 그래서 늘상 “말도 안돼!”를 외치면서도 또 빠져들어 보게되는 드라마 속 재벌 남주에 관해 하루하루 견디며 일하는 그녀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참고로 이 대화는 실제 어느 금요일 오전 회사 업무를 보는 틈틈이 SNS 채팅방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신 분들은 알게 되겠지만 오늘도 역시 고단한 하루하루를 버텨야하는 그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대들은 재벌보다 더 대단한 존재다!)

이민호 지성
이민호 지성
A양(30세, 기자) :
어제 ‘비밀’, ‘상속자들’은 다들 보셨는가? 나는 채널 돌리며 보느라 정신이 없었네. 아~~ 대체 드라마 속 지성과 이민호의 매력은 뭘까?

B양(29세, 유학생) : 잘 생겼잖아.

A양 : 배우는 원래 다 잘 생겼는데… ㅠㅠ

B양 : 잘 생긴 것을 전제하고, 여자를 저울대에 올려놓지 않는 순수한 마음까지 갖췄잖아! 그나저나 ‘비밀’ 이제 보기 시작했는데 곧 끝나용 ㅠㅠ 장난 아니게 신파던데, 재밌어.

C양(31세, 주부 겸 대학원생) : ‘비밀’에서 지성의 매력은 재벌 그 자체에 있다기 보다 ‘반항아+순수’ 이미지의 결합 때문 아닐까? 또 조민혁(비밀 속 지성의 배역 이름)은 윤리적 기준에 어긋남에도 본능을 따라가는데, 사실 누구나 마음이 원하는 곳으로 향하고 싶지만 내 안의 기준이나 밖의 기준과 어긋나면 그러지 못하잖아. 그럼에도 조민혁은 그걸 따라가고 또 알고 봤더니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로 밝혀지고. 하아~ 요즘 ‘비밀’에 너무 빠져있어. 웰메이드야! 반면, ‘오로라 공주’ 같은 희한한 드라마들도 있고.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죽을 지 모르는, 막장 of the 막장!

A양 : 맞아맞아. 서바이벌 드라마 ㅋㅋㅋ 아무튼 정리하자면 여자들이 진짜 감동하는 건 이 남자들이 재벌2세라는 것에 있다기보다, 재벌2세는 하나의 드라마적 설정일 뿐, 모든 것을 나를 위해 내려놓는 순정에 있다는 말인건가?

C양 : 맞아. 순정! 우리는 꼭 재벌에만 열광하는 것이 아니잖아. ‘늑대소년’의 송중기는 가진 건 하나도 없었지만 가슴이 콩닥콩닥했었지. 펑펑 울기까지 하고.

D양(31세, 회사원) : 그런데 그건 송중기라서 그런 거 아냐? 재벌2세도 순정남이라는 것 외에도 얼굴이 잘 생겼고, 만약 못생긴 늑대소년이었다면 집에 들이지도 않았을 거야.

B양: 아까 내가 제일 처음에 이야기했잖아. 결국 잘 생겨서야. ㅋㅋㅋ

A양: 여심을 간질이는 건 돈 많은 것보다 결국 ‘잘생긴’ 남자의 순정이라는 거군. 그런데 ‘늑대소년’에서 순이랑 철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기억할 필요가 있어! 재벌 사내들과 신데렐라의 사랑은 온갖 역경을 딛고도 이뤄지는데 말이야.

C양: 응….전세대란의 현실 속에서 꿈이라도 꾸자는 슬픔이 반영된 건가봐. ㅠㅠ

B양: 총 정리해볼게. 그들의 매력은 잘 생긴데다 가진 것도 많은데 한 여자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하는 순정을 바탕으로 한 철없음인 것 같아! 그들이 가진 것이 많기에 포기한다는게 여자 입장에서는 더 큰 감동이 되는 것 같아.

D양: 그래그래!!! 결국 외모, 재산, 순정이 다 갖춰져서 다들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드라마가 이래서 애들을 버려놔요.

B양: 또 있다. 자신감!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은 뼛속까지 자신감으로 꽉 차 있는데, 그것도 매력의 한 몫을 하는 듯 해! 잃고 난 뒤의 상황을 모르니까 다포기하겠다고 하는 무모함도 있을 수 있고. 현실 속 평범한 우리들로서는 그런 마음을 먹기가 힘들지.

C양: 몽땅 사라지고 나면, 그렇게 좋아했던 여자를 앞에 두고 ‘아 내가 미쳤었구나’ 하며 뒤늦게 땅을 치겠지.

B양: 여자 때문에 미쳤었구나. 나중에 후회해봐야 이미 때는 늦음. ㅋㅋ 그런데 드라마에서 정말 다 포기하고 거지된 재벌 이야기 본 적 있어?

