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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의 등장은 참했다. SBS ‘연애시대’의 궁중요리 전문가 정유경은 완벽한 여자였다. 예쁘고, 착하고, 요리도 잘하는 유경은 남자들이 갖고 있는 ‘첫사랑 판타지’를 충족시켰다. 역할 자체는 매력적이었지만, 그 때만 해도 배우 문정희가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 후 KBS 드라마 스페셜 ‘마음을 자르다’, SBS ‘천일의 약속’ 등에서 조금씩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던 그녀는 2012년 김명민과 호흡을 맞춘 영화 ‘연가시’로 흥행배우 반열에 오른다. 연가시에 감염된 경순에게서 참한 ‘천상 여자’ 문정희는 보이지 않았다. 여배우로서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에, 청룡영화제는 그해 여우조연상을 안겼다.

문정희는 이번 여름, ‘숨바꼭질’을 통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가 맡은 역할은 딸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희. 영화 속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에너지가 넘친다. 함께 연기한 선배 손현주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넘어선다. 손현주의 원맨쇼가 되지 않을까 예상한다면 뒤통수를 맞을 것이다. 그녀는 “연기를 잘 하려면 잘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잘 산다’는 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을 말한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선명하게 보여주려면, 그 매개체인 연기자가 깨끗한 상태여야 한다는 거다. 문정희의 얘기를 들을수록, 그녀가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Q. ‘숨바꼭질’ 얘기하기 전에, 다른 영화 얘기부터 좀 하자.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 봤나. 요즘 워낙 잘 되고 있는 영화들이라…
문정희 : 봤다. 안 보니까 영화계 사람들이랑 대화가 안 돼서… (웃음) 요즘 좀 피곤하지만, 무리해서 봤다. 둘 다 재밌었다. 두 작품 다 좋은 영화긴 한데, 보면서 우리 영화도 꽤 괜찮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Q. 자신감 가질 만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재밌게 봤다. 사실 악몽도 꿨다. 잘 때 문도 꼭 잠그게 되고. 주위에서 무섭다는 반응을 보면 기분이 어떤가.
문정희 : 이건 사실 사회적 문제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초인종 옆에 그려진 암호도 범죄에 실제로 쓰인 표식들이다. 현실적인 이야기라 더 무서워하는 건데, 그걸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지 않나. 하지만 영화는 결국 오락이다. 무섭다는 건 그만큼 관객들이 이야기에 몰입하고, 재밌게 봐주신다는 거니까 그런 면에서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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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일반 시사회 반응은 꽤 좋지만, 영화를 본 기자나 평론가들은 이야기 구성의 허점을 많이 지적하던데.
문정희 : 사실 나도 이야기에 구멍이 좀 보이더라. 구성상의 아쉬움도 있었고. 하지만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더라도, 우리 영화는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다. 독특한 색깔도 갖고 있고. 스릴러로서의 긴장감이나 공포를 즐겨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Q. 평론가와 대중의 반응이 갈리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문정희 : 둘 다 수용돼야 한다. 사실 기자들이 지적하는 건 배우나 영화 제작진들도 비슷하게 느낀다. 미흡한 부분이 존재하면 당연히 그에 대한 지적은 받아들여야지.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할 만한 매력이 있다는 것도 봐주셨으면 한다. ‘연가시’ 때도 그랬고, ‘은밀하게 위대하게’ 때도 그랬다. 평론가들의 평가와 흥행이 상관없을 수도 있는 거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의 시점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Q. 내 개인적으로는 어렸을 때 집에 누군가 들어오지 않을까 무서웠던 기억이 있어서 더 재밌게 봤던 것 같다. 본인에게는 그런 기억 없나.
문정희 : 나도 겁이 많은 편인데, 나이 들면서 담이 세진 것 같다. 또 이런 영화 찍고 나면 그만큼 담력이 키워지기도 하고. 하지만 영화와 같은 일이 현실에서 생긴다면 너무 끔찍할 것 같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다고 촬영할 때 겁먹지는 않았다. 내 연기 생각하느라 겁먹을 여유도 없었다. (웃음)

Q. ‘검은 헬멧’ 쓴 범인의 비주얼도 무서웠다.
문정희 : 헬멧을 쓰고 있으니 표정이 안 보인다. 표정을 모르니까 거기서 오는 무서움이 또 있는 것 같다. 촬영장에서도 ‘검은 헬멧’이 가만히 쳐다보는 장면 얘기를 많이 했다. 험상궂은 표정을 보여주는 것보다 그게 더 무서울 것 같다고.

Q. ‘검은 헬멧’이 범죄까지 저지르게 된 이유는 뭔가. 일각에서는 하층민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영화라고 평하기도 하던데.
문정희 : 단순히 집이 없어서 사람을 죽이는 건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 절반이 집이 없는데, 그럼 다 살인자 범죄자가 되게. 당연히 그를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가 하층민이라서 그렇게 됐다고 말하려던 건 아니다. 꼭 하층민이 아니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과 자의식을 감추고 있다.

