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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를 쉽게 할 수가 없었죠. 내가 먼저 연기하려는 배역을 확실히 잡고 들어가야 시청자의 공감대를 살 수 있는 건데, 수박이를 이해하기까지 저도 꽤 시간이 걸렸어요.”

KBS2 주말드라마 ‘왕가네 식구들’이 방송되면서 등장한 신조어가 있다. 바로 ‘울화통 캐릭터’다.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답답함을 넘어 모종의 분노까지 전하는 것, 좋게 말하자면 현실 세태를 꼬집는 인물군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기억해둬야 할 사실은 그런 인물을 연기하는 게 배우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라는 것. 특히나 여느 가족드라마에서는 쉬이 찾아보기 힘든 철없는 아내 왕수박을 연기해야 하는 오현경에게는 더욱 그랬다.

‘왕가네 식구들’에 출연하며 ‘울화통 캐릭터’라는 수식을 얻은 오현경의 표정에서는 연기에 대한 고민이 읽혔다. 그녀는 “수박이 ‘왕가네 식구들’에 갈등을 조장하는 역할이지만, 그 감정의 선을 어디까지로 해야 할지 고민이 많다”며 “초반에는 나조차도 남편 고민중(조성하)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움 마음이 들어 감정 잡기가 힘들었다”고 전했다.

오현경은 지난 2007년에 ‘왕가네 식구들’의 문영남 작가와 SBS ‘조강지처 클럽’을 통해 호흡을 맞춘 바 있다. 하지만 그가 맡은 캐릭터는 하늘과 땅 차이다. ‘조강지처 클럽’ 속 나화신이 아내나 어머니로서 가족에 대한 헌신을 하는 평범한 사람이면서도 주체를 찾는 역할이었다면, ‘왕가네 식구들’ 속 왕수박은 그 반대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며 가족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충분히 시청자들의 공분을 살만하다고 느끼게 된다.

“수박이는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 앙금(김해숙)부터 찾아요. 그만큼 주체적이지 못하고 모녀관계 이상의 기이한 애착 관계까지 담겨있는 거죠. 그런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수박이는 어느새 엄마의 세계 안에 갇혀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어요. 어떻게 보면 수박이도 불쌍한 사람 중 한 명인 셈이죠.”

오현경은 ‘왕가네 식구들’을 통해 으레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현대인들의 삶에 문제점을 제기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들은 정말 힘들 거다”며 “물론 왕수박 캐릭터는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 조금 과장되고 강하게 표현된 부분도 있다. 하지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여자들도 조금은 반성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박이 어떤 계기를 통해서 좀 더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배우 오현경. 그녀는 이제 도도히 흐르는 세월의 강물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듯 했다.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정말 보기 싫고, 생각하기 싫은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이 항상 존재해요. 다만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만 있을 뿐이죠. 인간에 대한 이해의 노력, 거기서부터 제 연기는 시작해요.”

‘조강지처 클럽’의 나화신처럼 연기를 통해 화려하게 재기한 오현경. 다시 한 번 문영남 작가와 손을 잡은 그녀는 ‘왕가네 식구들’로 새로운 변신을 시도 중이다. “수박이를 통해서 흐트러질 수도 있는 나의 인생을 한 번 더 다잡으려한다”는 그는 ‘왕가네 식구들’을 통해 우리에게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팽현준 pangpang@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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