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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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이 정말 대단한 이유는 자신의 슬프고 아팠던 과거를 즐거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나의 과거로 남을 웃길 수 있다는 건 과거가 더는 슬프고 아프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얘기를 꺼내놓아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내적인 성장을 이룬 증거라는 설명도 기억에 남는다. 배우 남보라를 만나고 난 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이 커다란 눈망울 속에 자리한 옹골진 내면에 기특함이 느껴졌던 이유다. 사실 남보라가 배우라는 타이틀을 손에 넣기까지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데뷔와 동시에 ‘13남매’, ‘인간극장’, ‘천사들의 합창’ 등의 수식이 그녀를 뒤따랐다.

하지만 남보라는 주저앉거나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나이를 먹어가며 남이 자신을 보는 방식대로 행동하는 법이 아니라 남이 자신을 봐주길 원하는 방식대로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카메라 앞에 서면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그녀에게는 좋아하는 연기를 하기 위한 필요에 의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건 결과적으로 그녀는 17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 올렸고, KBS2 드라마 ‘상어’의 한이현 역을 맡으며 연기자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내적 성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미소가 오늘보다 밝은 그녀의 미래의 증거처럼 느껴졌다면 과장인 걸까.

Q. ‘상어’의 슬프고 아련한 감정을 고조시키는 데는 한이현의 몫도 컸다.
남보라: 시청률은 조금 아쉬웠는데 오히려 종방 후의 반응이 더 뜨거운 것 같다(웃음). 맡은 역할은 애잔한 느낌이 담겨있지만, 극 자체가 워낙 무거웠기에 개인적으로는 조금 가볍게 쉬어갈 수 있는 포인트를 만드는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Q. 극 중 김수현(이수혁)과의 케미가 돋으면서 좋은 반응을 이끌었다. 마치 청춘드라마를 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웃음).
남보라: 실제로 이수혁은 굉장히 시크하고 말수가 적다. 둘 다 찍으면서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보다는 이수혁이 인기가 좋았다. 인터넷을 봐도 ‘내가 한이현이었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더라. 나는 단지 여성 시청자들이 빙의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됐던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Q. 한이수(김남길)가 친오빠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연기로는 숨겨야 했다.
남보라: 솔직히 말해 헷갈렸다. 한이현의 캐릭터에 몰입을 해보니 ‘정말 이 사람이 왜 이럴까, 가게도 자주 오고 밥도 사주고 신발도 사주는데 좋아해야 하나’란 생각이 들더라. 내가 극 중에서 호감이 있는 사람은 수현인데 이수의 적극적인 태도에 어떤 반응을 담아내야 할까 혼란스러웠다.

Q. 한이수가 오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이현의 연기는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장면이었다.
남보라: 이현의 가슴 아픈 느낌을 드러내려 집중했다. 감정연기에 몰입하니까 정말 슬프더라. 꿈꿔왔던 오빠가 내 앞에 서 있는데 기쁘면서도 그동안 왜 나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었든지 원망의 마음도 들고 그랬다. 연기로 잘 표현이 됐는지는 모르겠다(웃음).
남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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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중요한 신 몇 개를 제외하면 이현의 캐릭터가 조금은 기능적인 측면에서만 다뤄졌다는 느낌도 있다. ‘상어’를 찍으며 아쉬움이 남는 부분은 없는가.
남보라: 이야기를 다 풀지 못한 게 아쉽다. 수현이 이수와 관계로 인해 이현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드라마 환경적인 제약으로 다 다뤄지지 못했다. 각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 더 정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게 아쉽다.

Q. 2006년에 데뷔한 이래로 ‘상어’를 통해 어느 정도 연기자로 자리를 잡았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남보라: 아직 멀었다(웃음). 연기는 정말 우연한 계기로 인해 하게 됐다. 2006년에 시트콤 ‘웃는 얼굴로 돌아보라’에 출연할 때만 해도 거의 백지상태였기에 뭘 했었는지 솔직히 기억도 안 난다(웃음).

Q. 사실 연기자이기 이전에 개인사가 먼저 조명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주변의 관심이 달갑지 않았겠다.
남보라: 그 당시만 해도 방송이 너무 싫었다. TV 방송에 아예 나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천사들의 합창’에 나왔던 아이가 연기한다고 하는 말들이 그 나이 때에는 웃어넘기기 힘든 아픔이었다. 이후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연기활동을 중단했었다. 방송연예학과에 가서 연기를 공부하기는 했지만 졸업할 때가 돼서는 ‘취직을 어디로 해야 하나’ 하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웃음).