D양: 드라마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재벌부모가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집에서 잠시 버림받아도 언젠가는 받아주겠지 하는 심보도 있을 것 같지 않아? ‘시크릿가든’처럼. 포기하고나서도 사실 그들 입장에서야 잃은 것이 많지,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가진 것이 많아. 우리는 전세집 하나 얻기도 어려운 마당에…

E양(29세, 회사원이자 신혼생활 중) : 아니 무슨 드라마를 가지고 이렇게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해 ㅋㅋㅋ 회의 중에 보다가 빵터졌네 ㅋㅋ

ABCD: 우리가 그랬었나? ㅋㅋㅋ

F양(31세, 회사원) : 금요일 오전에 이런 열기라니. 지금 회의 중인데 이 채팅방이 회의보다 훨씬 재미있다!

E양: 그런데 말야. 정말 재벌가 남자가 나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온다? 그럼 여자 입장에서도 환영하게 될까?

C양: 맞아맞아. 100% 헤어져. 돈 없으면 ㅠㅠ

F양: 얘들아,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너무 이입하지 말자. 특히 미혼여성들은 더더욱! 시집은 가야지 않겠어?

C양: 쓰레기 오빠야(‘응답하라 1994′ 정우의 배역 이름) 등을 보고도 이입이 안되겠니?

F양: 쓰레기 오빠야 멋있지. 하지만 내 주변에 재벌은 커녕, 쓰레기 같은 남자도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 없는 건 없는 거야. 보는 그 순간만 즐기기로 했어.

D양: 맞아. 현실의 남자들에게 드라마 속 모습을 요구해서는 안돼. 드라마에서는 마치 백마탄 왕자처럼 남자들이 다 해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완벽한 모습을 기대하면 그건 순수하다 못해 멍청한 거지. 데이트 비용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춰 내야하는 거고.

B양: 그래. 드라마에서는 계산하는 신은 하나도 안 나오잖아. 가장 현실적인 대목인데 아무리 재벌 할아버지라도 한 번쯤은 여자가 계산하길 원할거야.

E양: 하지만 자존심 세운다고 여자가 내는 거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 내 친구는 자기 여자친구 버스비도 못내게해.

D양: 버스비는 카드로 두 명 찍을 수 있으니까, 전철을 타보라고 해. 한 카드로 두 명 못찍어.

E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양: 여자들 이야기도 해볼까? 솔직히 ‘비밀’ 속 황정음 같은 여자, 현실에서는 인기 없어.

D양: 그래. 현실에서는 지고지순한 것보다 남자나 여자나 적당히 나빠야돼. 그리고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며 살 줄 알아야하는 거지. 이제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하고.

B양: 현실은 드라마보다 비극적이지만, 한발짝 떨어져보면 다 희극이야.

E양: 난 그놈의 재벌남보다는 요즘 하루 10번 퇴사를 고민하는 중이야. 매일매일 오늘은 사표쓸까 하는 생각 뿐 ㅠㅠ

F양(29세, 해외주재원) : 난 11번.

E양: 헉 언제 왔어? ㅋㅋ

F양: 회의 끝나고 채팅창 보다 깜짝 놀랐네. 아침부터 무슨 이런 이야기들을 ㅋㅋㅋ

C양: 얘들아 제발 퇴사하지마! 너네들 다 좋은 회사 다니고 있는 거야 ㅠㅠ

E양: 퇴사경험자의 말이니 새겨듣겠지만 하루하루 말라죽을 것 같아ㅠㅠ 만약, 아기라도 생기면 일하기는 더 힘들어. 임신도 눈치봐서 해야하고, 자랑도 못하고 심지어 임산부들 밤 9시까지 근무시키기도 한다고. 우리나란 여자가 일하기 진짜 불리해.

F양: 이기적인 소리일지 모르지만, 출산휴가를 가버리면 남는 사람들도 힘들어. 게다가 그 휴가 연장했다고 하면 정말 ‘헉!’하는 거지. 하지만 그 사람들을 어떻게 비난해. 조직에서 알아서 해줘야하는 문제인데, 아직은 갈 길이 먼 것 같아. 회사 입장도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내 몸이 힘든데 이해고 뭐고 ㅠㅠ 그리고 나도 이렇게 힘든데, 워킹맘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

E양: 오우, 난 워킹맘은 진짜…엄두가 안나. 악!!!!!!!!! 나 주말에 출근하래

B양: 다들 정말 많이 힘들구나. 힘내.. ㅠㅠ

A양: 재벌 드라마로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현실로 돌아와버렸군. 사람들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의 바탕에는 역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하는 심리가 깔려있다는 게 증명된 것이고. 그 말은 우리가 그만큼 현실을 힘들고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인거네. 이건, 이런 재벌 파타지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질 수록 우리 현실의 속내는 팍팍하다는 것과 같아 살짝 씁쓸하기도 하다. 아무튼 오늘의 토크,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익명으로 나갈테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다들 힘내시고, 파이팅합시다.

B.C.D.E.F: 힘내!! 파이팅!! 조만간 만나서 못다한 이야기 나누자고!!

정리. 배선영 sypova@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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