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즐기는 습관 | 봄소식을 기다리는 서툰 마음
예술 즐기는 습관 | 봄소식을 기다리는 서툰 마음
지난 주, 조금 일찍 봄을 반기고 싶은 마음에 제주도로 떠났다. 단체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 덕분에 어수선해진 비행기 안에서, 샛노란 유채꽃의 물결과 함께 흔들리며 시집을 읽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봄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갑자기 태풍성 비바람이 불어오면서 이틀이나 꼼짝달싹 못하고 게스트하우스에만 갇혀 지냈다. 마침 근처에 추사(김정희)의 유배지가 있어서, 추사기념관에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빈자의 미학’을 실천하는 승효상이 세한도의 모습대로 설계했다. 외관은 창고처럼 조촐하지만, 작은 창문으로 빛을 부르는 ‘속 깊은’ 기념관이다. 현인의 뜻을 따라 유배놀이(시간을 인식하기)나 하자는 마음에, 마음씨 좋은 주인장이 삶아준 제주 고구마를 덥석 베어 물고 책장을 열었다.

예술 즐기는 습관 | 봄소식을 기다리는 서툰 마음
예술 즐기는 습관 | 봄소식을 기다리는 서툰 마음
비바람 소리를 들으며 행간을 노닌 책은 폴란드 작가 브루노 슐츠의 단편집이다. 그의 단편집 <계피색 가게들>(1934년)과 <모래시계 요양원>(1937년)이 <브루노 슐츠 작품집>(을유문화사)에 수록되어 있다. 브루노 슐츠는 여전히 미지의 작가군에 속한다. 그의 소설은 폴란드에선 전간기 아방가르드 문학의 고전으로 통하지만, 우리에게 아직 낯설 수밖에 없다. 출판사는 홍보용으로 <백년 동안의 고독>을 언급했지만, 편의상 ‘폴란드의 카프카’라고 소개하는 것이 더 낫다. 1936년에 <소송>을 직접 번역했으니, 카프카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초현실주의의 색채도 강하지만, 주인공의 아버지가 벌레나 다른 것으로 자꾸 변신하는 모습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단편집이 놀라운 것은, 슬쩍 두 장만 넘겨도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진다는 점이다. 마치 현대소설처럼 시네마적인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더욱이 짧은 단편들의 묶음이지만, 모두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추억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술 즐기는 습관 | 봄소식을 기다리는 서툰 마음
예술 즐기는 습관 | 봄소식을 기다리는 서툰 마음
브루노처럼 몽환적인 기운을 선사하는 전시도 있다. 최근 비싼 입장료를 요구하는 블록버스터 전시에 몹시 지쳤다면, 청담동에서 즐길 수 있는 무료 전시회를 추천하고 싶다. 피터 린드버그전 ‘이미지 오브 우먼’(10꼬르소 꼬모)과 프랑스 젊은 작가전 ‘The French Haunted House’(송은 아트스페이스)이다. 전자는 패션 사진의 대가 린드버그의 사진을 모았다. <보그>, <하퍼스 바자> 등의 패션지에서 활동한 린드버그는 모델의 사진을 수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수퍼 모델이나 배우들의 사진이지만, 굉장히 다른 뉘앙스로 다가온다. 전시장에서 한 번 그녀들의 얼굴에만 집중해 보시라. 주근깨, 다크 서클, 주름 등이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초월의 마력을 불러일으킨다. 후자는 프랑스의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 낸 재기발랄한 ‘유령의 집’으로, 다소 불온한 기운이 서서히 엄습해 온다. 전자가 일상의 강렬함을 아름다운 흑백으로 포착한다면 후자는 안락한 일상을 불편한 공포로 바꾸어 놓는다. 둘 다 삶의 에너지가 소름끼치게 흐른다.

예술 즐기는 습관 | 봄소식을 기다리는 서툰 마음
예술 즐기는 습관 | 봄소식을 기다리는 서툰 마음
이선균, 전혜진 부부가 처음 무대에 같이 선다는 이유로 화제가 된 연극 < Love, Love, Love >는 영국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연극 연출가 마이크 바틀렛의 작품이다. 이선균이 나온다는 이유로, 혹은 제목이 과하게 ‘러블리’하다는 이유로 드라마 <파스타>를 떠올리며 연애용으로 생각해선 다소 곤란하다. 3막으로 구성된 이 연극은 1967년, 1990년 그리고 현재의 영국을 무대로 하고 있다. 비틀즈에 열광했던 베이비붐 세대와 자식들(다음 세대)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혁명을 꿈꾸었던 부모 세대는 훗날 자기중심적이고 부유한 보헤미안이 되었지만, 무기력한 자식 세대는 부모들이 창조한 온실 안에서 화초처럼 자라고 만다. 이것은 영국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88만원 세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유진 오닐 식의 파국보다는 훨씬 밝은 미래를 약속하니, 작품의 무게에 짓눌리진 않는다. 비틀즈의 ‘All you need is love’, 블러의 ‘Song2′를 듣는 것만으로 연극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공연이 4월 21일까지(명동예술극장)이니, 조금 서두르는 편이 좋겠다.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