Q. 방송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다시 대중 앞에 서기까지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겠다.
남보라: 한창 나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돌아다닐 때는 인터넷도 안 했었다. 요즘도 트라우마 비슷한 게 남아서 많이는 보지 않는다. 근데 천성적으로 좌절감을 느끼는 성격이 아니라서 어느 순간 ‘도대체 그들이 어떤 자격으로 나에게 이럴까’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 오기로 내가 직접 안티카페에도 가입해봤는데 그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등업까지 시켜줬다(웃음). 그래서 게시물을 읽어보니 사진에 그림판으로 콧수염 그려놓는 수준의 장난이 전부더라. 한 번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그 후로 별로 타인의 반응에 대해 신경 쓰지 않게 됐다. 쿨해졌달까.

Q. 연기활동도 그즈음에 재개한 건가.
남보라: 심리적으로 강해지고 나니 나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됐다. 나를 돌아보니 연기에 대한 열망과 능력이 있더라. 대학교에 다니다가 언젠가 무심코 “연기를 하고 싶다”는 말을 내뱉을 정도였다. 그때 MBC 드라마 ‘로드 넘버원’을 만나게 됐다. 복귀 첫 작품이었는데 원래 최초 오디션에서는 떨어졌었다. 연기에 대한 마음이 컸던 만큼 떨어지고 나서 많이 울고 힘들어했는데 감독님이 나를 다시 부르시더니 “너 큰 역할 주면 잘할 수 있겠어?”라고 하시면서 대본을 주셨다. ‘로드 넘버원’을 6개월간 찍으면서 정말 많이 혼났지만 그만큼 많이 배웠다. 나의 연기생활에서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Q. 필모그래피 중 KBS2 ‘드라마스페셜’에 ‘마지막 후뢰시맨’과 ‘내 낡은 지갑 속의 기억’으로 두 번 출연한 것이 눈에 띈다.
남보라: 미니시리즈처럼 시간에 쫓기지 않고 PPL(간접광고)에 구애받지 않으며 여러 가지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단막극의 장점이다. 미국 영화시장을 봐도 블록버스터급 대작들과 함께 독립영화도 인기가 많은데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문화가 형성이 덜 된 것 같다. B급 영화나 드라마가 인기를 끌어야 문화의 다양성이 확보된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단막극은 새로운 소재와 시퀀스와 영상으로 시청자를 만날 수 있는 통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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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적지 않은 작품 수보다도 최근 들어 다양한 배역을 맡으려는 노력이 눈길을 끈다.
남보라: 내가 얼마나 잘 표현할 수 있는가가 최우선 고려 사항이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도 그런 시도의 일환이었다. 반응은 별로였지만 어쨌든 나의 선택이었으니 내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보여드리고 싶은 모습이 많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린 것은 아직은 내가 젊다는 생각에 나에게 맞는 역할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씩 맛을 보고 실험을 해본다는 생각으로 배우면서 연기하고 있다.

Q. 그렇다면 여태껏 연기했던 배역 중에 본인의 입맛에 잘 맞는 캐릭터도 있었나.
남보라: 물론 있었다(웃음). 영화 ‘써니’의 금옥 역이었다. 거의 놀다시피 할 만큼 또래 친구들과 연기하는 게 재밌기도 했지만 금옥의 성격이 나의 실제 성격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실제로 대본 리딩할 때 감독님이 나를 보시더니 금옥 캐릭터에 내 성격을 많이 수정해 넣으셨다.

Q. 어떤 연기자로 기억되고 싶은가. 롤모델로 꼽는 배우가 있나.
남보라: 줄리엣 비노쉬와 이자벨 위페르를 좋아한다. 2011년에 학교 과제 때문에 ‘엘르(Elles)’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는 줄리엣 비노쉬에게 빠져버렸다. 잡지사 기자인 평범한 여성의 삶을 통해서 여성의 자존감과 희생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특히 마지막에 그녀가 성매매 여성을 인터뷰하고 난 뒤 허망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장면에서 느낀 점이 많다. 특별한 연기를 펼쳐서 캐릭터로 기억되는 것보다도 줄리엣 비노쉬처럼 연기를 통해 그 배우 자체가 궁금해지는 연기를 하고 싶다.
남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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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배우 남보라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나.
남보라: 잘 모르겠다(웃음). 이제는 차기작을 고르기도 쉽지 않다. 2년 전만 해도 역할이 들어오는 대로 바로바로 했을 텐데 필모그래피가 쌓이다 보니 작품 선택에 신중해졌다. 이십 대 초반이 나에 대한 투자기간이었다면 이십 대 중반은 안정적인 연기력을 선보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삼십 대에 배우로서 꽃 피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웃음). 개인적으로 원하는 이미지가 있다면 인간적인 배우라고 느끼셨으면 좋겠다. 마치 옆집에 사는 동네 꼬마처럼 생활연기자라고 봐주시면 좋겠다.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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