Q. 주희는 특수한 상황에 처한 인물이다. 그동안 대개 일상적인 인물을 연기했었는데, 몰입이 힘들지는 않았나.
문정희 : 집착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집요함이 있다. 나도 마찬가지고. 그 집요함이 극대화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를 계속 생각했다. 감독님이 던진 화두는, 문정희라는 인물에 덧씌워진 이미지를 깨고 집요한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게 연구하라는 것이었다. 딸과 집에 대한 집착이나, 불안한 눈빛, 비뚤어진 호흡 등 주희의 행동 하나하나가 집요함의 산물이다.

Q. 흔한 표현이지만, 정말 파격적인 연기 변신이다. 변화에 대한 갈망이 있었나.
문정희 : ‘변해야지’ 하고 작품을 선택한 건 아니다. 이전 작품이 ‘연가시’의 감염자였기 때문에 사실 예쁜 역할을 하고 싶었다. (웃음)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주희라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다. 게다가 여배우가 집요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흔하지 않으니까. 연기 변신이라기보다는 내가 이 역할을 맡았으니까 주희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뿐이다. 주희는 옆집에 살 것 같은 평범한 인물이면서도 독특한 캐릭터다. 그래서 내가 주희를 하고 싶다고, 감독이나 제작자들에게 어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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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연애시대’의 유경만 해도 한없이 착한, 어찌 보면 좀 비현실적인 캐릭터다. 그런데 KBS 드라마 스페셜 ‘마음을 자르다’ ‘스틸 사진’에서는 감춰뒀던 욕망을 조금씩 드러낸다. ‘천일의 약속’에서도 훨씬 솔직한 모습이고. 실제 본인의 성격은 어떤가.
문정희 : 난 밝은 스타일이다. 에너지가 많다. 운동도 좋아하고. 내가 연기한 캐릭터 중 그 어떤 것도 실제 내 모습과 비슷한 건 없다. 그만큼 아직 못 보여드린 게 많다. ‘숨바꼭질’로도 부족하다. 사실 뭐 얼마나 했다고 변신하고 말고 할 게 있겠나. 문정희의 이미지라는 게 구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할 수 있는 영역이 생기면 하고, 또 하고. 배우로서 그런 게 재밌다.

Q. 대부분의 팬들이 문정희를 기억하기 시작한 건 아마 ‘연애시대’였을 거다. 참 여유가 넘치고 평화로운 인물을 연기했는데, SBS ‘땡큐’에서 말하는 걸 보니 그 때 당시가 그리 평화로운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문정희 : ‘연애시대’는 오디션을 봐서 운 좋게 하게 됐다. 작품 자체가 워낙 좋았고, 동진의 첫사랑이라는 ‘판타지’를 자극하는 캐릭터라 매력이 있었다. 사실 요리도 잘하고, 착하고, 예쁘고, 말도 안 되는 여자다. (웃음) 그런데 ‘연애시대’ 끝나고 한 2년 동안 작품을 못 했다. 오디션에서 계속 떨어졌다. 그 때 방송계, 영화계의 생리에 대해 잘 알게 된 것 같다. 선택받아야 한다는 거, 이거 사실 엄청 스트레스거든. 근데 또 그게 이 직업의 특성이다. 선택받지 못했을 때의 상처를 극복하는 것도 오래 걸리고. 그런 게 2년 동안 단단해졌다.

Q. 그런 시간을 견뎌서일까. 영화 ‘연가시’로 흥행 배우 반열에 올랐다. 상도 받고. 더 큰 욕심이 생길 것 같은데.
문정희 : 상은 눈꼽만큼도 생각한 적 없다 사실. 그냥 감염자라는 설정이 재미있었다. 연가시라는 것도 접하기 힘들었던 거니까. 다행히 그걸 좋게 봐주셔서 상이 따라온 것뿐이지. 연기를 잘하고자 하는 욕심은 있어도 상을 타야겠다는 욕심은 없다. 사실 연기를 못하면, 그게 상 못 탄 것보다 백만 배 더 힘든 일이다.

Q. ‘연가시’도 셌는데, ‘숨바꼭질’은 더 파격적이다. 해보고 싶은 역할이 또 있나.
문정희 : 그런 건 없다. 좋은 작품에 좋은 역할이면 뭐든 좋다. 사실 어떤 역할을 맡든, 내가 잘 살아야 한다. 모든 캐릭터가 나라는 존재를 거쳐서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거니까. 문정희라는 인간 자체가 오염되어 있다면 역할도 왜곡될 것 같다. 시나리오나 대본이 악보라고 치면 배우는 연주자인데, 정확한 음을 누를 수 있게 트레이닝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현실이 연기보다 더 어렵다.

글, 편집. 기명균 kiki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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